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73화 (173/200)
  • ◈173화

    정혁은 리안과의 대화를 마치고 상황실 밖으로 나왔다.

    조금 찬 바람이 목조로 짜인 복도를 타고 정혁을 스쳐 지나갔다.

    바깥에는 뚱땅거리는 건축가들의 보수 소음들이 간간이 들리고 병력들이 이동하면서 나는 고철음과 옅은 모래 먼지 냄새가 같이 느껴졌다.

    정혁은 눈을 깊이 감았다가 다시 떴다.그러곤 자신의 양 허리에 찬 단검 젠트라를 내려다보았다.

    정혁은 피식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가 양손을 돌려 쥐자 금세 그의 두 제련 망치가 생성되었다.

    뜨겁게 가열된 망치와 푸른 전기가 흐르는 또 하나의 망치.

    정혁은 문득 복도에 진열된 잘 닦인 방패 앞으로 자기가 비춰진다는 것을 깨닫곤 그 앞에 서 보았다. 그는 두 망치를 흔들며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그래…….”

    정혁은 웃으면서 두 망치를 다시 없애 버리곤 허리춤의 젠트라를 툭툭 건드린 뒤 빠른 걸음으로 복도 끝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해야 할일은 많다.

    당장에 나의 역할과 능력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는 없다.

    검은 말 조직은 일단 전면전에 안도리니의 병력을 이용하고 있다.

    그러니 한이 벌써부터 움직일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그들에게 한의 정체는 최후의 보루일 수도 있다.

    그가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플레이어들에겐 충분히 큰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압도적인 공포의 존재가 적으로 당당히 모습을 드러낸다면 정신적인 충격에 휩싸여 아무것도 못 하겠지.

    안도리니는 김창수가 버티고 있다.

    그곳에서 그를 비롯한 팀장들이 활동하고 있으니 정혁은 일단 에도라로 향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안젤리나와 아린의 군대를 대동해서 에도라의 랭커들을 만나고 그들의 잘못된 동맹을 깨부숴야겠다.’

    어느 한 곳이라도 활로를 뚫어 놔야 한다.

    그래야만 정혁의 입장에서도, 제논의 힘장에서도 숨통이 트일 것이다.

    ‘그나마 말 상대가 되는 쪽에 기대를 걸어 보자고.’

    [에드가?]

    [……빌어먹을, 타이밍도 좋게 연락하는구만.]

    [다 회복됐지?]

    [그래, 무안하니 이전 전투의 이야기는 따로 하지 않기로 하지.]

    에드가의 전음에 정혁은 빙긋 웃으면서 복도 끝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그와 동시에 에드가가 창문 밖에서 등장하며 황금빛 드래곤이 창공으로 치솟았다.

    [안젤리나, 들리나요?]

    [예, 말씀하세요.]

    [먼저 출발한 아린의 병력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에도라로 향할 겁니다. 문제없으시겠죠?]

    [그들도 원하는 바일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구요.]

    [다른 랭커들을 마주할 텐데 괜찮겠어요?]

    [문제……없습니다.]

    안젤리나의 결심이 담긴 목소리에 정혁은 수긍하며 욘마곤의 진지 위로 더욱 거칠게 비상했다.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마지막 전투가 시작될 것이다.

    인류의 모든 것을 건 최후의 전투 말이다.

    * * *

    “잠깐……! 제 말 좀!”

    “……이럴 줄 알았지.”

    벽에 처박힌 잭슨이 가슴에 거대한 검이 박힌 채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데릭은 양손을 번쩍 들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린에게 자신은 결코 싸울 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든 드러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린의 표정에는 살기가 가득했고 심기가 상당히 불편해 보였다.

    “누구를 불러?”

    린이 이빨을 까득거리며 허벅지에서 날카로운 한 손 검을 꺼냈다. 데릭은 침을 꿀꺽 삼켰다.

    “당신, 당신을 만나야만 했습니다!”

    잭슨의 암영검이 린의 관자놀이를 향해 어둠속에서 나타나 빠르게 쇄도했다.

    하지만 헛수고였다.

    린은 한 손 검으로 그의 공격을 튕겨 내고 왼손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잭슨의 가슴에 박힌 검이 순식간에 벽 깊숙이 더 들어가 버렸다.

    잭슨은 비명 한 번 내지 못하고 꺼억거리며 몸을 부르르 떨다가 고개를 떨궜다.

    죽었다.

    잭슨이 죽어 버렸다.

    그러나 데릭에겐 그의 죽음에 대한 충격도, 그 어떤 미안한 마음도 없어 보였다.

    그럴 수밖에.

    자신보다도 더 자유 연맹이 무너져 버린 것에 대한 분노의 칼날을 갈아 오던 자였다.

    데릭 역시 같은 마음이었지만 그렇다고 전해 들은 이 모든 사실들 앞에 언제까지 사사로운 자기의 감정의 날을 내세울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잭슨은 다르다.

    정치에 대해서, 또 관계에 대해서 항상 중립적으로 많은 것을 판단하며 무리를 이끌던 잭슨이기에 감정의 소용돌이를 잠재우고 진실을 향해 대의를 위한 선택을 할 수 있었지만 잭슨은 평생을 전장에서 보냈다.

    스스로를 살인마라로 부르는 것조차 영광스러워했던 자다.

    이런 남자에의 인생에서 남은 유일한 목적은 제논을 향한 피의 복수 그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잭슨에게 발작 없이 위와 같은 내용을 전달하긴 어려워 보였다.

    잭슨은 이미 박달수를 그렇게 보낸 것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불만을 갖고 있었다.

    처음에는 데릭의 목적 자체를 납득하는 듯 보였지만 이후로 데릭이 추가적인 보고를 해 주지 않자 노골적으로 그날의 일에 대한 비난을 종용했다.

    데릭은 한참을 고민했다.

    만약 제논을 통해 얻은 정보를 진솔하게 잭슨에게 이야기했다간 자칫 안나가 이야기했듯 모두의 파멸로 이끌 수도 있었다.

    그는 단호하게 잭슨을 떠나 독단 행동을 펼칠 것이다.

    여전히 자기의 명성을 알고 있는 자들을 응집해 제논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사실을 퍼트려 군중을 몰락의 길로 걷고 있는지 마음대로 떠들고 다닐 수도 있다.

    이런 사실들이 안나가 이야기한 대로 오아시스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면 시스템은 위험성을 판단하여 우리가 손쓸 겨를 도 없이 강제 다운을 시켜 버릴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잭슨은, 자유 연맹의 남은 동료들은 전부. 또 다시…….

    그럴 순 없었다.

    데릭은 결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때보다 날카로운 그를 단박에 정리할 수 있는 힘에 기대어 그를, 미안하지만 그를 먼저 로그아웃시키는 수밖에 없다고 결론지었다.

    잭슨이 원했던 대로 데릭은 잭슨에게 어부지리를 통해 이익을 취해 보자는 전략을 전달했다.

    린을 꼬드겨 한 장소에 나오게 한 다음 그곳에 전에 만났던 박달수를 불러 둘이서 서로 싸우게 만드는 것이다.

    그제야 자기가 원했던 지시를 했다는 듯 잭슨은 박수를 치며 곧바로 작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데릭은 알고 있었다.

    린이 그들을 탐탁지 않게 보고 있으며 생각보다 린은 자존심이 강한 여성이라는 것을.

    분명 그들의 이런 무례한 단독 행동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그녀의 검에는 자비가 담겨 있지 않을 터였다.

    린은 자초지종을 듣기도 전에 밀회 장소에 등장하자마자 곧바로 잭슨을 향해 달려들었다.

    잭슨과 몇 합을 나누며 비슷하게 싸움을 이어 가는 듯했지만 린이 자기 힘을 조금 더 발현하자 잭슨이 급격히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의 암영검도 힘을 제대로 못 썼다.

    사방에 모든 감각을 열어 놓은 듯 린은 치밀하게 날아드는 암영검의 검날을 죄다 튕겨 내며 집요하게 잭슨을 추적했다.

    둘의 싸움은 앞서 보았다시피 그렇게 끝을 맺었다. 린의 입가에 조소가 담겼다.

    “난 주둥이로 전투에 대해 떠들어 대고 지시하는 능력 없는 것들이 정말 싫어. 특히나 너희들처럼 마치 사람을 체스 판에 말처럼 굴리는 자들 말이야.”

    린이 한 손 검을 휙휙 돌리며 말했다. 데릭은 입술을 깨물며 제발 빨리 그자가 나타나 주길 바랬다.

    “랭킹 1위 양반, 잠시만.”

    그때 엄청난 열기와 함께 붉게 타오르는 화살이 둘 사이에 박혔다.

    데릭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고 린 역시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정확히 노려보며 뒤로 물러섰다.

    화살이 박힌 자리에 불기둥이 한 번 더 솟구쳤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박달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논?”

    린이 눈썹을 움찔하며 데릭을 바라보았다.

    박달수의 안대가 빛을 받아 한 번 번쩍였다.

    그는 화살집과 활을 내려놓고 염구가 각인된 자신의 검을 등 뒤에서 꺼내며 몇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왔다.

    “당신이 말로만 듣던 린이군.”

    “하……!”

    린이 불쾌하다는 듯이 헛웃음을 한 번 쳤다.

    “어중이떠중이들이 달려든다고 해 봤자 변하는 건 없어.”

    린이 바닥을 박차고 순식간에 박달수의 얼굴 앞으로 당도했다.

    그러나 그녀는 오른손에 든 한 손 검을 급히 꺾어 들어 검 등으로 측면에서 날아오는 강렬한 화기를 틀어막을 수밖에 없었다.

    강한 충격과 함께 튕겨 나간 린은 또 한 번 그 상태에서 몸을 틀어 공중을 차고 잭슨의 몸에 박힌 자신의 독특한 양날 글레이브를 꺼내 쥐었다.

    “……뭐……지?”

    린이 이빨을 까득이며 글레이브와 한 손 검에 자신의 용의 마나를 흘려보냈다.

    엄청난 중압감이 은밀한 어둠 속 숲에 퍼져 나갔다.

    박달수는 급히 데릭의 뒷목을 잡아 끌어 자신의 곁에 붙인 다음 검을 바닥에 내리꽂아 린으로부터 퍼져 나오는 괴이한 마나 공격에 대비했다.

    그녀는 한 번의 충격으로 상대의 수준이 상당하는 것을 파악했다.

    내지르는 정권 같은 공격기였는데 열기가 상당했다.

    몸을 틀지 않았다면 화기가 전신을 덮쳤을 것이다.

    언뜻 제논의 남자가 공격한 불화살과 비슷한 느낌이기도 했는데 이 열기는…… 분명 불의 정령왕급은 됐다.

    그렇다는 건, 그가…… 이곳에 온 것일까?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차라리 이편이 더 낫다.

    자신과 그가 이곳에서 결판을 지으면 불필요한 희생을 최대한 줄일 수도 있다.

    롬, 그 녀석의 광기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싸움의 명분을 없앨 수도 있지 않겠는가?

    린은 만반의 준비를 하며 또 다른 곳에서 등장하는 두 사람을 날카롭게 지켜보았다.

    어둠 속에서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파동이 일더니 양손에 불타는 장갑 같은 것을 착용한 남루한 차림의 남자와 그의 곁에서 귀찮다는 표정으로 뒤통수에 양손을 포갠 채 기지개를 켜고 있는 또 다른 남자가 걸어 나왔다.

    “네가 왜 랭킹 1위인지 알겠다.”

    유르겐은 포갰던 손을 풀고 한 손은 뒷짐을 지고 다른 손으로 허공을 휘저었다.

    그러자 허공에서 파직거리는 정전기가 피어올랐다.

    유르겐이 빙그레 웃는 얼굴로 린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갑자기 눈에 강하게 힘을 주었다.

    그와 동시에 주변에서 수없이 만은 정전기가 사방으로 파지직 거리며 터져 올랐다.

    어두웠던 숲이 한꺼번에 밝아질 만큼 강한 빛이었다. 피아식별 없이 펼쳐지는 이 광란의 공격에 동요할 법했지만 로만도, 유르겐도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당황한 것은 린이었다.

    “어…… 어떻게?”

    “뭘 어떻게야, 뺏어 쓴 거지.”

    유르겐이 싱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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