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75화 (175/200)
  • ◈175화

    “자……! 나의 병사들이여!”

    롬이 단상을 붙잡고 마치 아래로 떨어져 내릴 듯 열렬히 환호하는 병력들을 향해 말을 이어 갔다.

    “우리는 이제 우리의 적을 향해 나아간다! 이 땅, 타이런에 함부로 침입한 작은 섬의 침탈자들을 향해 정의를 실현한다! 이제 우리는 싸운다! 짓밟는다! 그리고 죽고! 죽어서도 또 다시 일어나 싸워 갈 것이다!”

    롬의 전신에서 천천히 검붉은 마나가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병력들이 모여 있는 지면에서 진동이 시작된다.

    롬의 단상 아래에서 병력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앤과 아룬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병력들이 모여 있는 곳 아래에서 자줏빛 섬광이 지면을 뚫고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그러나 병력들은 마치 무언가에 취한 듯 여전히 이 아비규환에서 환호할 뿐이었다.

    자줏빛 섬광이 물든 하늘은 먹구름으로 가득하고 번개가 치더니 그 안에서 고룡의 울음소리가 쏟아졌다.

    병사들의 광기 어린 환호가 계속됐다.

    “롬!”

    아룬이 소리쳤지만 롬은 들리지 않는 듯했다.

    “광범위 세뇌 마법이야. 게다가…… 저주까지…….”

    앤이 중얼거리듯 말하며 껴안고 있던 곰 인형을 더욱 강하게 쥐었다.

    “가자! 승리하자! 나의 친우들아! 나의 아이들아! 가서 저들의 목을 쥐어뜯고 너희의 심장을 내어 줘라! 내가 갈망하던 그 전투를, 그 전장을 내게 보여라! 가라!”

    롬의 괴성에 화답하듯 구름을 뚫고 본드래곤 하나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아룬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저 드래곤은 롬에게 용의 가호를 축복해 주고 사라진 그의 드래곤이었다.

    비록 뼈다귀뿐이라 할지라도 본드래곤이 가지고 있는 마나를 통해 아룬은 녀석의 정체를 단박에 파악할 수 있었다.

    이건, 이건 롬이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것이었다.

    롬이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건 아크……!

    그 녀석의 어떤 힘이 작용한 것이다.

    아룬은 앤에게 자리를 피하자고 신호했다.

    “으음. 아니, 아니지. 의리 없게 말이야.”

    그때 그들의 뒤에서 심장이 얼어 버릴 듯 강렬한 한기와 함께 이전의 괴수와 같은 모습이 아닌 평범한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아크가 등장했다.

    그는 팔짱을 끼고 둘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보라고, 친구들. 저 광기에 가득 찬 남자의 야망이 결국 어디까지 가는지 말이야.”

    아크의 혓바닥이 입술을 한 번 훑고 지나갔다.

    그의 눈동자에는 즐거움이 가득했다.

    “그리고 너희도 그에게 충분히 도움이 되어야겠지?”

    아크는 두 손을 들어 앤과 아룬의 목을 순식간에 감아쥐었다.

    그러곤 그들의 마나를 흡수해 자신의 마나와 융합시키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또 다른 괴성이 들리며 본드래곤 두 마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앤과 아룬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지더니 그들의 주변에도 검붉은 마나의 흐름이 맴돈다.

    그들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기 시작할 때쯤 아크는 그들에게서 손을 뗐다.

    그들은 아크에게 고개를 한번 숙인 뒤 천천히 단상을 향해 걸어갔다.

    아크는 앤이 떨어트리고 간 곰 인형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 발로 짓밟아 버렸다.

    곰 인형은 순식간에 부패해 썩어 없어졌다.

    옅은 혼이 인형 안에서 빠져나와 사라졌지만 아크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 박수를 치며 어둠 속으로 사라질 뿐이었다.

    본드래곤 세 마리가 좌중을 압도하며 정비된 병력들의 상공으로 비상했다.

    셋은 서로가 서로를 물어뜯을 듯이 공중에서 싸우다가 다시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곤 한 마리가 낙하해 롬이 서 있는 곳 옆으로 다가왔다.

    롬은 흡족한 얼굴로 드래곤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그의 등을 향해 걸어갔다.

    에도라의 왕이 죽음을 몰고 온다.

    에도라의 왕이 죽음에서 부활한 드래곤의 등을 타고 이 대륙에 죽음을 선사한다.

    롬이 드래곤의 등에서 발을 한 번 채자 드래곤이 낮은 고도로 병력들 위를 날아올랐다.

    날개에서 진득한 액체들이 흩뿌려진다.

    아래의 병력들은 그 액체들을 전신에 맞으며 환호한다.

    “가자! 이제 우리가 이 대륙의 패권을 쥘 것이다!”

    롬의 외침과 함께 온 대지가 병사들의 발걸음으로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제 이들은 죽음을 불사하고 싸우며 또, 죽어서도 싸우는 자들이 되어 롬의 광기와 아크의 야욕을 채울 훌륭한 전쟁마들이 될 것이다.

    * * *

    “웃기는 상황이네”

    에도라의 최전선으로 향하는 길.

    정혁은 에드가의 헛웃음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저승의 망령들이…… 안타까운 운명이구만.”

    “왜?”

    정혁이 묻자 에드가는 힐끔 등 뒤를 돌아보곤 비행 속도를 조금 줄였다.

    마치 보라는 듯 그들이 날아가는 저 앞쪽 하늘을 향해 고갯짓을 하자 정혁이 그곳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먹구름이 가득했다. 에도라의 땅 위였다.

    “느껴지지 않나?”

    안 좋은 낌새는 아까부터 있었다.

    정혁은 그것이 단순히 전운이 감도는 땅에서 으레 느껴지는 긴장과 초조라고 생각했다.

    물론 사이사이 느껴지는 마계의 불쾌한 향기와 적들의 소용돌이치는 마나가 전신을 자극하기도 했다.

    그러나 에드가는 뭔가 다른 것을 감지한 것 같았다.

    “용의 의지를 배반했구만, 그들이 결국 제물이 된 거야.”

    “무슨 소리야 자꾸?”

    “너희들이 말하는 그 랭커, 그들에게 베푼 힘의 대가를 되레 용들이 받았다구.”

    정혁이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저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먹구름 사이로 자줏빛 번개가 번쩍였다.

    몇 번의 번쩍임 사이로 아득하게 에드가와 비슷한 용의 형상이 구름 사이에 비춰진다.

    “꽉 잡아, 내려간다.”

    에드가의 말과 함께 정혁은 그의 등 비늘을 움켜쥐며 한숨을 깊게 쉬었다.

    생각보다 힘든 싸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에도라 왕국과의 전선 최전방에 자리한 전초기지에 정혁과 그의 일행이 도착했다.

    하늬안과 드웨이크가 이미 그곳에서 정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논의 병력과 욘마곤의 용병들은 전투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하나같이 잔뜩 상기된 표정이었다.

    황금빛 드래곤을 타고 강렬한 하강풍과 함께 기지 외곽에 착지한 정혁은 에드가의 등을 툭툭 치곤 바닥으로 내려와 그를 기다리고 있는 하늬안과 드웨이크에게 인사를 건넸다.

    드웨이크는 예의를 갖추며 정혁에게 고개를 숙였지만 하늬안은 왜 이제야 왔냐는 듯 눈을 흘기곤 정혁과 함께 전선 전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뒤로 양탄자를 탄 안젤리나가 착지했고 수많은 은행나무 엘프의 까마귀 떼가 속속들이 도착했다.

    제논과 욘마곤의 병력들은 위용 있는 군세로 제논의 병력에 합류하는 은행나무 엘프들을 바라보며 잠시 넋을 잃곤 했다.

    제논의 병력들에게는 이미 카탈에서의 전투로 그들의 힘과 능력을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욘마곤의 용병들, 특히 자연의 존재들에게는 은행나무 엘프들이 그들의 영토에 발을 들이는 것에 약간의 껄끄러움을 감출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왕의 군대.

    아린 국왕의 곁으로 도열하는 그들 앞에 제논과 욘마곤의 병력들은 든든함을 느끼며 사기를 북돋았다.

    아린의 목에 걸린 왕의 징표, 선조의 목걸이가 전보다 더 강렬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아린 일행이 정혁보다 일찍 출발했으나 조금 늦게 도착한 이유는 나이트 엘프의 마지막 귀족을 만나고 와서였다.

    아린은 알고 있다.

    그들이 어둠 속에서 여전히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음을 말이다.

    그리고 이 땅에서 죽어 간 나이트엘프와 하이엘프들의 영혼이 그와 은행나무 엘프들을 지켜 줄 거라고 말이다.

    “끝이 없군.”

    정혁이 저 멀리 펼쳐진 적들의 전선을 둘러보며 말하곤 숨을 크게 들이 쉬었다.

    “약해졌네?”

    하늬안이 피식 웃곤 정혁에게 장난삼아 한마디 던졌다.

    바로 노발대발할 줄 알았지만 오히려 정혁은 조용했다.

    하늬안은 무안해져서 어깨를 으쓱하곤 정혁의 팔을 툭 쳤다.

    “어울리지 않게 긴장하는 거야?”

    “……글쎄.”

    “왜 이래, 어울리지 않게”

    정혁의 반응에 하늬안이 웃으면서 다시 한번 말을 건넸지만 정혁은 하늬안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가만히 저 웅장한 적들의 대열을 바라보았다.

    전면에 보이는 적은 악마와 그들의 하수인 격인 괴수들뿐이다.

    하늘을 수놓은 가고일과 하피들, 지상에는 사티로스와 구울, 그리고 타락한 오크들이 가득하다.

    중간중간 거대한 몸집의 트롤과 오우거들이 보인다.

    이들이 1진, 그리고 그 뒤로 에도라의 정예 병력들이 잔뜩 대기 중일 것이다.

    1진은 사실 제논의 병력들의 힘 빼기에 주력할 테고 밀려드는 물량 공세에 정신없이 싸우다 보면 어느새 날카롭고 매서운 공격이 사방으로 날아들 것이다.

    제논과 욘마곤 그리고 은행나무 엘프 연합은 이 모든 과정에서 힘의 분배 없이 단신으로 맞서야 한다.

    드웨이크는 자신의 방패와 스피어를 고쳐 쥐었다.

    하늬안 역시 더 이상 정혁에게 말을 걸지 않기로 했다.

    그러곤 자신의 대도를 꺼내 앞을 주시했다.

    그런 그녀의 곁으로 아린이 다가왔고 하늬안은 환하게 웃으며 아린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린 역시 반갑다는 얼굴로 인사를 했지만 구태여 말을 꺼내진 않았다.

    적막 속에 차가운 바람만이 맴돌았다.

    저들과 그리고 우리도 전쟁을 치를 준비는 되었지만 누구도 섣불리 시작의 나팔을 불지 않았다.

    그때 이곳에 오면서부터 신경 쓰였던 검은 구름 사이로 세 마리의 본드래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서로의 몸을 뒤섞으며 날아오르더니 이내 병력들의 제일 앞에 내려앉았다.

    그들의 등에는 저마다 한 명의 플레이어들이 앉아 있었는데 이들 중 가운데 있던 자가 드래곤의 등에서 내려 지면에 착지했다.

    정혁의 곁에 서 있던 에드가가 어느새 모습을 바꿔 황금빛 드래곤의 찬란한 마나를 펼치며 콧김을 크게 뱉었다.

    느닷없이 등장한 본드래곤에 위축되었을 아군 병력들의 사기를 다시 붙잡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세상에.”

    곁에 있던 안젤리나가 입을 손으로 막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예상이 맞나요?”

    “……네”

    안젤리나는 떨리는 손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은…… 저들을 위해 죽음으로 자비를 베풀었던 고귀한 용의 영혼을 지옥에서 다시 불러냈어요.”

    안젤리나의 말에 정혁은 이빨을 까득이며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원하던 바는 아니었겠지.”

    에드가의 말이 뒤따랐다.

    “이런 식으로 다시 세상에 나타나고 싶진 않았을 거야. 게다가 저놈들.”

    “알아. 이미 잠식됐어.”

    정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에드가의 뒷말을 이었다.

    가운데는 순수한 광기에 사로잡혀 있지만 양쪽의 사람들 제정신이 아니다.

    저들이 밟고 있는 땅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몽환적인 안개와 자줏빛 광채, 그리고 몸에서 발산되는 검붉은 마나는 에도라의 병력 전반에 아크의 손길이 닿아 있다는 것을 뜻했다.

    “어-이! 조무래기!!”

    그때 가운데의 남자가 우렁찬 목소리로 한마디 외쳤다.

    정혁은 숨을 고르고 눈을 깊게 감았다.

    순간 그의 모습이 그들의 곁에서 사라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