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71화 (171/200)
  • ◈171화

    첩첩산중이라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정말 이 세계에 마지막 장이 가까워졌다고 느껴졌다.

    모든 것이 불규칙적으로 무너져 가고 있다.

    천계의 개입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개입이 이렇게나 빠를 줄은 예상 못했다.

    정혁 나름의 계획이 있었다.

    정혁이 개인적인 능력으로 대장간을 열 수 있었던 것처럼 에트론의 힘을 빌려 천계의 무기고, 그 차원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천계의 상황을 보다 명확히 보고 이들을 어떻게 하면 깨워 싸움에 참전시킬 수 있을지 고민해 보려고 했다.

    에트론의 이야기대로 그들은 꽉 막힌 자들이기에 더욱 조심히 다뤄야 할 칼이었다.

    근데 뭐?

    하필 그중에 제일 딱딱하고 거친 칼이 제일 먼저 깨어나 이 땅에 강림했다고?

    정혁은 고개를 저으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정혁과 같이 들어온 아린은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왕의 검을 내려놓고 에트론에게 향했다.

    “생기발랄하시던 에트론 님의 이런 모습은 처음 보는군요. 천계의 대천사장…… 은행나무 엘프의 고대 역사서에서도 천계가 차지하는 비중은 마계에 비해 손톱만큼도 되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 함구했던 천계가…… 세계의 흐름은 정말 예측하기 어렵군요.”

    정혁은 아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린은 모른다.

    진실을 밝혔던 회담 이후 리안이 이 세계의 프로그램화된 캐릭터들에게는 망각의 저주를 걸었다.

    대표적으로는 이프가 그랬다.

    리안의 입장도 이해가 됐다.

    리안이 허락할 수 있는 프로그램의 개입은 정혁과 그가 제작한 에고 장비들뿐이었다.

    그 외에는 어디로 튈지 모를 뿐더러 되레 오아시스에게 잠식되어 뒤통수를 노릴 수도 있었다.

    뭔가, 씁쓸했다.

    배가 가라앉고 있다.

    정혁과 일행은 이 배에서 탈출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지만 누군가는 배가 가라앉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

    이 세계가 붕괴되면 아린은 어떻게 되는 걸까. 엘라, 라테, 에트론은?

    회복 중인 에드가와…… 그리고 드웨이크는?

    모르겠다.

    무엇이 이곳 이후의 실제 세계가 있는 저들의 정의가 지켜지는 것이 옳다 하여 이곳에서 이렇게 살아가는, 숨 쉬는 자들의 정의를 짓밟을 수 있는 것일까?

    대의를 위해 만들어진 내가 지켜야 하는 것은 과연 그쪽 세계만의 것일까?

    아니면…… 이 오아시스의 것도 함께일까.

    정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연거푸 쏟아지는 여러 사건들에 아린까지 모습을 보이자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그러다 문득 리안과 눈을 마주쳤다.

    리안의 눈동자가 정혁의 혼란스러움을 읽어 낸 것 같았다.

    “천계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겠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일단.”

    리안이 양 손바닥을 보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보시다시피 부상자도 많을 뿐더러.”

    그의 뒤에서 상황판이 빛을 받으며 현재 상황을 공중에 분산시켜 보였다.

    노래하는 화산을 중심으로 욘마곤의 경계 사방에서 전투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지금 우리는 보다 눈앞에 있는 적에 집중해야 합니다. 정혁?”

    “……알고 있습니다. 국왕?”

    정혁이 마지못해 대답하곤 주변을 슥 둘러본 뒤 아린을 불렀다.

    “말씀하세요.”

    상황실 안으로는 그의 근위병들이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정혁은 보다 편안하게 아린과 대화를 나눴다.

    “카탈에서 이곳까지 단순히 불구경하러 온 건 아니잖아? 최대한 싸워 줘. 에도라, 그쪽의 국경을 맡아서 이프와 함께 나이트 엘프나 하이 엘프들과 연결점을 좀 찾아 줬으면 해. 서로 간에 사이가 썩 좋진 않겠지만…… 그래도 인간보단 낫지 않을까?”

    “아무래도요?”

    정혁의 말에 아린이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이프 역시 곁에서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빠르게 출발해 줘, 점점 전쟁은 확산될 거야.”

    아린이 검을 챙겨 몸을 돌렸다가 다시 정혁을 돌아보며 물었다.

    “정혁 님은 어디를 먼저 공략하실 셈인가요?”

    “동일해, 에도라.”

    “알겠습니다. 먼저 출발하도록 하죠.”

    “부탁해.”

    든든했다.

    국왕으로 잘 성장한 아린의 힘은 상상 이상이다.

    그가 부리는 선조들의 영혼은 물리적인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

    무기에 마법을 입히거나 마법 공격을 통해서만 그들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

    게다가 이프가 전달한 나이트엘프의 보물에 의해 그 힘은 더욱 강해졌고 이젠 은행나무 엘프의 영토 외에서도 동일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전력은 항상 제논에게 큰 힘이 되고 있다.

    아린과 이프가 나가고 정혁은 상황실에 남은 사람들을 전부 바깥으로 보냈다.

    리안과 정혁 단둘이서 해야만 할 이야기들이 많았다.

    대책과 다음 준비, 그리고 엔듀라곤에서의 일까지.

    “소득이 있었나요? 그곳에 정말 또 다른 젠트라의 흔적이 있었을까요?”

    리안이 묻자 정혁은 한숨을 푹 쉬며 피식 웃었다.

    “젠트라? 웃기지도 않아. 더 더러운 걸 보고 왔답니다.”

    “좋은 소식은 아니라는 거네요?”

    “네에, 더 엿 같은 소식이지요.”

    정혁의 말에 리안은 이마를 짚으며 눈을 감았다.

    “……한을 만났습니다.”

    리안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이르다.

    너무 이르다.

    아니, 게다가 어떻게 거기에, 이 시기에?

    리안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그 ‘한’을 만나고 정혁은 살아 돌아왔다.

    어째서?

    리안은 알고 있다.

    정혁이 마지막 에고 장비를 획득하고 그 본질에 맞게 에이드윈들에게 장비들을 나눠 주고 난 뒤 칭호들이 사라졌다는 것을 말이다.

    물론 ‘오아시스의 대장장이’와 ‘시간의 주관자’라는 칭호를 통해 여전히 비약적인 힘을 낼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정혁의 전투 능력이 예전만큼 폭발적이고 강하진 못하다.

    게다가 그는 이제 세계의 적이 되어 많은 행동에 제약이 따른다.

    그런 상황에서 화마가 가득한 엔듀라곤 화산 속에 들어가 ‘한’을 만나고 살아 돌아오다니?

    “죽다 살았죠, 뭐.”

    태연했지만 리안은 저 말에 담긴 의미를 짐작해 볼 수 있었다.

    그는 착잡했을 것이다.

    자신이라고 믿었던 그 자가 이제 진짜 자기 앞에 등장했을 때, 같은 무기로 날을 맞대고 싸워 보며 그 격의 차이를 완전히 느꼈을 것이다.

    능력의 차이 뿐이랴?

    ‘한’의 인성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의 잔혹함에 치를 떨었던 모두였다.

    정혁은 기억된 ‘한’이 아니라 실제 ‘한’을 만나고서 엄청난 충격을 경험하고 왔을 터.

    “……괜찮은 겁니까?”

    “괜찮을 리가요.”

    정혁은 주먹으로 탁자를 두 번 탁탁- 두드리고는 의자에 앉아 양손을 모았다.

    “상상 이상이더군요. 기억이라는 것이 야속했습니다. 그냥 이 정도이겠거니 싶었는데 시간에 빛바랜 기억은 대상의 실제를 격하시켰어요. ‘한’은 여전합니다. 이제까지 저는 모든 기준을 한에 뒀어요. 그가 랭킹 1위였고 그가 저였으니까. 제 본질을 깨닫기 전까지 저는 그로 살면서 모든 이들의 힘을 비교해 봤습니다. 솔직히 리안 당신도.”

    정혁이 리안을 보며 옅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당신도 비교해 봤습니다. 비록 한이 최근거리 암살 캐릭터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 상대로 마법사는 그리 어려운 적은 아닐 겁니다만 당신의 어마어마한 마력 앞에는 한도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니, 아니에요. 이 오아시스에서 어느 누구도 한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단 한 명도 말이에요.”

    리안은 침을 꿀꺽 삼켰다.

    과거, 한을 잡겠다고 떠난 한’s 레이드의 인원들이 긴 행렬을 이어 가며 타이런의 평원으로 향할 때 리안은 그의 끔찍한 살육이 여기서 종지부를 찍을 거라고 생각했다.

    10만 명 대 단 한명이었다.

    그들의 결집은 대단했고 뜨네기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시 랭킹 2위를 비롯한 여러 랭커들과 사냥의 달인들, 그리고 같은 계열의 암살자들과 높은 등급의 마법사들도 함께였다.

    전사들의 우렁찬 고함과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로 일은 순식간에 끝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히려 10만이라는 대군은 한의 유린으로 끝이 났다.

    한은 지치지 않았다.

    그는 끊임없이 어둠속에서 튀어나와 한 번에 수십 수백을 잔혹하게 살해했다.

    사지가 잘리고 급소가 단박에 관통된다.

    중독에 걸려 살이 녹아내리거나 그림자가 자신의 목을 그어 버린다.

    산발적인 공격에 어떤 무기도, 방어구도 버틸 수 없다.

    게다가 한의 공격만큼이나 그들은 서로에게 치명적인 공격을 실수로 가했다.

    한은 혼자였고 그들은 다수였기에 벌어지는 안타까운 일들이었다.

    어둠 속에서 리안은 그 장면을 바라보며 치를 떨었다.

    그렇게나 뼛속 깊숙이 그의 힘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정혁의 말대로 시간은 점점 기억을 도려낸다.

    ‘그랬었지’가 되어 버린 과거의 망령이 이제 다시 현실로 되돌아와 ‘그건 네 착각이다’라고 외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리안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당신이 해야만 해.”

    “…….”

    정혁이 가만히 리안을 바라보았다.

    리안은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정혁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혁은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다가 리안을 향해 물었다.

    “이 오아시스가 완전히 파괴되면 당신들은 해방되겠죠?”

    “……그렇겠죠. 그래야만 하구요.”

    “그럼 이곳에 남은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그건.”

    치명적이다.

    리안은 부디 정혁이 이 질문만큼은 하지 않길 바랐다.

    리안이 계속해서 찝찝해했던 이유도 이것이었다.

    프로그램에게 빼앗긴 자유를 프로그램이 되찾아 준다는 모순의 시발점은 이곳에 있다.

    모든 존재들은 자기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살아간다.

    자유도가 극한에 이르는 이 오아시스에서 이곳의 프로그램들은 플레이어들을 이계에서 찾아온 강대한 존재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과 공존하며 살아간다.

    그들에게는 이곳이 현실이고 세계다.

    정혁과 연결되었던 에고 장비들은 정혁과 동조되어 세계의 문제점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다.

    또한 최초의 바이러스 ‘A’ 그자에게 설득되었던 세계의 고등 존재들 역시 이 부분을 인지하고 있다.

    이는 몇 번의 리사이클을 통해서 유지되고 있는 에이드윈들에겐 소중한 또 하나의 힘이었다.

    그러나 정혁은 아무리 A가 마지막 모든 힘을 담아 만들어 낸 최종적인 변수라고 해도 이제까지의 리사이클을 기억한 경험이 없고 더군다나 지금의 A가 되어 버린 ‘한’의 기억을 계승한 자다.

    또한 무리를 이끌며 이들에 대한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자칫 잘못 번졌다간 도리어 그가…….

    오아시스의 편으로 돌아설 수도 있다.

    리안이 가장 걱정하는 지금 체제의 거대한 역린이다.

    이 부분에 정혁이 접근하기 시작한다면…… 그렇다면 결코 이 마지막 기회를 지켜 낼 수 없을 것이다.

    “답은…….”

    정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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