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65화 (165/200)
  • ◈165화

    로브를 벗자 가면이 드러난다.

    볼 부분에 A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정혁은 그가 검은 말 조직의 가장 높은 직위에 올라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안나에게 들은 바로 검은 말 조직의 지도부는 이제 A밖에 남지 않았다고 했다.

    리안과의 전투에서 모든 것을 쏟아부은 탓에.

    안나는 그러면서도 의문을 함께 가졌다.

    그들이 이 마지막 때에 너무 큰 전력 손실을 일부러 한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마치 스스로 허점을 노출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불편해했었다.

    사실 제논도, 그리고 에이드윈도

    당장에는 타이런 전체를 수복하고 전력을 응집시켜서 재빠르게 오아시스를 타격할 방법을 찾고 있을 뿐 누구도 검은 말 조직에 대한 상황과 그 뒤의 세력을 염려하고 있지 않았다.

    만약에 그들이 정혁을 건드리고 리안을 건드린 이후 적극적으로 활동했다면 날을 세워 파악해 보았겠지만 오히려 그들은 잠잠했다.

    이것이 그들이 노리고 있던 부분이었을까?

    안도리니 뒤에 붙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렇게 직접적으로 제논의 수장을 공격하려는 타이밍을 재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한’은 악몽의 비수를 바닥에 꽂고 얼굴에 손을 가져가 마스크를 벗었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정확히 눈에 들어왔다. 맞다. 정혁이 기억하고 있는 그 얼굴.

    얼음장 같이 차가운 얼굴빛에 정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눈매와 눈동자.

    높은 콧대에 얇은 입술.

    정혁은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코웃음을 흘렸다.

    “웃긴가?”

    정혁의 웃음에 한이 냉소적인 말투로 그에게 물었다 .

    “웃기지.”

    정혁이 받아치자 한이 자세를 고쳐 잡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곤 가만히 정혁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곳엔 무엇 때문에 왔지? 멍청하게. 여기가 무덤이라는 걸 알고 온 건가?”

    “글쎄, 그랬다면 왔겠냐?”

    “여전히 건방지군.”

    한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하곤 한 손으로 악몽의 비수를 쥐어 정혁의 왼쪽 어깻죽지에 가져다 댔다.

    “난 쥐뿔 아무것도 없으면서 건방진 놈들이 제일 싫어.”

    비수의 끝날이 천천히 정혁의 어깨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정혁은 고통스러웠지만 입술을 깨물고 비명을 가슴에 삼켰다.

    한은 흥미롭다는 듯이 비수에 힘을 주면서 정혁의 두 눈을 똑똑히 바라보았다.

    비수가 어깨를 뚫고 거의 다 들어갈 때까지 정혁은 단 한 번의 비명도 허락하지 않았다.

    “너도 제정신은 아닌가 보구나.”

    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대쪽도? 괜찮지?”

    “좋을…… 대로…….”

    정혁이 웃으며 대답하자 나머지 악몽의 비수가 반대쪽 어깨를 똑같이 꿰뚫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정혁은 고통을 참으며 녀석의 모든 악랄한 별칭들을 다 떠올렸다.

    이 새끼 그 새끼가 맞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새끼 말이다.

    정혁이 알고 있는, 기억하고 있는, 스스로라고 믿었던 한은 손톱의 때만큼도 정확하지 않았다.

    실제의 한은 상상을 초월한다.

    기억으로 담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냥 본질적인 악함, 잔인함, 그 자체였다.

    고통 속에서도 정혁은 마음속에 한 가지 의문을 품게 되었다.

    왜?

    이 녀석은 왜 이 노래하는 화산 엔듀라곤에 홀로 있었을까?

    “보기 좋게 요리되고 있구나.”

    한이 나머지 비수 역시 동일하게 꽂아 넣고 나자 만족했다는 듯이 손을 비볐다.

    정혁은 암석에 양 어깨를 박힌 모양새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한……?”

    “그래, 뭐 고통을 이만큼이나 참았다면 내가 너의 말을 어느 정도 들어 줄 요량은 있다.”

    “왜…… 여기 있지?”

    정혁의 말에 한은 고개 숙인 정혁의 턱을 들어 올려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몰라.”

    “모른……다고?”

    모른다?

    왜 이곳에 왔는지 모른다?

    “알다시피 나는 내가 하는 행동에 이유를 붙이지 않아. 저 쓰레기 같은 녀석이 왜 갑자기 젠트라의 힘을 얻어서 여기에 왔는지도 모르겠고 거기에 괴상한 대장장이는 왜 또 따라왔는지 모르겠고. 근데, 너 대장장이는 맞는 거냐? 이건 어떻게 얻은 거야?”

    한이 정혁의 곁에 떨어져 있던 단검 두 자루를 들고 빙글빙글 돌리며 물었다.

    “그리고 너의 움직임이 나와 상당히 비슷하던데? 대장장이라기보다는 암살 계열의 도적과 비슷했단 말이지? 왜지?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뭔가, 이상했다.

    이 녀석은 이제까지 검은 말 조직원들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확인이 필요했다.

    “검은 말 조직에 대해서 알고 있나?”

    “검은 말? 그건 또 뭐……?”

    정혁의 말에 한이 피식 웃다 말고 갑작스럽게 정색하곤 시선을 돌려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양 손등에 새겨진 검은 말 조직의 문양, 앞발을 들고 곧 달려들 것 같은 말 문양이 순간 반짝이며 빛을 발했다.

    한의 얼굴이 몇 번 구겨졌다 펴졌다를 반복하다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는 다시 정혁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건 또 뭔데?”

    정혁은 깨달았다.

    이 녀석은 지금 자신의 신체를 온전히 자신이 통제하고 있지 않다.

    마치 무언가에 저항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늬안에 대해서 알고 있나?”

    “아? 소리 지르는 미친년 말하는 거구나? 아직 안 죽었나?”

    “……지금은 제논에 속해 있다.”

    “……제논? 그 카탈 외곽의 떨거지 집단 말하는 거지? 김창수……였나?”

    한의 기억은

    확실하게 과거에 멈춰 있다.

    이 녀석은 지금 이곳에서 깨어난 것 같다.

    그렇다면 이 녀석의 몸은 이제까지 누가 소유했다는 것인가?

    오아시스가 검은 말 조직을 통해 강제 점유하고 있던 걸까?

    아니, 한은 플레이어일 텐데, 플레이어의 몸까지 그들이 강제로 점유할 수 있다는 건가? 어째서?

    “너, 신과 한바탕 했다며?”

    “……소문이 빠르구만? 그렇지 한바탕 했지, 그리고 분명 뭔가 엄청난 힘에 의해서 튕겨 나갔던 것 같은데 눈 떠 보니 여기네? 다짜고짜 공격한 건 네놈들이었고?”

    한이 지루해졌다는 듯이 하품을 하며 양손으로 악몽의 비수를 눌렀다.

    좀 더 깊이 비수가 박혀 들어왔지만 정혁은 눈을 질끈 감으며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왜 네 몸에 그 이상한 문양과, 그 이상한 마스크와, 이상한 복장에 대해서 의문을…… 의문을 갖지 않지?”

    정혁의 말에 한은 가만히 자신의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양손과 복장까지.

    그는 뭔가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그러곤 가만히 정혁을 보면서 말했다.

    “너, 역시 뭔가를 좀 알고 있구나.”

    “……하.”

    정혁이 되레 답답하다는 듯이 녀석을 쳐다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한의 실력이라면 정혁이 큰 범주에서 착각하고 오해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 녀석이 얼마나 또라이인지는 정확히 알고 있다.

    그래, 그것도 시간의 흐름을 통해 조금 탁해졌다 치더라도 그의 기억보다 더 덜 또라이 같아졌다곤 말할 수 없다.

    녀석은 진짜 미친 또라이다.

    앞뒤 분간 못 하고 죽이고 찢는 데만 목적을 가진 이 미친 살인광한테 자신에게 벌어진 일과 자신이 이용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납득시키려고 해 봤자 미친 소리로 치부되고 되레 자신의 몸이 찢길 것이 뻔하다.

    어떤 오묘한 상황으로 인해 우연하게도 본래의 자아가 깨어난 것 같지만 녀석은 다시 그들에 의해 심연 속으로 가라앉을 것이다.

    노력해서 진실을 알린다 해도 하등 쓸모없는 행위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지독한 상황을 마주하게 했던 ‘그’의 생각은 무엇일까?

    그의 계획은 무엇일까?

    정혁은 믿고 있다.

    그가 죽을 곳은 이곳이 아니다.

    엔듀라곤으로 가라고 한 것은 그를 보내고 계획한 ‘그’다.

    신이었고 젠트라였으며 다섯 번의 리사이클 속에서도 철저하게 미래를 대비했던 자가 이곳에서 정혁을 죽게 만들 리 없다.

    그의 계획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그렇다면 지금 정혁은 무엇을 위해 이곳에서 ‘한’과 마주하고 있을까?

    정혁은 자신의 양 어깨에 박힌 악몽의 비수를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려 보고 있는 이 미친놈을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마음 속에 한 가지가 스쳤다.

    만약 이 녀석이 자신이 자신의 몸을 온전히 컨트롤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개입을 통해 움직여 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어떨까?

    물론 상식이 통하지 않는 미친놈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에 의심의 조각 하나만 심어 줄 수 있다면 말이다.

    정혁이 아는 한은

    게임을 게임답게 즐기고 싶었던 남자였다.

    자신의 정의가 지독하리만큼 독선적이고 잔혹했을 뿐 시스템의 개입이나 불필요한 연합을 통해 특수 세력이 힘을 쥐고 흔드는 세계가 되는 것을 증오했던 자다.

    그런 그가 만약에 현재 자신의 상황을 조금이나마 깨닫게 된다면, 그 의심은 그의 심장을 쥐고 흔들 좋은 매개가 될지 모른다.

    정혁이 날고 기어도 저 녀석을 지금 이길 수는 없다.

    그 누가 와도 그를 이길 수는 없다.

    그를 이길 수 있는 자는 그 자신뿐이다.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통제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그 이후는…… 그 이후에 생각하고 그의 힘이 검은 말 조직의 이익을 위해 쓰여서는 절대 안 된다.

    그렇게 둘 수 없다.

    “지금이…… 언젠지는 알고 이러고 있는 거냐?”

    “……?”

    한이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 했다.

    “내가, 누군지는 알고 이러는 거냐고.”

    정혁의 말에 한이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존나 약한 쓰레기지 뭐. 기억하고 싶은 대상도 아닌데?”

    한이 양손의 검지손가락으로 악몽의 비수 손잡이 끝을 꾹 눌렀다.

    짜릿한 고통이 정혁의 정신을 뒤흔드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정혁은 다시 한번 힘을 내서 외쳤다.

    “이 멍청한 자식아! 정신 차리고 똑똑히 주변을 봐! 네가 지금 처한 상황의 이질감을 느끼라고 이 병신아!”

    “이 새끼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정혁의 고함을 듣던 한은 한숨을 내쉬며 악몽의 비수를 움켜쥐고 정혁의 몸을 가로로 갈라 놓으려는 듯 힘을 주기 시작했다.

    그때 한의 몸이 연기처럼 사라지며 악몽의 비수 역시 정혁의 몸에서 사라졌다.

    그는 어느새 마스크를 쓰고 로브를 덮은 채로 처음에 자리했던 화산 심장부 정중앙에 위치했다.

    “……시간을 끌더니…… 잔재주를…….”

    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방에서 순식간에 엘프들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정혁의 곁에는 은신으로 몸을 숨기고 있던 아린이 왕의 검을 바닥에 꽂으며 등장했다.

    “선조들이여…… 저자에게 죽음을!”

    아린의 고함과 함께 목걸이에서 빛이 발현되더니 엘프들이 일제히 한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한은 형체 없는 적들과 싸우며 지속적으로 아린과 정혁의 곁으로 다가오려 했다.

    그러나 마치 이 화산 심장부를 가득 메우고도 남을 것 같은 엘프 군대의 산발적인 공격은 영혼의 형태인 그들이 겹쳐지고 겹쳐져서 더 큰 데미지를 지속적으로 한에게 입히고 있었고 베고 베고 베어도 사라지지 않는 그들의 군세 앞에 한은 점점 더 큰 짜증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너…… 너……!”

    한이 싸움 중간에 정혁을 똑바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나 알지? 난 한 번 물면 절대 안 놓쳐!”

    정혁은 긴장이 풀리자 정신을 점점 잃어 가면서도 저 소름 돋는 한의 외침에 피식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알지…… 새끼야, 내가 제일 잘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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