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67화 (167/200)
  • ◈167화

    안젤리나의 표정이 묘했다.

    한이라고 이야기하는 그의 눈빛 속에 무언가 깊은 의문점이 남아 있었다.

    “뭔가…… 달랐던 거죠?”

    “……네, 확실히 그랬어요.”

    정혁의 질문에 안젤리나는 그날의 한을 다시 한번 찬찬히 떠올려 봤다.

    안젤리나의 사명 중 하나는 ‘한’을 처단하는 것이었다.

    용의 가호를 받아 현재의 랭커들이 힘을 합치게 된 이유도 전부 악랄한 ‘한’의 소멸 때문이었다.

    모두 의기투합하여 강대한 적, 사악한 적, 세계의 적에게 맞서는 것만큼 매력적인 임무도 없었으며 평화를 원하는 많은 플레이어들과 세계의 여러 종족들을 대변하는 마지막 희망이기도 했기에 자부심 역시 대단했다.

    그들은 철저히 한을 분석했다.

    그의 능력부터 시작해서 성격, 반복적인 행동, 주요 출몰 지점 등등 비록 그들이 유일무이한 힘을 고등의 존재에게 부여받았다고는 하나 그것만으로 그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았기에 일치단결하여 다방면에 최선을 다해 왔다.

    안젤리나는 특유의 상황 판단 능력과 분석력을 기반으로 그의 모든 행동 패턴들을 머릿속에 도식화하여 집어넣었다.

    그렇기에 호른의 마나 폭포 입구에서 로브를 입고 마스크를 쓰고 있을 지라도 그가 한인지, 아닌지를 명확히 알 수 있었다.

    그는 분명 한이 맞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한이 아니다.

    안젤리나는 시간이 지나 자신의 판단력이 흐려졌는지에 대해 고찰해 봤다.

    아니, 그럴리 없다.

    안젤리나는 여러 팀원들 중에 제일로 한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그에 대해 누구보다 철저했다.

    그래야만 자신의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거라는 명백한 사실을 충분히 납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훌륭한 사냥꾼은 사냥감을 노릴 때 자신의 힘과 개인적인 능력을 과신하지 않는다.

    사냥감에 대한 분석이 완전히 끝이 나고 사냥감이 자기보다 하류일 것이라 결론이 나도 최선에 최선을 더한다.

    그녀는 자신이 그랬다고 믿었다.

    그렇기에 그는 분명 한이 맞았다.

    그러나 결론은 또 같다.

    그는 한이 아니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이프가 눈살을 찌푸리며 묻자 안젤리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말 그대로예요. 그자는 A이면서도 한이었지만 또 한이 아니라 A인 것 같기도 했습니다.”

    “A를 본 적은 있었나요?”

    정혁이 묻자 안젤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본 적은 없지만 흔적은 압니다. 그리고 그 흔적에서 미묘한 체취를 획득했었어요. 사람마다 독특한 체취가 있죠. 그 채취에 제가 가진 마나를 배합하면 모든 특성들을 분석해서 정확히 대상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에게는 분명히 A의 체취와 한의 모습이 동시에 있었어요.”

    이프가 뒤춤을 뒤적이다가 손가락 크기의 작은 유리병을 집어 안젤리나에게 던졌다.

    안젤리나는 갑작스럽게 자기에게 던져진 유리병을 받아들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프는 유리병의 뚜껑을 가리켰고 안젤리나는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었다.

    그리곤 뭔가 알겠다는 듯이 이프를 바라보았다.

    “A의 체취네요.”

    “뭐, 나 역시 소문난 암살자 중 하나니까요. 언제나 저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했었으니 저들의 배후도 잘 알고 있지.”

    “배후?”

    정혁이 묻자 이프가 안젤리나가 돌려준 유리병을 다시 받곤 말했다.

    “네, 빌어먹을 제국 안도리니 말입니다. 그들의 배후엔 검은 말 조직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에도라는 악마들과 붙어먹었구요.”

    이프의 말이 끝나자 안젤리나가 말을 이어 대답했다.

    조금 웃기고도 슬펐다.

    삼파전이 쉬울 거라는 생각은 하진 않았지만 오히려 괴랄하게 꼬인 느낌이다.

    “그건 그거고 다시 원론적으로 돌아오면 한이자 A인 그자를 뭐라고 정리하긴 어려울 것 같아요. 하지만 분명한 건 그는 완벽한 한이 아닐 겁니다.”

    “외형적으로나 성격으로나 그는 완벽한 한이었습니다. 그보다 더 완벽할 순 없을 텐데요.”

    정혁의 말에 안젤리나가 잠시 침묵했다.

    침묵 속에서 정혁은 안젤리나가 하는 말에 한편으로 묘한 동의가 된다고도 생각했다.

    치열하고 짧은 전투였지만 그 사이사이로 한은 꽤 과거의 일들만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또한 뭔가에 저항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도 있었다.

    더불어 그와 정혁을 지금 이 순간에 만나게 했던 이유, 그것이 제일 큰 의문이자 안젤리나가 가진 이질적인 느낌의 해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그가 A의 옷을 입고 프로그램에 이용당하고 있다면?

    그 사실을 본인은 전혀 모르고 있기에 잔잔한 물결 속에 던져질 작은 돌멩이가 필요했고 그것이 정혁, 자신이었다면?

    “……어느 정도는 추측되는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서 이야기하기엔 조금 어렵겠군요.”

    그는 저 멀리서 이곳을 향해 거친 숨을 몰아쉬며 걸어오는 은행나무 엘프 왕국의 국왕 아린을 발견하곤 말을 마쳤다.

    아린은 자신의 덩치만 한 검을 메고 전보다 더 위풍당당해 있었다.

    정혁은 오히려 지금 자신의 꼴이 훨씬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손이 많이 가시네요?”

    아린이 쾌활하게 웃으면서 정혁의 앞에 섰다.

    정혁은 몸을 고쳐 앉아 작게 목례를 했고 아린은 그에 응답하며 고개를 한번 숙였다.

    “국왕님을 뵙습니다.”

    “다시 봬서 좋네요. 제논 연합의 지도자 정혁 님.”

    “어색……하네.”

    정혁이 넝마 조각을 대충 걸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다시 한번 살피고는 민망한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린은 피식 웃으며 정혁에게 손을 내밀었다.

    정혁은 더러운 자신의 손을 허벅지에 몇 번 슥슥 닦고는 그의 손을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어느 정도 회복된 몸이었지만 아린을 지탱해야만 발을 디딜 수 있었다.

    “타이런이 온통 전쟁터입니다?”

    “그렇……죠. 뭐, 좋은 상황은 아닙니다.”

    정혁은 그의 주변에서 경계를 하면서도 동시에 정혁의 예의범절 역시 주시하고 있는 은행나무 엘프 정예 병력들을 바라보며 말을 높였다.

    “일단 제논의 영역으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이동하실 수 있겠어요?”

    “어떻게든 가야겠죠.”

    “에드가는 저희가 요람에 태워 데려가도록 하죠. 부하들이 조금 꺼려 하긴 합니다만.”

    아린이 은행나무 엘프들이 만든 은행나무 요람에 에드가를 태우는 병력들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하기야 언제 이프가 그랬듯 엘프들은 천성적으로 자신보다 고등한 존재들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상대가 자신보다 하류 존재라고 생각하면 당연히 깔보게 된다.

    어쩔 수 없는 그들의 생태였기에 그들이 지금도 이렇게 숲속에 숨어 살 수밖에 없던 것일지도 모른다.

    누가 그들과 교류하려 했겠는가.

    그런 점에서 아엘프 아린은 은행나무 엘프 종족에 큰 반향을 이끌었고 이는 종족의 번영이라는 미래를 보여 주고 있다.

    정혁은 이프를 슬쩍 돌아보았다.

    이프는 정혁의 시선을 느끼곤…… 윙크를 던졌다.

    “저 나이트엘프는 어떻게 만나게 된 겁니까?”

    “아…… 저…… 녀석이요?”

    그래!

    정혁은 속으로 환호했다.

    아린이 ‘녀석’이라는 표현을 쓰자 이프가 부리나케 그들 곁으로 달려와서 소리쳤다.

    “에에? 아니 국왕 나리! 녀석이라니요! 우리 서로 상호 존…….”

    이프의 발작에 아린을 수호하는 데 존재 목적을 지닌 국왕 근위대 엘프들이 순식간에 이프의 몸 곳곳에 날카로운 검날을 가져다 댔다.

    이프는 마치 그 자리에서 얼어 버린 것처럼 몸을 움직이지 못한 채 눈알만 굴리면서 서 있었다.

    “하여간, 조심 좀 하라니까.”

    “하여간, 조심 좀 하지.”

    정혁과 아린이 동시에 비슷한 말을 뱉고는 피식 웃어 보였다.

    아린이 손짓을 했고 그녀에게 겨눠진 칼날이 거둬졌다.

    “어떻게 알았는지 저에 대한 소식을 듣고 중앙해를 건너서 왕국 본성까지 잠입해 들어왔더라구요. 놀랐죠. 제 나름대로 잘 방비하고 있었다고 했는데 저자의 은신 기술이 너무 뛰어나서 발각조차 되지 않고 제 집무실 근처까지 당도했었으니까요. 그래도 잘 훈련된 저희 근위대 병력들에 의해 저지당했고 그 자리에서 참수당할 뻔한 걸 제가 겨우 말렸습니다. 아시죠? 저희 성격?”

    정혁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하는 아린에게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행나무 엘프는 그들밖에 모른다.

    다른 엘프들은 전부 인간보다 더 증오한다.

    마나에 심취해 정신병자가 되어 버린 동포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자연에서 흘러나오는 마나의 옅은 향기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며 살아가는 그들이었다.

    하긴, 다른 이들도 여러모로 자연의 마나를 기반으로 살아가는 그들의 몸에 밴 특유의 향기 때문에 애초에 싫어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흥미로웠어요. 저 녀석이 하는 말들, 그 속에서 느껴지는 동족의 부활에 대한 간절한 염원, 게다가 특유의 잠입 기술은 저희 은행나무 엘프들이 배워야 할 점이라고 생각했죠. 그뿐만 아니라 저 녀석이 욘마곤에 두고 왔다고 하는 나이트엘프의 보물도 궁금했구요. 무엇보다도 하늬안 님과 정혁 님이 떠올랐습니다.”

    “……우리가?”

    “카탈 대륙 곳곳에서 산발적인 게릴라성 공격이 한창이었어요. 다행히 은행나무 엘프 영토까지는 도달하지 않았지만 제논의 병력들이 사방에서 잘 막아주고 있었죠. 저희도 도울 땐 도왔구요. 그러나 안도리니에서 날아온 마나 미사일은 영토를 가리지 않고 무분별하게 날아들었습니다. 그들의 공격을 막는 것도 어렵진 않았지만 이제 정말 큰 전쟁이 시작되겠구나 하는 느낌은 받았죠. 이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하는 쪽은 제 입장에서는 제논이니까. 당연히 두 분이 생각나지 않았을까요?”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정혁이 날카롭게 묻자 아린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미소를 띠며 특별히 그의 물음에 대해 대답하진 않았다.

    “나이트엘프의 보물을 통해서 이곳에서도 제 국왕의 힘을 사용할 수 있고 또 대륙 간 이동이 가능하도록 조치도 되었으니 앞으로는 눈앞에 당도할 전쟁 대비만 잘 해내면 문제 없……을 줄 알았지만.”

    아린이 싱글싱글 웃다가 뭔가 번뜩 떠오른 듯 주춤했다.

    그러곤 말을 이었다.

    “동굴 안에 저 남자는 정말 상상 이상이네요.”

    아린이 정혁을 부축하며 걷다가 우뚝 섰다.

    그래, 무슨 조화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린이 이렇게 성히 걸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한이 물러났다는 뜻일 것이다.

    어쩌면 큰 행운이 따랐다고 봐야겠다.

    “지금의 정혁 님보다 어쩌면 더…… 강할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나라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그러시겠죠.”

    아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혁은 늘 대안에 대안을 가지고 있었다.

    아린은 그런 정혁의 당당함을,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내면에 담겨 있는 진심을 잘 알고 있다.

    게다가 이 모든 병력들의 미래를 짊어진 그가 이런 일로 결코 물러나지 않을 것임을 안다.

    “타이런은 그렇다 쳐도 엔듀라곤 화산은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정혁의 질문에 아린은 안젤리나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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