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68화 (168/200)
  • ◈168화

    “용의 기운을 품고 계신 사냥꾼께서 저희를 이곳으로 인도해 주셨어요.”

    “제논에 들르진 않았던 거야?”

    “그건 전적으로 저 녀석 때문이죠.”

    “왜?”

    정혁의 질문에 이프가 침을 꿀꺽 삼켰다.

    “제논을 못 믿겠다나, 인간을 믿으면 안 된다며, 정혁 님도 믿을 만한 사람이 못 된다고 뭐, 이 세계를 무너트릴 악마같은 계획을 가지고 있다던데요?”

    “너……이 씨.”

    이프가 눈치를 보며 눈알을 굴렸다.

    여전히 살벌한 근위대의 칼날이 그녀의 곁을 맴도는 중이었다.

    도대체 저런 캐릭터는 왜, 어떻게, 무엇 때문에 만들어진 것일까.

    도통 알 수가 없다.

    “그래도 최대한 욘마곤의 제논 전초기지 본채 근처에 은닉시켜 놓았습니다. 제논의 훌륭한 마법사들이라면 이 포탈을 이용해서 효율적으로 카탈에서의 대규모 이동을 지원받을 수 있을 거예요. 이제 더 이상 정령왕 분들도 포탈 유지에 마나를 사용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전력이 보강되겠죠.”

    “다행이네.”

    “이곳에 당도했을 때 안젤리나 님께서 은밀하게 저희에게 접근해 오셨어요. 드래곤의 혼을 품고 계셔서 저희 병력들이 함부로 이분을 대할 순 없었죠. 안젤리나 님은 제논에 가는 것보다 엔듀라곤으로 가야 한다고 재촉하셨습니다. 아마, 정혁님의 뒤를 쫓고 있었을 거라고 추측되네요.”

    정혁은 곁을 걷고 있는 안젤리나를 힐끔 보았다.

    안젤리나는 호른의 일 이후로 집요하게 한을 쫓았을 것이다.

    우연히도 정혁과 한이 같은 공간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곤 안젤리나는 빠르게 계산을 돌렸겠지.

    지금의 정혁이 한을 이길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했을 테고 만약 그렇다면 제논의 병력들이 자신의 수장의 무너짐을 굳이 눈앞에서 목도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더불어 욘마곤 곳곳에 모든 지리와 특이점을 알고 있는 그녀에겐 욘마곤에서 급작스럽게 생긴 거대한 마나 균열을 금방 느꼈을 것이며 아린이라는 신흥 은행나무 엘프 국왕의 소식을 알고 있는 차에 그녀는 아린에게 엔듀라곤으로의 진군을 부탁했을 것이다.

    “괜찮은…… 선택이었네.”

    정혁은 안젤리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젤리나는 묵묵히 앞을 보며 걸을 뿐이었다.

    그녀 역시 머리가 복잡할 것이다.

    그녀도 정혁의 힘을 안다.

    용의 가호를 받지 않은 상황에서 대장장이로서의 스탯으로는 말도 안 되는 퍼포먼스를 보여 주고 있는 그이다.

    랭커들이 함께 덤빈다고 해도 비등하게 싸움을 이어 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한은, 아니다.

    그는 10만의 대군과도 혈혈단신으로 싸워 이겼던 자다.

    그의 광기는 오늘 본 바 더 강렬해졌다.

    그러나 알 수 없는 결함이 그의 내부에 산재하는 지금 또 다른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사실 안젤리나는 고민 중이었다.

    한이 나타났다는 정보를 적어도 린에게는 전달해 줘야 하지 않을까.

    아직도 여전히 랭커들은 자신들의 힘에 대해서 의문을 갖고 있다.

    전 세계 유일한 적을 처단하라고 받은 힘으로 전 세계 플레이어들의 가장 꼭대기에서 오히려 그 적과 한 합도 나눠 보지 못한 채 허울 좋게 군림하고 있다는 생각을 린은 종종 했었기 때문이었다.

    안젤리나는 확실히 안다.

    그렇다고 린이 약하진 않다는 것을.

    랭킹 1위라는 타이틀에 걸맞은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다만 지금의 랭킹 1위와 한이 가진 랭킹 1위의 힘의 차이는 압도적으로 다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드디어 자신의 힘의 당위성을 찾은 린은 에도라의 나머지 랭커들을 충분히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우악스러운 롬도 한이라면 침을 흘리며 달려들 것이다.

    그렇다면 에도라는 이제 반대로 제논의 편에 붙어 안도리니를 총공세로 밀어 붙이고 그 배후에 있는 검은 말 조직을 집중 공격할 수 있을 것이다.

    힘을 근간으로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악마와의 계약도 때려치우고 말이다.

    앞으로 충분히 한과 다시 부딪칠 수 있다.

    제논은 제논 나름대로 이에 대한 필사적인 대비를 해야 하고 정혁은…….

    안젤리나는 앞서 걸어가는 정혁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째서일까.

    이전과 달리 그에게는 에드가라고 불리던 황금빛 드래곤 말고는 그 어떤 에고 장비도 느껴지지 않았다.

    힘도 능력도 전보다 반감된 것 같다.

    타오르는 화기에 까딱 하나 안 하던 그가 엔듀라곤에서는 열기에 숨 막혀 했다.

    모든 부분에서 갑작스럽게 다운그레이드 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에게는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한을…… 이길 수도 있다는 확신이 그에게는 느껴진다.

    보잘 것 없는 신체에 한에게 비교해 보자면 어처구니없는 능력이지만 말이다.

    그는 처음으로 실질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한’이라는 악몽과도 같은 자의 무릎을 꿇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라테 님도, 엘라 님도 전부 느껴지지 않네요?”

    “아……. 다 돌려보냈습니다.”

    “……네?”

    마침 궁금했던 차, 아린이 물어본 질문에 대해 답하는 정혁을 보며 안젤리나 역시 두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국왕, 전 대장장이입니다. 알죠?”

    “알죠.”

    “대장장이가 하는 일이 뭡니까? 무기 만들고, 방어구 만들고 아닙니까?”

    “그랬죠? 근데 정혁 님은 그런 대장장이가 아니셨잖아요?”

    “그런 대장장이가 되었습니다. 하하, 본래 주인에게로 돌아갔다고 할까요?”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아린이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았다는 표정으로 말을 마쳤지만 정혁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 * *

    투쾅-!!

    “에트론-!”

    에트론의 이름과 함께 하늘에서 커다란 빛줄기가 내리꽂혀진 것 불과 5분전이었다.

    제논의 전초기지 본채 한가운데로 떨어진 빛줄기 속에서 단 한 명의 천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금빛 갑옷을 전신에 두르고 이글거리는 안광을 보이며 김창수보다 더 큰 덩치로 용맹하게 날개를 펄럭이고 있는 여덟 깃의 대천사장 돌체였다.

    그는 한없이 밝은 빛을 뿜어 내는 창을 휘두르며 또 한 번 그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나와라 에트론!”

    리안과 안나는 허겁지겁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안나는 주변의 마나를 모두 응축해 버린 듯 엄청나게 무거워진 기운에 차마 몸을 일으키고 있을 수 없어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리안만큼은 똑똑히 그를 바라볼 수 있었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진압하려고 뛰어온 사방의 모든 병력들 전부 안나와 같이 옴짝달싹 못 하고 있었지만 리안은 아니었다.

    “네놈!”

    돌체의 창이 리안의 목젖 앞에서 멈춰 섰다.

    “나 대천사장이 묻는다. 천계의 사명을 지키지 못하고 이 땅으로 몸을 숨긴 간악한 타락 천사 에트론은 어디 있는가!”

    리안은 하마터면 그의 질문에 대답할 뻔했다.

    대천사 돌체의 말엔 정신 지배의 술식까지 같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리안은 입을 꾹 다물고 여전히 돌체의 두 안광을 바라보며 단호한 얼굴을 유지했다.

    “……교만하다. 이 시대가 이렇게도 교만하다! 고하라, 필멸자여. 이 세계의 어떤 자도 이 돌체보다 높을 순 없으니 예의를 갖추고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라!”

    다시 한번 아까보다 한층 더 강렬한 마법이 리안의 신체를 꿰뚫고 지나갔다.

    위험했지만 참을 수 있었다.

    두 번의 질문을 견뎌 내자 돌체는 흥미가 생긴 듯 고개를 갸웃하더니 창을 거뒀다.

    그의 날개가 펄럭이며 사방으로 거센 바람을 불러일으켰으나 리안은 이미 자신에게 겹겹이 강력한 베리어를 형성한 뒤였다.

    물론 돌체의 창은 마치 베리어를 무시하듯 그의 목 앞에 저항 없이 다다랐지만 이런 바람쯤은 충분히 막아 줄 수 있었다.

    “이름을 말하라.”

    돌체가 묻자 리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리안 에이드윈 입니다. 대천사장 돌체 님.”

    “……에이드윈……이라. 익숙한 이름이다. 필멸자 주제에 감히 내 이름을 입에 담다니 대단한 용기로구나.”

    리안은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는 말을 이었다.

    “꽤 긴 시간을 정지해 계셨습니다. 그 사이 이 땅은 참 많이도 변했지요. 당신들이 증오하던 전쟁의 불길이 다시 이 땅에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하! 증오?”

    돌체가 강렬한 웃음소리를 뱉더니 허공으로 천천히 떠올랐다.

    그러곤 일정 높이에서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너는 보이느냐, 지금 이 조아림이. 증오라 했나? 아니지, 우리 천계의 대천사들에게 전쟁은 증오스러운 것이 아니다. 따분한 것이지. 나는……!”

    돌체가 창끝으로 허공을 치자 그곳에 균열이 생겨나며 마치 에트론이 열고 닫았던 공간과 같은 공간이 열렸다.

    돌체는 창을 거칠게 그 안에 집어던져 놓고 익숙한 모양의 스태프를 꺼냈다.

    대천사장의 손이 스태프에 닿자 빛을 발현하며 스태프는 일전에 알았던 모양보다 더욱 화려하고 찬란하게 모습을 바꿨다.

    그러나 그 중심부에는 균열의 상처가 똑똑히 남아 있었다.

    “나의 영령이 담긴 이 무기가 왜 이렇게 파손되었는지를 알아야겠다. 왜 에트론이 자신의 본래의 영광스러운 직위를 포기하고 이 불결하고 더러운 중간계로 도망쳤는지를 알아야겠다! 또 왜 다른 대천사들보다도 이 내가 정지의 축복에서 가장 먼저 깨어났는지를 알아야 하겠다!”

    하지만 에트론은 이미 유르겐과 함께 떠났다.

    제논의 전초기지는 사실상 전투가 가능한 병력들이 없다.

    전부 각 분야로 흩어져 방어선을 구축하고 유지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곳에는 김창수가 부탁한 대로 리안이 최후의 방어 병력인 것이다.

    “그러나 교만한 네놈은 이 나에 대한 예의도 두려움도 없는 모양이구나.”

    돌체가 리안을 똑바로 바라보곤 스태프에 마나를 주입했다. 리안이 움찔하며 공격을 받는다면 반격을 하려는 준비를 했지만 대상은 리안이 아니었다.

    그는 주입된 마나를 활성화 하며 고대 천계의 언어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러자 공중에서 마법진 하나가 나타나며 그 속에서 에트론이 갑작스럽게 튀어나왔다.

    에트론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허공에서 주변을 둘러보곤 곧바로 느껴지는 엄청나게 강렬한 천향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곤 급히 뒤를 돌아본 뒤 사색이 된 표정으로 기절한 듯 날개를 축 늘어트리고 지면으로 추락했다.

    리안이 재빨리 에트론을 받아 내려 했지만 지면으로 추락하기 전 에트론이 다시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에트론의 목이 돌체의 손안에 들어왔다.

    늘 작은 모습의 에트론이 돌체의 마나에 닿자 보통 어른의 키만큼 커졌다.

    8개의 날개에서 떨쳐지는 위용 앞에 에트론의 두 날개는 상대적으로 위축되어 보였다.

    “어째서…….”

    돌체가 에트론의 목을 쥔 손에 힘을 주며 가만히 에트론을 지켜보았다. 에트론은 돌체의 손을 양손으로 부여잡곤 고통에 몸부림쳤다.

    “어째서냐, 어째서 네놈에게 천향이 느껴지지 않는데도…… 이 두 날개가 여전히 백색으로 빛나는 것이냐! 이건 천계의 법도에 어긋나는 이단의 행위이다!”

    “대…… 흐윽, 대, 대천사장님, 죄…… 흐윽, 헉, 죄송…….”

    “무슨 조화로 네놈이 이런 불결한 존재로서 이 땅에 있는지 모르겠으나 너는 오늘 즉결 처형이다.”

    조치가 필요했다.

    리안이 급히 자신이 알고 있는 최고등급의 고대 마법의 주문을 시전하려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무거운 공기를 뚫고 날아들었다.

    “돌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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