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78화 (178/200)
  • ◈178화

    전의.

    전투가 아무리 불리하고 막막할지라도 사람에게는 상상을 초월하는 정신력이 있다.

    누군가 이 정신력을 발휘할 트리거를 당겨 주기만 한다면 적의 군세가 어떠하든 상관없다.

    그렇기에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한 가장 훌륭한 방법은 상대방의 보여지는 힘을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신력을 무너트리는 것인데 유라는 안타깝게도 하늬안의 트리거를 가열차게 당겨 버린 것 같았다.

    하늬안이 이빨을 가는 소리가 전장의 소음을 뚫고 유라의 귀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부러진 대검을 집어 던지고 남은 대검 하나를 양손으로 고쳐 쥐며 지면을 발로 차 그녀의 앞에 있는 유라의 괴이한 소환수들을 모두 일격에 반으로 갈랐다.

    “아아주우움마아?!”

    이 상황에 뱉을 대사는 아닌 것 같지만 그녀의 분노는 특유의 고함을 타고 주변을 뒤흔들었다.

    유라가 역겹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을 한 번 휘두르자 그녀의 손길에 소환진이 펼쳐지며 수도 없이 많은 구울 떼가 사방에서 하늬안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늬안은 공중에서 몸을 비틀어 한 바퀴 회전하여 구울들을 모두 베어 냈다.

    “야, 꼬맹이.”

    하늬안은 구울의 시체 하나를 디딤발 삼아 다시 추진력을 얻어 유라에게 더욱 가까이 근접했다.

    “내가 검을 두 개 쓰는 이유가 뭔 줄 아냐?”

    “모르죠.”

    지척으로 다가온 하늬안을 보면서도 유라는 여유롭게 뒷걸음질 쳤다.

    그 모습조차 열이 받는지 하늬안은 대검을 높이 쳐들고 고함을 쳤다.

    “하나만 쓰면 내 검이 내 힘을 못 견디거든!”

    허공에서 빠르게 아래로 내려찍은 하늬안의 검은 바닥을 내리치며 사방으로 깊은 균열을 발산했다.

    마치 드래곤이 발 구르기라도 한 모양으로 구덩이가 생기며 강한 바람이 공간을 뚫고 지나갔다.

    바람에도 마나가 실려 주변에서 제논의 병력들을 괴롭히던 유라의 나머지 소환수들까지 몰살시켜 버렸다.

    그러나 아쉽게도 유라는 이미 그녀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나 있었다.

    유라는 공중에서 하늬안을 멀뚱히 바라보곤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했다.

    “아줌마는 학습 능력이 달리나 봐요?”

    “뭐 인마?!”

    하늬안이 공중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저 랭커예요. 당신 같은 하급 전사 따위가 아니라구요.”

    유라는 싱긋 웃더니 손에 쥐고 있던 뜯어지고 해진 곰 인형을 아래로 던졌다.

    유라의 손에서 검붉은 마나가 흘러나와 곧장 곰 인형에게 향했고 인형은 이내 거대하고 부패한 곰으로 점차 변해 가다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지면으로 떨어졌다.

    그워어어어어-

    곰이 포효하며 붉은 눈동자를 번뜩였다.

    하늬안은 대검을 고쳐 쥐었다.

    곰은 하늬안보다 다섯 배는 더 컸다.

    덩치는 말할 것도 없다.

    적어도 두세 팀 정도의 레이드 인력이 덤벼들어야 할 만큼 강력한 상대라는 것이 느껴졌다.

    다년간 제논에서 레이드 사냥을 떠나며 드웨이크가 늘 이런 상대는 혼자 마주하지 말라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러나 지금은 혼자 해낼 수밖에 없다.

    사방에 제논의 피와 적들의 피가 낭자하다.

    그녀가 유라를 놓친다면 더 많은 제논의 피가 대지를 적실 것이다.

    비록 그녀에게 승리할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고 해도 다른 이에게 다음을 맡기기 합당할 만큼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게다가 저 계집애 아줌마라고 했으니 죽더라도 뺨따귀는 한 대 때려 줘야겠다.’

    전의를 다시금 불태우는 하늬안이었다.

    부패한 전투 곰은 유라에게 어마어마한 마나를 주입받으며 지속적으로 하늬안을 밀어붙였다.

    그뿐만 아니라 유라는 자신의 마나를 분산시켜 사방에 크고 작은 소환수들을 계속해서 소환했다.

    사방으로 압박을 받은 하늬안에게 숨 쉴 틈은 없었다.

    두 자루의 대검이 아니라 한 자루의 대검을 쥐고 있었기에 보다 기민하고 정확한 일격을 가할 순 있었지만 다이내믹한 전투를 이어가기 힘들었고 빈틈을 노릴 기회를 만들 수 없었다.

    또한 이 기괴한 전투 곰은 시간이 갈수록 덩치가 점점 더 커지는 것 같았다.

    “어때요? 어때요?”

    유라가 즐거운 듯 키득거리며 하늬안에게 소리쳤다.

    하늬안은 이빨을 부득부득 갈며 사방으로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그때 하늬안의 앞에서 거대한 앞발을 내지르던 전투 곰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정말 순식간이었다.

    그 덕분에 일격을 날리려던 하늬안의 검이 허공을 베었고 그 일격이 당황한 유라의 복부를 향해 날아가다가 급히 그녀의 앞을 막는 다른 소환수들에 의해 데미지를 입혔다.

    하늬안도 유라도 잠시 멍해져서 고개를 갸웃하는데 그녀의 앞으로 뜨거운 열기가 들이닥쳤다.

    “……라테?”

    아니, 아니었다.

    불타는 건틀릿을 착용한 육중한 사내의 등이 하늬안의 앞을 막았다.

    로만.

    그였다.

    “유르겐이 가세했으니 나도 가만히 있을 순 없지 않나.”

    로만이 어깨를 풀며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뜨거운 열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로만의 전신에 붉은 열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크릉-

    로만이 쳐 냈던 전투 곰이 빠른 몸놀림으로 기척 없이 로만에게 다가와 앞발을 내질렀다.

    그러나 로만은 유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왼팔을 들어 앞발의 공격을 그대로 받아 냈다.

    충격이 로만의 신체를 타고 지면까지 닿았다.

    로만의 양발이 발목까지 땅에 쑥 하고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계속해서 유라를 주시할 뿐이었다.

    전투 곰의 다음 공격이 이어지기도 전에 녀석이 다른 앞발을 들자마자 로만의 주먹이 전투 곰의 복부를 가격했다.

    복부를 가격당한 곰의 등 뒤로 엄청난 열 기둥이 솟구쳤다.

    로만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두어 번 더 곰의 복부를 가격했다.

    열 기둥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고 곰의 복부에 거대한 구멍이 생겼다.

    주변으로 타들어가는 열기가 퍼져 나간다.

    곰의 눈에 생기가 사라졌다.

    전세역전.

    이제 유라의 얼굴이 굳어졌다.

    여유롭던 여자아이는 양손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면서 로만을 노려보았다.

    하늬안은 본능적으로 이제 자기가 끼어들 자리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로만, 이 남자라면 유라 정도는 어렵지 않게 정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한 가지만.

    “아재.”

    하늬안이 로만에게 말을 걸자 로만이 등 뒤로 그녀를 살짝 돌아보았다.

    “딱 하나만 부탁합시다. 조 녀석, 뺨따귀 한 대만 때려주셔.”

    로만은 자기의 손에 착용된 불타오르는 건틀릿을 내려다보며 진심이냐는 얼굴로 하늬안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하늬안은 태어나서 이렇게 진심이었던 적이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진중하게 한 번 끄덕이곤 대검을 쥔 채 자리를 이탈했다.

    로만이 어깨를 으쓱하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유라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말했다.

    “피차, 바쁜 것 같으니 빨리 끝내지.”

    유라가 소리를 빼액 지르며 사방에 넝마 조각의 각종 인형들을 던져 댔다.

    그러자 각 인형들은 본래의 모습으로 기괴하게 변화하며 유라의 곁에 굉음과 함께 소환되었다.

    썩어 문드러지고 도저히 살아 있다고 이야기할 수 없는 수준의 이 괴수들은 유라의 곁에서 금방이라도 로만을 씹어 삼킬 기세를 떨치며 으르렁댔다.

    로만은 주먹을 마주치곤 그들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 * *

    정혁은 롬의 변칙성 공격을 그의 감으로 계속해서 막아 내며 틈을 노리기 위해 노력했다.

    아무리 각종 칭호의 능력들이 사라졌다고 해도, 그가 지금 랭킹 1위와 싸우고 있다고 해도 정혁은 정혁이다.

    이 정도에서 무너지고 힘에 겨워할 만큼 약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에겐 두 제련 망치와 단검이 있다.

    다만 정혁은 지금 그의 제련 망치에 자신의 마나를 주입하며 롬과의 전투에 임하고 있었다.

    정혁은 그의 에고 장비들을 실제의 주인들에게 보내며 생각했다.

    사실 그에게 남을 진짜 장비는 결국 대장장이로서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무기.

    이 두 속성의 제련 망치뿐이지 않을까.

    에드가의 등에 올라 하늘을 비행하고 주입받은 기억이 낳은 최고의 움직임을 통해서 두 단검을 무자비하게 휘두를 수 있다고 해도 왠지 모를 이질감이 있었다.

    마치 장비와 그가 또 언젠가는 그 주인을 찾아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그렇다면 정혁은 이제 그에게 정말로 남은 자신의 본연의 모습으로 이 모진 전장을 헤쳐 나가야 했다.

    미리 준비하고 자신을 또 한 번 단련해야 했다.

    채광 활성화 스킬은 숙련도를 기반으로 한다.

    이미 만렙에 숙련도도 더 이상 올릴 수 없는 수준.

    여기에 자신의 마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만 한다면 현재의 랭킹 1위 롬이라고 해도 정혁을 상대하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정혁의 신체 움직임은 일반적인 대장장이가 아니다.

    ‘한’의 기억과 전투 패턴이 전부 저장되어 있는 ‘복제품’.

    그러니 정혁은 더욱 부드럽고 강렬하게 롬을 밀어붙일 수 있었다.

    그가 빨리 이 전쟁의 시작점인 롬을 무너트려야 승기를 잡을 수 있다.

    정혁은 힘을 내 롬을 더욱 거세게 밀어붙였다.

    “쉽게 끝날 수 있을 것 같아?”

    롬이 조롱하듯 말하며 이죽거렸다.

    “위선자.”

    정혁의 눈썹이 움찔했다.

    롬의 검은 형체가 없다.

    마치 공기가 압축되어 검날이 되는 것 같았다.

    보이지 않는 검들이 숨통을 조여 오는 것 같지만 정혁은 자신의 마나로 층층이 보호막을 형성하고 유지하며 전력과 화염으로 롬의 전방위를 압박했다.

    그럼에도 롬은 정혁의 압박을 전부 버텨 내며 그의 마음을 후벼 파고 있었다.

    “전쟁이라는 것은 말이지.”

    롬의 또 다른 검날이 정혁의 눈앞에까지 기운을 뻗쳤다.

    정혁은 그것을 올려 치며 동시에 롬의 위치에 번개를 떨어트렸다.

    롬은 손을 들어 번개를 막아 낸 뒤 혀를 한 번 내밀었다가 입술을 훑고 다물었다.

    “죽음이 장식하는 최고의 작품인거야.”

    저자도.

    그 죽음 이후의 고통 앞에 전율하게 될 텐데.

    정혁은 고개를 저으며 그의 두 망치를 동시에 롬을 향해 집어 던졌다.

    망치가 빠르게 회전하며 사방으로 전력과 화염 덩어리들을 불규칙하게 비산시켰다.

    그러나 롬은 그것을 뛰어넘어 자리를 피한 뒤 다시 바닥을 차고 정혁을 당해 다가왔다.

    정혁은 손을 뻗어 되돌아오는 망치를 쥔 다음 롬의 두 손에 형성된 보이지 않는 검날을 빗겨 막았다.

    둘은 각자의 힘으로 서로를 지탱하며 코앞에서 대치했다.

    “그러기에 그들을 지키려는 너의 행위는 위선 그 자체다. 나를 일격에 죽인다고 해서 이 전쟁이 멈출 것 같아?”

    “방법이 그것이라면……!”

    정혁이 소리치며 망치를 휘두르자 롬이 뒤로 밀려났다가 다시 달려든다.

    정혁은 또 한 번 그를 막아서며 증오를 담은 눈으로 롬을 노려보았다.

    “웃기는 소리! 보기에 너는 내가 혼자일 것 같나?”

    롬의 말에 정혁의 눈동자가 엄청나게 커졌다.

    순식간에 정혁의 허벅지에 깊고 차가운 무언가가 찔러 들어온다는 것이 느껴졌다.

    “……아크……!”

    정혁이 이빨을 깨물며 인상을 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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