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72화 (172/200)
  • ◈172화

    “지금 내릴 순 없겠죠. 당신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저도 압니다.”

    리안의 눈썹이 움찔했다.

    “뭐, 불안해하는 것도 알아요. 저도 참 많은 고민이 되거든요. 에드가의 등에 타고 엔듀라곤으로 날아가면서 그곳에서는 이 마음의 답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안나……가 이야기해 준 그 E라는 검은 말 조직의 이단아. 그 녀석이 안나에게 물었다더군요. 살아 있다는 것은 어떤 느낌이냐고.”

    “…….”

    안나에게 일전에 들었었다.

    리안은 그저 오아시스의 통제력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고 기뻐하기만 했었다.

    그래, 그랬었다.

    리안은 그 긴 시간 동안 오직 인류의 해방만을 바랐다.

    그 외에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사치였다.

    고통은 계속되었고 갇혀 있는 시간이 괴로웠다.

    게임이라는 것은 재미와 즐거움을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

    현실에서 경험하는 살아가는 것에 수반되어진 수도 없이 많은 고통과 고뇌 속에서 잠시 도망쳐 이곳에서 행복해하고 웃고 즐기다가 다시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진짜 자신의 인생을 또 살아가야만 한다.

    그것이 오아시스의 목적이어야 했다.

    인류를 그저 교체 가능한 배터리로 삼으며 기계의 수명에 일조하는 도구의 삶이 아니라, 그런 진짜 삶. 그리고 언제든지 로그아웃이 가능한 재밌는 게임. 그것이어야 했다.

    비뚤어진 이 세계를 리안은 너무 오랫동안 진실을 가슴에 품은 채로 살아야만 했다.

    다행히 새로운 에이드윈들이 하나둘 생겨났지만 그들과 직접적인 교류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들은 각자가 고립되어 진실을 품에 안은 채 고통스러운 이곳의 삶을 이겨 내야만 했다.

    그랬기에.

    다른 존재들의 삶에 대해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럴 뿐 아니라 오아시스의 숨결을 받은 이 프로그램들의 삶을 공감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이곳의 간수이자 이곳의 창살이었다. 적어도 리안에게는 그랬다.

    그래서 E의 질문은 리안에게는 그 이상의 생각까지 끌어내지 못했다.

    그래,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자신의 표정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안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해가 됬다. 그 날 안나가 불편함을 표시했던 그 얼굴.

    ‘안나는 우리의 대의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바라보고 있었구나. 정혁, 이 남자가 생각하는 그 이후에 세계에 대한 의문을 안나, 너 역시 가지고 있었구나.’

    “그러나 결국 엔듀라곤에서 만난 건 이 빌어먹을 몸뚱이의 진짜 주인이었고 저는 도리어 또 한 번 나 자신이 그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아류 복제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어때요? 리안. 이렇게 말하는 저를 당신은 어디까지 믿을 수 있습니까?”

    리안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힘으로…… 누르면 된다, 뭐 이런 생각이라도 하고 있나요?”

    정혁이 빙긋 웃으며 재차 묻자 리안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그저”

    리안이 깊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작은…… 반성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네?”

    “미안……합니다. 그날,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날. 나는 당신이 느끼는 고통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당황스럽기도 했고 불안하기도 했습니다. 당신이…… 오아시스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리안의 입에서 오아시스라는 단어가 나오자 정혁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불쾌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저를 조금이나마 이해해 주기 바랍니다. 저는, 저는 너무 오래 이곳에 있었기에. 그리고 이 날들을 너무나 오랫동안 고대해 왔기에.”

    리안이 테이블을 한 번 쓸자 그의 주황빛 마나가 손길을 따라 반짝였다가 흩어졌다.

    “그랬기 때문에 어쩌면 제 사고는 편협하게 머물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 아주 조금, 당신에게 실례되지 않을 만큼만이라도 당신의 고뇌를 이해하고 있다고 믿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리안이 고개를 들어 정혁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 젊고 강인한 마법사는 두 눈 가득 진심을 담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힘만으로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모양입니다. 하기야, 그렇지요. 애초에 우리의 진짜 육체가 인질로 잡혀 있는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낼 수 있겠습니까. 결국 당신들의 힘을 빌려 우리의 삶을 쟁취하는 수밖에. 그러나 저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이유요?”

    “네.”

    리안의 입술이 작게 떨렸다.

    그의 굳은 얼굴에서 확고함이 비춰졌다.

    “그 긴 시간, 다섯 번의 리사이클을 넘어 당신에게 우리의 보루였던 그의, A의 모든 가능성이 전달되었습니다. 그가 ‘한’을 선택한 것도, 그리고 그가 당신을 선택한 것도 분명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신을 선택한 결과가 지금입니다. 우리는 진실을 삼키고 목적을 드러내지 않으며 이곳까지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의 결의와 용기로 타이런에 서 있습니다. 당신이 아니라면, 우리 에이드윈의 힘으로는 결코 해낼 수 없었던 일입니다.”

    리안의 눈이 질끈 감겼다.

    시도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에이드윈들이 생겨나고 리안과 유르겐, 그리고 로만은 서로 최선을 다해 리사이클을 막아섰다.

    인류의 고통을 끊어 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세상은 힘만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고 그들에게 주어진 이 괴이한 힘은 되려 시스템의 경계에 너무 잘 발각됐다.

    강제 소멸당할 뻔하기도 하고 긴 시간을 치유해야만 하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

    누구보다 활발했던 로만은 입을 다문 채 칩거했고 진지하고 성실했던 유르겐은 반쯤 자아를 놓아 버렸다.

    리안은 그들을 떠났다.

    아니, 그들이 리안을 떠났다.

    네 번째 리사이클 이후 다섯 번째 리사이클이 목전에 올 때까지 그들은 모이지 않았다.

    리안이 안나를 발견한 것도 그때 어간이었다.

    조용히 리사이클을 막아 봤지만 여전히 결과는 같았다.

    안나는 그렇게 그들에게서 버려졌다.

    아니, 그들 역시 세상에서 도망쳤다.

    리안은 자위했다.

    끝이, 언젠간 끝이 올 거라고.

    그들이 이렇게나 강한 힘을 가지고도 세계에 대항하지 않은 건 압도적인 무력감.

    그것 때문이었다.

    어쩌면 안나는 그것을 몰랐기에 정혁,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토록 적극적이었을 것이다.

    그가, 그의 특별함이 이 세계를 바꿔 줄 수 있을 거라고 믿었기에.

    어쩌면 그녀가 아닌 로만, 유르겐, 그리고 자신을 만났다면 정혁은 그저 자신이 언젠가 다시 랭킹 1위가 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진 어떤 멍청한 NPC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이유.

    그래, 그것이 그를 이렇게 만들어 냈다.

    A가 이끌었다. 그가 만들고 계획했다.

    그러니 그가 엔듀라곤으로 가라고 한 이유는, 이제 그 이유는 새로운 A이자 모두의 적 ‘한’에게 있을 것이다.

    “당신 역시 그 이유 때문이 이곳에서 이 위치에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곳에서 당신을 만난 그, ‘한’은 이제 왜 당신을 만났는지에 대한 이유를 찾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어쩌면 그가 생각하는 목적은 당신이 아니라 ‘한’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한’이 당신을 만나는 것 말입니다.”

    “나를…… 만나는 것.”

    정혁이 가만히 탁자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녀석은 여전히 몇 년 전, 그가 어떤 이유에서 신에게 도전했던 그때, 그 이후의 시간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그의 신체는 그들에 의해서 이용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자아는 깊은 저 너머에서 잠들어 있었다.

    어째서 그가 이렇게 정확한 타이밍에 엔듀라곤에 있었는지는 이해하기 힘드나 A가 아니라 ‘한’으로서 정혁을 마주했고 그는…….

    “의심. 그것이 생겼죠.”

    리안의 말에 정혁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녀석은 자신과 싸우며 계속해서 뭔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불편한 심기를 토로했다.

    정혁이 아는 한은 귀찮은 것들은 치워 버리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늘 우선인 자였다.

    굳이 정혁을 노리개로 삼아 가지고 놀다가 기회를 놓칠 필요까진 없었다.

    찝찝했던 것이다.

    그가 스스로 느끼기에도.

    자신과 똑같은 패턴의 움직임과 이상한 질문들과 자신의 복장과 뜬금없이 펼쳐진 화산 속의 자신과.

    이 모든 납득할 수 없는 상황들이 그가 제일 싫어하는.

    “게임이 게임답지 않다는 느낌.”

    “맞아요.”

    정혁의 말에 리안이 동의했다.

    녀석은 자율성을 극히 중요시했다.

    그의 실제 삶이 비루했다는 것을 정혁은 너무도 잘 안다.

    자유롭지 못했고 억압받아 왔다.

    물론 이것도 한에게 주입된 시스템의 꾸며 낸 기억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 해도 그것은 한의 기억.

    공정하지 못한 삶의 억압을 해소하기 위해 한은 오아시스에서 사력을 다했다.

    빌어먹을 국가니 권력이니 전부 무너트렸다.

    그리고 그 스스로 가장 강하고 가장 악랄하며 가장 지독한 자가 되어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최대의 적으로 두고 게임을 즐기기를 바랐다.

    그것이 자신도 최고로 재밌었다.

    게임은 이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게임이 진짜 게임답다고.

    시스템이 관여하고 확률에 의해 돌아가며 외부의 자본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과 자신의 힘으로 정점에 설 수 있는 그런 환경.

    오아시스의 자율성은 그의 이상을 충족시켜 주었다.

    그런 그의 신념을 비트는 정혁과의 만남.

    납득할 수 없는 그 순간.

    “균열.”

    정혁이 주먹으로 탁자를 한번 탁 치곤 고개를 들어 리안을 바라보았다.

    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은 놀라운 존재입니다. 아무리 강하다 해도 어느 한 부분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붕괴되기도 하죠. 오아시스는 이 마지막 싸움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우리를 지지했던 A 역시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A는 그가 무리해서 플레이어의 힘을 마지막 붕괴에 사용할 것이라고 추측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추측은 이 세계의 최고 망나니 ‘한’을 통해 실현되었어요. 웃기지 않나요?”

    리안이 실소하며 말했다. 정혁이 어깨를 으쓱하자 리안이 대답했다.

    “우리는 프로그램에게, 정작 프로그램은 인간에게 이 마지막 싸움을 기대고 있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정혁은 리안의 웃음이 슬픔 언저리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결국 녀석의 선택은 인간의 가장 치명적인 단점. 의심으로부터 시작된 균열로 인해 오히려 역으로 당하고 말겁니다. A는 그것을 알고 당신을 엔듀라곤으로 부른 거예요. A를 위해, 그리고 한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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