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76화 (176/200)
  • ◈176화

    까-강

    롬은 자신의 눈앞에 갑작스레 나타난 청년과 그에게서 뻗어 나온 두 제련 망치를 자신의 검으로 틀어막았다. 그러곤 빙긋 웃으면서 그의 두 눈동자를 한참 바라보았다.

    힘이 부딪친다.

    한 치의 물러남도 없이 말이다.

    그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롬은 지금 용의 힘과 마계의 힘까지 전부를 취한 상태.

    게다가 그의 신체는 지금까지의 플레이 시간 동안 경험한 적 없을 만큼 최상의 상태를 자부했다.

    괴이한 일이었다.

    용의 가호를 받았던 때보다 지금이 더 짜릿하고 신선했다.

    이 힘이라면 저들의 도움 없이 혼자서라도 제논을 모두 박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 뵙네요?”

    정혁의 말에 롬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건방지긴.”

    롬이 그의 망치를 쳐 내자마자 지면에서 솟구치는 열 기둥을 피해 몸을 틀었다.

    그러곤 정면을 관통하는 번개 줄기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검은 번개 줄기를 튕겨내며 그것을 그대로 하늘로 올려 보냈다.

    하늘로 쏘아진 번개는 검붉게 변해 다시 정혁의 자리로 내리꽂혔다.

    정혁은 그것을 피하며 롬과 거리를 조금 벌렸다.

    좋은 반응 속도다.

    상대는 노련한, 아니 그 이상의 실력을 가진 검사다.

    뒤를 힐끔 돌아본다.

    아직 제논의 병력들도 미동이 없다.

    아무리 자신이 약해졌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고 해도 정혁은 제논에게 가장 상징적인 존재.

    적들 앞에서 주눅 들 순 없다.

    게다가 도발은 이쪽에서 먼저 자행했으니 피할 이유도 없다.

    오히려 바라던 바다.

    이렇게 진영의 수장들끼리 한판을 통해 전쟁이 마무리된다면 정혁의 입장에서도 제일 좋은 시나리오다.

    플레이어들이 죽으면 현실 세계에서 어떤 처지인지를 너무 잘 아는 정혁이었기 때문에 죽음을 무엇보다 최소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장장이 주제에 말이야.”

    롬이 희번덕하게 눈을 뜨곤 자신을 관찰하는 정혁을 향해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그는 정혁을 향해 겨눴던 검을 거두곤 자신의 검집에 밀어 넣으며 빙긋 웃었다.

    “이제까지 기다려 온 전투의 환희를 대장장이 따위가 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단 말이지.”

    “허, 그러셨어?”

    “그럼. 알다시피 나는 랭킹 2위라서 말이야. 누구도 날 거스르지 않아.”

    “2위밖에 되지 않는데도 그런가 보네?”

    정혁의 도발에 롬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너도 알지 않나? 랭킹이라는 것, 참 의미 없는 시스템인걸.”

    “그걸 알고 있는 작자가 감히 나에게 덤빌 생각을 다 한 거야?”

    “……소문대로 경박하고 오만하군.”

    정혁은 자신의 소문이 어떻게 났길래 저런 놈에게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억울하기만 했다.

    사실 저쪽도 그렇게 좋은 소리는 안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며 말이다.

    “당장에 자네를 도륙 내고 싶은 마음이 크지만 사실 궁금한 게 있어서.”

    정혁은 뜬금없이 질문을 던지는 롬을 향해 고개를 까닥했다.

    롬은 빙글 웃더니 손바닥을 비비며 말했다.

    “김창수 말이야……. 비르파인, 그놈을 죽일 때 어떤 표정을 짓더나?”

    순간 정적이 흘렀다. 롬의 입가에 비열한 미소가 계속해서 번져갔다.

    “비르파인…… 그 불쌍한 친구.”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아크에게 들었지. 카탈이라는 대륙은 여러모로 아크에게 꽤 재밌는 놀이터였으니까 밀이야.”

    “그래서?”

    “가운데를 딱 틀어막고 있는 자유 연맹, 그놈들을 양쪽에서 집어삼키기 위해 아크는 계략을 짠 거야. 오랜 시간 전장에서 보낸 피폐한 영혼을 찾아. 대륙을 돌고, 돌다가.”

    롬이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리다가 정혁의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논을 발견한 거지. 거기엔 사자의 심장을 가진 김창수라는 야수도 있었지만, 늘 야수의 곁에서 야수인 척하고 살았던 비운의 고양이 비르파인도 있었단 말이야. 아아- 그 가녀린 심성엔 악마의 두드림이 달콤했을 거야.”

    정혁은 큰 숨을 내뱉으며 롬을 노려보았다.

    김창수는 그날 자신의 친우를 스스로 왕좌에서 내려 앉혔다.

    그는 자신의 친우가 잘못된 길을 향해, 파멸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없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날의 결단이 지금의 제논을 만들었다.

    “뭐, 아크의 계획대로 되진 않았지만 난 통쾌하더군. 김창수 그 빌어 처먹을 새끼가 이 허울뿐인 랭커 체계를 무시하고 카탈로 떠날 때의 호기로운 뒷모습을 기억하고 있으니 말이지. 마치, 자기가 세계를 대변하는 양 위선을 떨며 걸어간 그 땅에서 벌어진 사태에 놀랍고 재밌었어.”

    “재미?”

    “그럼, 재미지. 게임은 재밌으라고 하는 것 아닌가? 자네와 나도 이곳에서 게임을 하고 있는 거야. 우리는 눈을 감고 이 세계에 동기화되어서 서로의 실제 목숨은 보장받은 채로 칼을 겨누고 힘 싸움을 하지. 여기에 정의가 필요한가? 이 세계에? 웃기지도 않지. 죽으면 어차피 다시 돌아올 곳인데 말이야.”

    정혁은 그의 말에 어폐가 있다고 느꼈다.

    “그렇다면 당신은 왜 ‘한’을 처리하려고 군대를 꾸렸을까?”

    “아아- 그거. 말했잖아. 재미. 뒤져도 그만이지만 그의 압도적인 무력은 언제나 사람을 짜릿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단 말이야.”

    정혁은 롬이 분명 오아시스에게 훌륭한 에너지원일거라 확신했다.

    동시에 불쾌했다.

    김창수의 결단을 조롱하고 자기의 행위를 정당화한다.

    지금 그의 뒤에 있는 모든 플레이어들에게 저따위 저주를 걸어 놓고 말이다.

    “너 혼자만 재밌으면 되는 거지?”

    정혁이 묻자 롬이 입을 비죽이며 말했다.

    “안 될 거 있나? 남들이야, 알 게 뭐람.”

    한편으로는 다행이었다.

    이놈을 위해 다른 이들이 흘릴 피를 지금 정혁이 막을 수 있을 테니.

    “라고 생각했나?”

    순간 롬이 이죽이며 말했다.

    “그랬겠지. 제논은 늘 정의를 좇았으니. 너도 마찬가지야, 악마를 몰아내고 카탈을 통일하고 갈등을 해소하며 여기까지 왔지 않나? 지금도 어쩌면 괴랄한 정의를 위해 싸우고 있을지 누가 아나?”

    롬이 검집에서 다시 검을 뽑았다.

    그러자 그의 검날이 서서히 공중에 흩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정의? 신경 쓰지 않아. 즐겁기를 바란다. 오로지 이 순간이, 그동안 참아 왔던 나의 모든 열망이 이루어지는 이 순간이 말이야. 그래서 고맙다. 너와 제논에게. 그 고마움에 보답하려면?”

    롬이 발을 두 번 차자 그의 뒤에 있던 세 마리의 본드래곤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러곤 거대한 굉음을 쏟아냈다.

    그와 동시에 지축을 뒤흔드는 고함이 롬의 뒤에서 터져 나왔다.

    에도라의 모든 병력이 일제히 제논의 연합 병력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롬은 양팔을 벌리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시작이다. 나의 즐거운 놀음판이.”

    정혁은 그의 모습에서 아크의 악랄함을 찾아볼 수 있었다.

    롬, 그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늬안!”

    드웨이크가 우레와 같은 함성으로 그들을 향해 달려오는 적군들을 바라보며 하늬안에게 소리쳤다.

    하늬안은 드웨이크와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했다.

    이제, 시작이었다.

    최대한 희생을 막아야 한다.

    막아야만 한다.

    하늬안은 숨을 고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제논의 병력들도 이 둔덕에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서 있지만 이들 중 몇이 최후까지 남을지 모른다.

    지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최단기에 빠르게 끝내야만 한다.

    “아린 국왕님!”

    하늬안이 아린에게 소리쳤다.

    “부디……!”

    아린은 그녀의 부탁이 무슨 의미인지 알겠다는 듯 검을 고쳐 쥐고 그대로 지면에 내려 박았다.

    사방의 숲에서 수도 없이 많은 영혼의 빛이 물결처럼 흘러나와 아린의 곁에 뭉치기 시작했다.

    은행나무 엘프의 영토에서보다 월등히 많은 수였다.

    이제까지 타이런의 땅에서 죽어 간 수도 없이 많은 엘프 선조들의 혼이 아린의 목걸이 앞에서 형체화되어 나타난다.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 품에서 각자의 무기를 빼들고 제논의 병력들보다 앞에서 달려드는 적들을 향해 뛰어나가기 시작했다.

    하늬안은 자신의 대검은 공중으로 치켜올리며 그녀의 칭호답게 하늘을 찌를 듯이 소리쳤다.

    “전원 공격!”

    제논의 병력들과 선조들의 영혼은 두려움 없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안젤리나는 양탄자를 타고 공중에서 활을 꺼내 화살 3개를 활시위에 걸며 침을 삼켰다.

    그녀의 곁으로 그녀를 호위하려는 듯 은행나무 엘프의 까마귀 기수들이 다가왔다.

    안젤리나는 그들을 향해 날아오는 하피와 가고일들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전의를 다졌다.

    순간 번쩍이며 그녀의 곁에 앤이 등장했다.

    앤은 안젤리나의 양탄자에 함께 올라 제논에서 제공받은 스태프를 쥐고 말했다.

    “함께 싸워요.”

    안젤리나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거두고 결의에 찬 표정으로 끄덕였다.

    [에드가!]

    정혁이 롬을 주시하며 전음으로 에드가를 불렀다.

    그러나 에드가는 이미 정혁의 머리 위를 지나쳐 본드래곤에게 향해 있었다.

    [문제없지?]

    [뒤진 새끼들한테 밀릴 순 없지.]

    에드가의 거친 표현이 정혁에게 힘을 주었다.

    정혁은 망치를 고쳐 쥐고 롬을 바라보았다.

    “각자의 신음과 비명으로 가득 찬 전쟁터에는 신기한 법칙이 존재해, 뭔지 아나?”

    롬의 수수께끼 같은 말에 정혁이 고개를 저었다.

    “보이지 않는 힘의 균형. 봐, 인간의 마음에 도사리는 근원적인 노예근성이지. 나보다 위일 것 같은 자에겐 쉽게 덤비지 않는 것. 상위의 존재들에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그 본연의 마음 말이야. 우리 곁엔 마치 누군가 장막이라도 쳐 둔 듯 아무도 접근하지 않아. 너와 내가 온전히 이 싸움을 즐길 수 있도록 말이야.”

    롬은 주변을 가리켰다.

    그들의 곁으로 수도 없이 많은 에도라의 병력들이 지나가지만 누구도 일정 공간 안으로 침범하진 않았다. 마치 그와 정혁의 전투를 존중하는 듯, 혹은 두려워하는 듯 말이다.

    “고로, 이제 너와 나의 싸움만 즐기면 된다는 거야.”

    순간 롬의 근처로 무수히 많은 검날이 생성되었다.

    정혁은 눈을 번쩍 뜨며 두 망치에 자신의 마나를 담았다.

    황금빛 마나는 그의 손에서 일렁이며 망치에 흡수되었고 망치는 더 큰 위력을 자랑하며 정혁의 손안에서 웅웅거렸다.

    정혁과 롬의 전투가 시작됐다.

    그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쟁쟁히 이 전쟁의 둔덕에 울려 퍼지고 하늬안은 벌써 여러 신체 조각들로 더러워진 옷을 털며 다음, 그리고 다음을 또 베어 넘겼다.

    공중전도 치열했다.

    안젤리나의 화살이 사방으로 쏟아졌지만 하피와 가고일, 박쥐 형상의 악마 떼는 끊임없이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앤의 광범위 마법 공격이 전장 곳곳에서 터져 올랐지만 애초에 진영의 개념 자체가 없이 뒤엉킨 그들의 전투 양상에는 큰 이변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아린의 공격도 마찬가지였다.

    악마와 각 짐승들, 그리고 악마가 부리는 몬스터들이야 그렇다 쳐도 에도라의 일반 플레이어들까지 광기에 휩싸인 것처럼 그들의 공세는 주저함이 없었다.

    그때 구름 속에서 검은 창이 안젤리나와 앤이 타고 있던 양탄자를 향해 내리꽂혔고 안젤리나와 앤은 미처 그 창을 피하지 못한 채 지면으로 추락했다.

    드웨이크가 재빨리 추락 지점을 향해 방패를 굳게 쥐고 돌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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