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70화 (170/200)
  • ◈170화

    앤의 돌체는 순식간에 대천사장 돌체의 손안으로 빨려들어갔다.

    그의 형체가 옅어지는가 싶더니 결국 손에 쥐고 있던 두 무기만 남은 채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리안이 수십번 앤을 전음으로 불러 봤지만 앤은 묵묵부답이었다.

    충분히 리안이 변수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리안의 입장에서 자기보다 더 안달 났을 것 같은 앤이 가만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뭔가, 그들에겐 뭔가 다른 수가 있을 거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아직 주변의 사람들이 전부 이동되지도 않았다.

    참고 기다리는 방법밖에는 없다.

    만약 이 상태로 앤의 돌체가 완전히 사라졌다면 이제 저 미치광이 대천사장과의 전면전을 준비해야 했다.

    대천사장은 당연히 앤을 박살 내고 에트론을 찾아올 것이다.

    아직 로만에게는, 에이드윈에게는 에트론의 힘이 필요하다.

    리안은 대천사장의 힘과 한의 힘을 비교해 보았다. 경합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대천사장의 오만은 반드시 자기 자신을 패배의 늪에 빠지게 만들 것이다.

    한은 상대방의 심리를 가지고 그 스스로 자기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데 능통한 자다.

    한번 물리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그의 페이스에 휘말려 정작 한 자신은 별다른 체력을 소모하지도 않은 채 승리를 가져간다.

    불합리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것이 세계의 정점이었던 미치광이 살인마, 전 랭킹 1위이자 독보적인 세계 1위 암살자 한의 실력이다.

    게다가 안젤리나의 귀띔에 의하면 일전 리안이 승리했던 검은 말 조직의 지도부들이 호른의 지하 폭포에서 다시 프로그래밍되어 살아났다고 했다.

    이 역시 또 다른 변수다.

    오아시스는 이 마지막 싸움에 모든 것을 걸고 있다.

    그와 동시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다.

    어차피 전체적인 시스템을 다운시킬 것이기 때문에 마무리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것이다.

    녀석의 마음이야 당연히 당장이라도 세계를 다스리는 자기의 권한으로 모든 시스템을 완전히 다운시키고 싶겠지만 그럴 수 없다.

    더더욱 그럴 수 없다.

    그의 예상이 맞다면……. 이곳도 ‘저곳도’ 동시에 난장판일 테니 말이다.

    에너지 수급이 우선일 것이다.

    무작정 ‘폐기’를 당길 수는 없다.

    게다가 소스 파괴까지 이루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오아시스라는 가상현실 게임은 공든 탑이다. 탑의 높이가 길어질수록 기초가 얼마나 단단히 쌓였는지를 예측하게 된다.

    이 기초를 남겨야 녀석이 원하는 다음 탑도 단단히 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어떻게든 이 세계 안에서 자신의 완력을 조절하며 최상의 시나리오로 완전한 ‘폐기’ 단계를 거치길 바라겠지.

    이 상황에서 등장한 대천사장 돌체 역시 오아시스의 그림 중 하나겠지만 저 자를 잘만 이용한다면 오히려 역린이 될 수도 있다.

    첫 번째 리사이클 전 정지되었던 천계다.

    정말 긴 시간 잠들어 있었다는 건 분명 이유가 있다.

    저들의 성격이 대부분 저렇게 꼬였겠지만 자기만의 정의를 가진 자들이다.

    혹,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다면 악마 군단 따위는 신경조차 쓸 필요 없고 에이드윈과 검은 말 조직 간의 최후의 전투에서도 분명히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 줄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그 그림이 완성되지 못한다면 리안은 지금을 장담할 수 없다.

    아직 에이드윈에게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다만 유르겐과 로만은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진즉에 알아차렸을 것이다.

    허나 그렇다 해도 그들이 전방 전장에서 이탈하진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만큼 리안의 힘을 믿는다.

    리안은 자신을 믿었던 김창수와, 정혁과, 에이드윈에게 화답해야만 한다.

    이 위기를 어떻게든 타개해야 한다.

    [앤…… 당혹스럽겠지만 준비하고 있을게요. 반드시 이야기해요. 말씀하시면 바로 공격하겠습니다.]

    [……아니, 아니에요. 기다려요.]

    앤의 차분한 전음이 날아왔다.

    앤은 여전히 빛나는 채찍에 휘감겨 있었지만 그리고 슬퍼 보였지만 그럼에도 정신을 차리고 돌체를 흡수한 돌체를 똑똑히 바라보고 있었다.

    대천사장 돌체는 양손에 자신의 두 창을 쥐었다. 천계의 무기이기에 화려하고 밝은 빛의 화염이 둘러져 있었다.

    그는 날개를 펄럭이며 이제 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번쩍이는 안광과 잔잔한 미소가 그의 여유를 대변해 주는 듯 했다.

    “이제 간악한 자는 사라졌으니 드디어 내 마음에 평온이 도래했다. 필멸자여.”

    돌체가 앤의 턱에 손을 대고 그녀의 얼굴을 잡았다.

    앤은 흠칫 놀라더니 이내 두 눈 가득 고였던 눈물을 터트리며 그 자리에서 엉엉 울기 시작했다.

    돌체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했다.

    “그렇지, 죽음이라는 것은 그렇게 두려운 법이야. 우리는 죽음을 모르기에 이렇게 당당하고.”

    앤은 그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눈을 감고서 돌체의 손길에 볼을 가져다 댔다.

    돌체의 손을 타고 앤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솔직하구나 필멸자여. 건방졌지만 이 대천사장 돌체에게 호기롭게 덤벼들었던 너의 용기는 가상하다. 용사로서 죽을 가치가 충분하니 고통 없이 보내 주…….”

    당당히 말을 이어 가던 그가 갑작스레 말문을 멈추고 우뚝 섰다.

    돌과 같던 그의 손길이 앤의 볼을 천천히 쓰다듬기 시작했다.

    순간 공중에 부유하고 있던 그의 모든 무기가 제각기 차원 문을 열고 사라지고 돌체의 다른 손까지 앤의 볼로 향했다.

    앤의 몸을 옥죄고 있던 채찍 역시 사라졌다.

    “돌체…….”

    앤이 가엾게 돌체를 불렀다.

    돌체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얼굴로 슬프고도 찬란하게 앤을 바라보았다.

    그는 양손으로 앤의 눈물을 닦아 내며 말없이 앤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면서 앤의 어깨를 밀쳐 냈다.

    앤이 순간적인 충격으로 공중에서 나동그라졌다.

    “뭐, 뭐지? 이 무슨 기억…….”

    돌체는 고개를 휘저으며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고통스러운 듯 신음을 마구 내뱉었다.

    그의 눈에서 빛이 모였다가 레이저처럼 사방으로 방출되었다.

    그 공격 역시 상당해서 두세 개의 건물이 직격으로 맡고 파괴되자 리안이 재빨리 여러 건축물에 방어 마법을 펼쳤다.

    그때 앤이 소리쳤다.

    “돌체! 네 영령은 이 땅에서, 네가 무시하는 이 땅의 필멸자들과 함께 그들의 삶을 공유하고 살았어! 네가 방치한 네 영령이 이곳에서 사람의 삶을 이해하며 살았다고! 살고 숨 쉬고 먹고 마시고 웃기도 울기도, 싸우기도 그리고!”

    앤이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말했다.

    “사랑……하기도.”

    “납……득할 수 없다. 어째서, 무기고에 있어야 할 내, 내 영령이!!”

    순간 돌체의 안광이 앤에게 향하자 리안이 순간 이동으로 앤의 앞에 나타나 엄청난 두께의 투명 방어막을 펼쳤다.

    “너는 그 돌체를 흡수한 거야! 이제 알겠어? 네가 오만방자하게 무시했던 그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네놈들이 방치했던 이 세계의 절망적인 고통과 슬픔을! 천사? 너희들이 존재하는 이유가 뭔데? 존재라는 것은 이유가 있는 거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스스로를 멈춰 버린 그 빌어먹을 행동 자체도 축복이라 스스로 자위하는 너희야 말로 정말 존재 가치가 없는 것 아냐?!”

    “네년이……!”

    돌체의 안광이 더욱 강렬해졌다. 리안이 양손에서 마나를 강하게 뿜어내며 반동을 막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그러니 이제 다 기억해! 돌체가 가지고 있던 모든 기억을 다! 전부 다! 이 세계가 정말 어떤 고난 속에 피어났는지! 돌체가 느꼈던 모든 것을 전부 가슴에 품어! 그리고…… 그리고!”

    앤이 헉헉거리며 자신의 이야기의 끝을 맺어 갔다.

    “나를, 나를 기억해……!”

    “으아아아아!”

    돌체가 고함을 내지르며 눈을 감았다.

    한숨 돌린 리안이 막대한 양의 마나를 잡아먹던 보호막을 거두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와 동시에 돌체는 앤과 리안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허공을 강하게 내려쳤다.

    균열이 일어나며 넓은 틈이 벌어지고 돌체는 머리를 부여잡고서 그 안으로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돌체가 사라지고 균열이 완전히 닫히자 리안은 거의 탈진한 수준의 앤을 붙잡고 지면으로 내려왔다. 룬다나와 녹턴이 재빨리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세상에, 대천사장 아닌가?”

    녹턴이 침을 꿀꺽 삼키고 말하자 룬다나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래? 아니,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대천사장이, 그니까, 그 대천사장이 이곳에 내려온 거냐고?!”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나눌 때가 아닙니다.”

    리안이 간단히 그들의 관심을 거절하고는 앤을 들어 안았다.

    “불쾌하게 여겨주지는 마십시오.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이미 뾰로통해진 룬다나는 팔짱을 끼고 있었고 리안의 말에 녹턴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나가 일어나면 상황실로 좀 보내 주세요. 또 하나의 변수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논의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 에트론 님도 같이 말입니다.”

    녹턴은 룬다나의 어깨를 치며 그녀와 함께 돌아갔다.

    소란스러움이 가시자 멀리 자리를 피했던 석공들과 목수들이 다시 어깨를 걷어붙이고 박살 난 건물들을 재건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리안은 상황실로 올라가면서 앤을 살폈다.

    앤은 기절한 채로 숨만 겨우 붙어서 옅게 내쉬고 있었다.

    그녀에게 남은 마나는 거의 없었다.

    바닥에 바닥까지, 돌체가 발산하는 어마무시한 마력 속에서도 사력을 다해 자신의 기량을 뽐낸 것이다.

    랭커다운 힘과 능력이었다.

    그녀에게 만약 그녀의 에고 무기 돌체가 함께했다면 지금의 랭킹은 뒤집어졌을 수도 있다.

    그녀가 일어나야 한다. 분명 돌체가 흡수되기 전 그와 대화를 나눴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영악하게도 결의를 다지며 돌체가 돌체에게 흡수되도록 놔뒀을 것이다.

    잠깐의 만남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리안을 통해 느꼈으면서도 또 한 번, 그녀는 그런 선택을 하고 만 것이다.

    리안은 앤은 상황실 한쪽에 마련된 간의 침대에 눕혀 놓고 회복 마법을 걸어 놓은 뒤 팔짱을 끼고 상황판을 내려다보았다.

    실시간으로 전황을 볼 수 있는 상황판에서는 이미 크고 작은 전투들이 각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에이드윈은 에도라 쪽에, 제논의 병력은 안도리니 쪽에.

    어디도 싸워 볼 만하다고 할 수 없었다.

    에이드윈이 면전에 나서면 좋겠지만 아직은, 아직은 아니다.

    정혁이 부디 엔듀라곤에서 어떤 희망의 소식을 가지고 오길 바랄 뿐.

    “……리안…… 리안!”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 리안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리안은 가만히 그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았다. 그건, 정혁이었다.

    “리안!”

    쾅-

    상황실 문이 급박하게 열리고 정혁이 기절한 에트론을 데리고서 달려 들어온다.

    그는 조금 화가 나 있었다.

    정혁은 조심스럽게 에트론을 상황실 의자에 내려놓고는 리안에게 다가가 물었다.

    “전초기지가 박살나고 안나와 에트론은 이 모양이고, 이게 다 무슨 일이야?!”

    리안은 큰 숨을 쉬며 방금 있었던 일을 그에게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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