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74화 (174/200)
  • ◈174화

    침착함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마법사들 중에 타인의 마나를 흡수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거나 혹은 마법을 카피하여 시전자를 공격하는 부류와도 싸운 경험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린의 마나는 일반적인 마나가 아니다.아무나 쉽게 빼앗을 수 있는 그런 마나가 아니란 말이다.

    용의 가호를 통해서 전달된 전력이 깃든 마나는 항상 그녀의 주변을 맴돌며 광범위하고 자비 없는 공격을 퍼부었다.

    린은 그녀 스스로의 월등한 신체 능력과 더불어 용의 가호를 통한 자비 없는 공격을 통해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설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녀의 검술과 체술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설령 그것이 한이라고 해도 말이다.

    린은 자세를 고쳐 잡았다.

    저 건방진 사내만 단칼에 끝내 버리면 마나를 빼앗기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없을 것이다.

    외관적으로도 빈틈이 많아 보였다.

    밀어붙일 수 있다.

    할 수 있다.

    린이 또 한 번 그들의 앞에서 사라졌다.

    그러곤 순식간에 유르겐의 등 뒤에서 나타났다.

    그녀의 양날 글레이브가 눈으로 쫒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유르겐의 목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린을 또 한 번 다른 손에 쥔 한 손 검으로 날아드는 정권을 틀어막아야 했다.

    이번엔 막은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충격과 함께 곧바로 엄청난 화기가 그녀의 전신을 향해 폭발하듯 휘몰아쳤다.

    린은 재빨리 주변의 마나를 터트렸다.

    전기 파동이 화기를 막아 냈고 그 사이에 린은 모습을 숨겼다.

    자신의 최고 속도였다.

    롬조차 그녀의 광속을 따라붙긴 힘들었다.

    눈으로 쫓을 수 없기에 보이지도 않는다.

    마나를 전신에 두르고 있기 때문에 마찰도 최소화하고 전기의 힘을 더 붙일 수 있다.

    그 사이에 휘둘러지는 검날은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생각하기도 전에 목을 몸에서 떼어 놓곤 했다.

    그런데 저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 보인다는 듯이 그녀의 공격을 막아 냈다.

    그리고 동시에 연계 공격을 펼쳤다. 뻗어나오는 주먹에 담긴 마나가 폭발하면서 그 안으로 엄청난 화염이 쏟아져 나왔다.

    린은 자신의 글레이브를 내려다보았다.

    손잡이가 짧고 검날이 긴 그녀의 글레이브는 자신의 몸만큼이나 크고 무거웠다.

    그러나 린은 그것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면서 단 한 번도 글레이브가 불편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 글레이브가 저들에게 큰 위협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결단이 필요했다.

    더 빨라야 한다.

    더 빠르게 저들의 빈틈을 비집고 들어가야 한다.

    린은 글레이브를 자신의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그러곤 한 손 검을 움켜쥐고서 은밀하게 바위 뒤에서 상대를 지켜보았다.

    “린……!”

    그때였다.

    박달수의 보호막 안에서 데릭이 소리쳤다.

    “제발! 전투를 그만두고 잠시 이야기를 나눕시다!”

    린은 데릭의 목소리를 무시했다.

    저들의 세 치 혀를 통해서 죽어 나가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들과 겨뤄서 완전한 승리를 이끌어 낼 수 있다고도 장담 못 하겠다.

    다만 어떻게든 데미지를 입히고 살아 돌아가 랭커들과 대비를 해야 한다.

    롬, 그 빌어먹을 자식이 아크라는 악마 놈과 계약한 것에 대해 계속해서 비판을 이어 왔었는데 이 정도의 실력자를 부리고 있는 제논과 싸워야 한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린은 생각했다.

    “린.”

    자신의 등 뒤에서 낮고 굵은 목소리가 들리자 린이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검을 그었다.

    그녀의 검은 허공을 갈랐고 눈앞에는 불의 정령왕 라테가 타오르는 열기를 숨기며 서 있었다.

    라테는 가만히 린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린이 그에게 물었다.

    “……다……당신은 분명 제논의 지도자에게……?”

    “이 싸움은 의미가 없네, 린. 그러니 저들의 말을 들어 보게나.”

    “아니, 어째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안젤리나의 편지를 통해 듣고 랭커 회의 때 또 한 번 각인됐다.

    제논의 지도자 정혁이라는 남자의 궁극적인 힘.

    괴이한 메커니즘의 에고 장비를 가진 그의 능력에 대해서 말이다.

    불의 정령왕 라테는 그의 에고 장비 중 하나라고 했다.

    그런데 왜 그가 여기 홀로 있는가?

    이렇게 먼 거리까지 자신의 에고 장비를 홀로 보낼 수도 있는 걸까?

    아니, 그 정도의 능력이라면 더 어처구니가 없다.

    사고 회로에 과부하가 걸린 린이 흔들리는 동공으로 라테를 가만히 보고 있기만 하자 라테가 열기의 구슬 안에 린을 가둬 공중에 띄웠다.

    그러곤 그녀를 데리고 일행의 곁으로 돌아갔다.

    정신을 차린 린이 구슬 내부에서 발악을 했지만 라테는 그녀를 풀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린의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전력이 파직거리며 튀었지만 그렇다고 주변에 어떤 변화가 생기진 않았다.

    유르겐이 싱긋 웃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래 로만, 우리보다야 라테가 낫다니까?”

    유르겐의 익살스러운 말투에 로만은 말없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라테에게 감사의 표시로 인사를 했다.

    그러곤 양손에 풀어진 낡은 끈을 다시 조이며 숲 어딘가로 모습을 감췄다.

    유르겐 역시 어깨를 으쓱하곤 그의 뒤를 따랐다.

    “진정하고 데릭의 이야기를 듣게. 그래야만 하네.”

    “정령왕이라고 해서 봐주는 건 여기까지예요!”

    린이 고함을 내질렀지만 소리는 구슬 내부에서만 메아리칠 뿐이었다.

    “자네의 마나는 유르겐이 벌써 전부 강탈해 갔네. 이제 이들을 협박하지도 못해.”

    라테가 데릭과 박달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말에 린이 마나를 다시 한번 발현시켜 보았지만 이젠 그녀 스스로도 마나의 파동을 느낄 수 없었다.

    순식간에 바닥이 나 버렸다.

    심지어 회복되지도 않았다.

    린은 난생 처음 느껴 보는 기분에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깊게 쉬었다.

    박달수가 바닥에 꽂았던 검을 뽑아 등에 고정했다.

    데릭은 천천히 그녀를 가둬 놓은 타오르는 구슬 근처로 다가갔다.

    라테는 데릭을 보고는 알겠다는 듯이 구슬을 거둬들였다.

    린은 공중에서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안정적으로 착지했다가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날이 서 있었으나 확실히 한풀 꺾인 모양이었다.

    “이해합니다, 린. 당신의 직위도, 명예도 더럽혀진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세상에는 당신이 모르는 어떤 일들이 더 있을 뿐이에요.”

    데릭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나름대로 위로가 되라고 전한 말이었겠지만 린의 입장에서는 전혀 와닿지 않았다.

    이로써 증명됐다.

    개같은 랭킹 시스템은 그저 이름표일 뿐.

    강함의 척도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어쩌면 한, 그 빌어 처먹을 개새끼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한이 사라지고 랭킹 시스템은 다시 플레이어들 사이에 오르내렸다.

    그리고 용의 가호를 받아 압도적인 강함을 지녔던 10인이 당시 차례로 그 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그들을 진정한 랭커로 인정하는 자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모두 ‘한’의 아성 때문이었다.

    “……김창수…….”

    린이 몸을 돌려 한숨을 크게 쉬며 작게 중얼거렸다.

    랭커 회의에서 김창수가 떠나던 날.

    그가 조용히 린을 찾아와 했던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는 의미 없는 랭커 회의와 랭커의 타이틀을 버리고 자신만의 길을 찾아 떠났다.

    그는 린에게 그녀의 타이틀이 얼마나 헛된지에 대해서, 그리고 이 랭커 회의와 랭커들의 힘 또한 얼마나 얕고 보잘 것 없는지에 대해서 냉철하게 비판했다.

    린도…… 알고 있었다.

    롬의 결기에 의해 한을 잡아 보고자 일어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하나의 목적 아래 뭉쳤었다.

    김창수 역시 한 곁에서 성장했기에 이젠 그와 진심을 다해 겨뤄 보고 싶었다.

    오직 절대 악에 가까운 한을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기 위해서 모두 하나의 마음이 되었다.

    그것이 용의 가호를 받은 그들이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한은 사라졌고 이를 통해 걷잡을 수 없이 커진 롬의 분노는 오히려 또 다른 한을 낳을 것만 같았다.

    린은 새로운 랭킹 시스템을 통해 롬의 발악을 막고 자신이 랭킹 1위에 걸맞은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동시에 입증하며 세계의 질서를 잡았다.

    그러나 그뿐.

    김창수의 말대로 지금의 랭킹은 그저 허울 좋은 타이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진즉에 내려놓고 싶었다.

    이 무의미한 대장 놀이를.

    그러나 그녀가 없이는 현재 랭커들이 롬의 전쟁놀이의 도구가 될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린은 자신이 그 억제기가 되기로,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다.

    또 다른 한이 생겨서는 안 되기에.

    “그래요. 이제 진정됐으니 어디 들어나 봅시다. 그러나 저는 여전히 당신 같은 작자들을 증오해요.”

    린이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고는 한 손 검을 다시 검집에 밀어 넣으며 팔짱을 끼고 데릭 앞에 섰다.

    “말씀드리게 전에 조심스럽습니다만…… 한 가지만 묻고 싶습니다.”

    “뭐죠?”

    “롬은…… 믿을 만한 사람입니까?”

    “……그날 봤잖아요. 그 광기.”

    “……그렇다면 제가 드리는 말씀은 그 누구에게도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손으로 롬, 그자를 치워야 할지도 모릅니다.”

    “……조심……하라고 말씀드렸어요.”

    린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지만 데릭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제가 당신의 힘을 빌려…….”

    데릭이 눈을 한번 질끈 감고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잭슨을 처리한 것처럼 말입니다.”

    린이 어느새 시체조차 사라진 잭슨이 죽은 곳을 힐끔 보곤 고개를 갸웃했다.

    ‘나를 통해서 그를 죽였다? 왜? 그것이 롬과는 또 무슨 상관인가?’

    “지금부터 제가 하는 이야기들은 제논의 수뇌부와 정혁의 에고 장비들, 그리고 방금 당신이 상대한 두 남자가 속한 자들만 아는 극비 중에 극비입니다.”

    박달수가 품에서 뭔가를 꺼내 바닥에 박아 넣었다.

    작은 마법봉 같은 그것은 순식간에 공간의 벽을 만들어 외부와의 차단막을 겹겹이 만들어 냈다.

    데릭은 숨을 고른 뒤 린에게 세계에 감춰진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롬은 길고 긴 왕궁의 금빛 휘장이 걸린 복도를 걸어 나가고 있었다.

    그의 발걸음은 그가 착용하고 있는 휘황찬란한 판금 갑옷의 무게에 비해서 한없이 가벼워 보였다.

    입가에 만연한 미소는 그의 기분을 대변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반면 그의 주변엔 거무튀튀한 마나가 맴돌았다.

    죽음의 한기, 그것이 그를 숨결에서 묻어나는 것 같았다.

    이 복도의 끝 밝게 빛나는 저곳 아래에는 출전을 마친 에도라의 모든 병력들이 파도와 같이 집결해 있었다.

    이제까지 잔잔히 때리던 욘마곤의 경계 지역을 전방위로 압박하고 나설 것이다.

    이미 미치광이 제이크, 그놈과도 이야기가 된 터였다.

    물론 그 사이코 새끼가 다음 타자라는 것은 숨겼지만 말이다.

    하긴, 뭐 그 자식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이제이라 했던가.

    방법은 상관없지 않은가?

    지금 이 전쟁의 물결 속에서 그간 억눌렸던 모든 광기를 전부 쏟아부으면 될 터.

    시작은 바로 지금. 이곳에서.

    롬의 등장과 함께 왕을 기다리던 에도라의 모든 병력의 우레와 같은 함성이 그에게로 쏟아졌다.

    엄청난 병력이었다.

    그들은 모두 왕의 연설을 기다리고 있었다.

    롬은 우렁차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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