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66화 (166/200)
  • ◈166화

    아린의 뒤로 안젤리나와 이프가 당도했다.

    이프는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에드가를 챙겼고 안젤리나는 재빨리 정혁을 들쳐 멨다.

    “저희는…… 먼저……!”

    “네! 부탁합니다.”

    안젤리나가 아린에게 말하자 아린이 마나에 집중하면서도 거의 넝마 조각이 된 정혁을 걱정스러운 듯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젤리나와 이프는 더운 공기를 가르며 빠르게 엔듀라곤 화산 동굴 밖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들 사이로 국왕을 보호하기 위해 더운 열기와 싸우며 사력을 다해 안으로 걸어가고 있는 은행나무 엘프들이 보였다.

    자연에 친숙한 엘프들은 화기에는 굉장히 취약하다.

    그렇기에 이 엔듀라곤 화산 자체는 그들에겐 상성이 맞지 않는 지옥의 땅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아린은 아엘프였기 때문에 그나마 치명성이 덜했고 이프에 의해 강화된 능력으로 이제 어디서든 선조의 영혼들을 통해 싸움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힘을 이용해서 안젤리나와 이프의 정보를 듣고 이곳으로 급히 달려오게 된 것이다.

    아린은 생전 처음 느끼는 살기에 몸서리쳤다.

    저 남자가 휘두르는 두 단검에 서린 한이 느껴졌다.

    얼마나 많은 생명들을 거둬들였는지 말이다.

    마치 검고 칙칙하고 불결한 악의 진득한 덩어리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의 시선이 중간중간 아린에게 닿을 때마다 아린은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의 살기가 닿을수록 마음속에 두려움이 점점 커지는 느낌이었다.

    왕의 자질에 두려움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린의 모든 힘은 그 스스로가 왕이기에 발현되고 그에게는 그 자질을 지속적으로 유지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저자를 물러나게 할 수 없다.

    한창 싸움을 이어 가던 그때 남자가 갑작스럽게 포효를 내질렀다.

    포효는 파동이 되어서 사방에 퍼졌고 그 포효에 남자 주변에 있던 모든 선조의 영혼들이 순식간에 소멸했다.

    겹겹이 쌓여 있던 공간에 빈틈이 생기자 아린은 이제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맹수처럼 자신에게 달려들 것 같았던 그가 모습을 감추었다.

    그는 엔듀라곤에서 사라졌다.

    아린은 큰 숨을 내쉬며 바닥에 꽂았던 검에 몸을 기댔다.

    곧 자신의 근처를 호위하려고 기어코 이곳까지 온 은행나무 엘프 근위대가 지쳐 쓰러질 것 같다고 느끼곤 검을 뽑아 등에 고쳐 맨 뒤 바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이프와 안젤리나는 최선을 다했다.

    엔듀라곤에서 빠르게 멀어져 욘마곤의 생명력 넘치는 대지에 진입하자마자 정혁과 에드가의 회복에 전념했다. 둘 다 회복 계열의 마법사도 아니고 이렇다 할 힘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지식과 여러 마법 스크롤 들로 거의 바닥이 나 있는 둘의 체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제논에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었지만 안도리니와 싸우고 있는 현재 상황이 썩 좋진 않았고 에도라의 움직임도 점점 심상치 않아 여기까지 손을 뻗게 둘 순 없었다.

    더구나 그들이 정혁에게 거는 기대는 크다. 그가 이 정도로 개박살 난 것을 보여 줬다간 앞으로의 전투에 있어서 사기 증진에 하등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그들의 극약처방이 도움이 되었는지 정혁은 잃었던 정신을 금방 되찾았다.

    그는 에드가가 치유되고 있는 것을 보곤 한숨 돌리며 자신의 양손이 정상적으로 움직이는지 확인해 보았다. 뚫린 어깨도 힘이 들어가지 않던 손도 어느 정도 회복된 것 같았다.

    “어떻게…… 날 찾은 거야?”

    정혁이 이프에게 물었다.

    이프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안젤리나를 슬쩍 돌아본 뒤 말했다.

    “이래봬도 안도리니에서 제일가는 암살자였다구요. 당신 흔적 하나 찾는 거 일도 아니지.”

    “거 참, 말투 진짜.”

    “뭐? 이제 그 무서운 엔트 양반도 없고.”

    “난 안 무섭고?”

    “원래 관계라는 게 그런 겁니다. 직속 상관이 지랄하는 게 더 무서운 법이지요.”

    정혁이 헛기침을 하며 웃자 이프가 그의 어깨를 탁탁 때리며 말했다.

    “헛소리는 그만하고. 솔직히 저는 당신이 궁금한 게 아니라 저쪽이 더 궁금하거든요?”

    정혁은 이프의 타격에 극한의 고통을 느끼며 몸을 움츠렸다가 이프가 안젤리나를 가리키자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불렀다.

    “안젤리나, 대답해 봐요. 당신은 왜 여기 있는 겁니까?”

    안젤리나는 정혁과 이프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그를 찾고 있었어요.”

    “……그? 아, 저 로브의 남자 말입니까?”

    정혁이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한’을 로브의 남자라고 지칭하며 말을 꺼냈지만 안젤리나는 싱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네, 한을 찾고 있었죠.”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한이라는 말에 이프는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추임새를 참지 못한 듯 입을 씰룩거리다가 말했다.

    “근데, 진짜 어떻게 그런 존재가 있을 수 있어? 온몸에 모든 털이 다 곤두서는 느낌은 처음이었다니까? 그 공간 자체가 그냥 완전히 녀석에게 압도되어서 우리 같은 살아 있는 존재들은 움직이지도 못했을 거야. 그, 알잖아요? 그, 뭐냐. 맹수 앞에 서 있으면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로 온몸이 굳어지는 느낌?”

    이프, 얘는 진짜.

    보고 있으면 참 유르겐 냄새가 나는 녀석이다.

    이프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딱 그냥 심장이 멈추는 것 같이 있었는데 겨우 정신 줄 잡고 우리 대장님하고 저기 도마뱀하고 끌고 온 거잖아요. 안젤리나 님 덕분에 겨우 같이. 아니, 근데 지금 여기 둘은 그 사람하고 싸운 거예요? 햐, 진짜 대단하다.”

    “이프…… 나 진짜 궁금한 건데…….”

    “……네?”

    “안도리니에서는 말을 안 했던 거지……?”

    “아…… 뭐……. 네…… 뭐…….”

    안도리니라는 단어가 나오자 이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정혁은 옅게 웃으면서 안젤리나를 바라보았다.

    안젤리나는 그가 현재 상황에 대한 그녀의 족적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곤 입을 열었다.

    “저는 사실 오래전부터 욘마곤을 위협하는 여러 세력들의 뒤를 밟아 왔습니다. 물론 주요 타깃은 이프와 같은 안도리니의 특임대 놈들이었지만요. 그러다 최근 들어서 당신네들이 나타나기 전부터 검은 말 조직이라는 자들이 욘마곤에 불쾌한 흔적을 남기고 다니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의 만행은 제논이 본격적으로 욘마곤에 발을 들이면서 더 심해졌어요. 당신들은 눈치채지 못했겠지만요.”

    “왜지?”

    “당신들의 관심은 욘마곤의 대지가 아니었으니까. 어떻게 하면 악마들을 물리칠까? 어떻게 하면 안도리니나 에도라를 집어삼킬까. 저는 그런 거 관심 없습니다. 그저 내가 밟고 있는 이 아름다운 땅 욘마곤의 전역이 늘 푸르고 생기 있기를 바라요.”

    “거, 참 엘프같은 마인드네요.”

    이프가 거들자 정혁이 이프에게 눈살을 찌푸렸다.

    이프는 입을 꾹 닫고 고개를 숙였다.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함구하던 자연의 존재들도 당신들이 욘마곤으로 넘어오면서 자의든, 타의든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으니까요. 무려 바람과 물의 정령왕이 전쟁에 함께하는데 다른 자연의 존재들이 가만히 있을 순 없겠죠. 저는 계속해서 욘마곤을 순찰했습니다. 매일 보는 곳들이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어디가 달라졌는지 정확히 알 수 있어요. 그렇기에 검은 말 조직들이 욘마곤의 어디를 계속해서 건드리고 있는지 알았죠.”

    “어디?”

    “욘마곤에는 마나석 동굴 많은 마력이 자연적으로 솟아나는 곳이 있습니다. 사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곳이기도 해요.”

    “호른……?”

    이프의 말에 안젤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호른의 마나 폭포는 이미 가뭄으로 메말랐잖아요?”

    “그렇죠. 하지만 그건 호른이 자생하기 위한 방법을 취한 거였어요. 호른은 지하로 물길을 옮겼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더 많은 마나를 대량으로 타이런 대륙의 심장부를 향해 쏟아 내고 있어요.”

    정혁 역시 처음 듣는 말이었다.

    “검은 말 녀석들은 호른을 어떻게 알고……?”

    “글쎄요. 참 아이러니했던 것은 욘마곤의 고등 존재들 말고는 호른의 지하 폭포로 들어가는 입구를 알지 못합니다. 들어가려고 하더라도 분명히 자기를 증명하는 절차를 거쳐야 하죠. 마나석 동굴도 경험해 보셨겠지만 치열하잖아요?”

    정혁이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호른도 마찬가지인데 그들은…… 이상했어요.”

    “이상했다?”

    “마치 전혀 어떤 것도 제약받지 않는 자들처럼 당당하게 호른의 지하 폭포 입구를 자연스럽게 들어갔습니다.”

    그럴 수밖에.

    검은 말 조직들은 이제 더 이상 거리낌이 없을 것이다.

    시스템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기 때문에 설정의 틀 안에서 백신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했어야 했지만 이는 리셋이라는 결과를 향한 걸음일 때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지금의 리셋은 결과값이 다르다.

    세계의 전복과 재설정.

    완전한 파괴.

    그러니 그들도 시스템의 제약에서 벗어나 명령받은 대로 어떤 필요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계속해서 거리낌 없이 일처리를 해 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각각 다른 모습으로 변해 나왔어요. 더 강해졌다고…… 할까요?”

    “다른 모습이라면 정확히 어떤 건가요?”

    “호른의 모든 마나를 집어삼키고 나온 그들은 각각 손에 마스크를 쥐고 있었는데 거기엔 이전에 없었던 영어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놈은 저를 발견하기까지 했죠.”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안젤리나를 발견했는데도 죽이지 않았다고?

    정혁은 의문을 품고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저를 발견했지만 그는 조용히 윙크를 보내곤 얼굴에 마스크를 썼습니다. 마스크에는 E……라고 각인되어 있더군요.”

    “E라고……? 아니, 그럴 리……가?”

    ……아니다. 그럴 수 있다.

    정혁이 안나에게 들었다.

    E는 소멸했지만 저들은 새로이 그를 대체할 자들을 생성해 내는 능력이 있다고.

    언제든 더 강한 검은 말 조직원들이 다시 마스크를 쓰고 나타날 수 있다고.

    그녀의 말에 따르면 이전에 리안과의 혈투 속에서 소멸한 검은 말 조직의 지도부가 호른의 지하 폭포 속 농도 깊은 마나를 통해 재생성되어 조직에 합류했다는 건데, 여기까지는 알겠다 싶으면서도 왜 E는 안젤리나를 발견했으면서도 적대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던 것일까?

    왜일까?

    어쩌면, 정말 어쩌면.

    “그가…… 본래의 기억을 가지고 있을 수도…….”

    정혁의 중얼거림에 안젤리나가 가만히 그를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들을 이끌고 사라진 자. 그자가 바로 한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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