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곳곳에서 화염이 피어오르는 이곳, 엔듀라곤 화산 내부의 화산 심장부라는 거대한 공간.
주변의 벽들 사이로 용암이 흘러내리고 심장부 여러 곳에는 암석들이 솟아올라 있는 이 덥고 불쾌한 곳에서 정혁은 어떤 암석에 처박혀 몸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아득해져 가는 정신에 이 더운 공기가 더해져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라테가 있었다면 나았을까?
에고 장비들이 양도되면서 정혁에게는 이제 칭호 효과도 남지 않았다.
세계의 마지막 퀘스트를 완수했다면 게임 클리어가 되어야 정상이거늘 정혁에게는 오히려 더 큰 디버프 효과만 남겼다.
물론 신체 능력이 달리는 것은 아니었다.
정혁의 대장장이 능력은 숙련도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채광 활성화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면서 비약적인 능력치로 상대를 압살하는 것은 여전히 가능했다.
그의 두 망치는 강렬한 마나를 기반으로 더욱 강한 힘을 발휘했고 단검 젠트라를 쥐면 그 힘은 증가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이 먹히는 상대가 아니다.
로브를 입은 남자.
그는 지금 에드가의 복부를 그어 올렸다.
에드가는 무릎을 꿇은 채로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정혁은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벽에 기대어 앉았다.
그러곤 자신에게 다가오는 남자를 바라보며 거친 숨을 뱉었다.
이 정도로 몰아붙여진 것은 지금까지의 길을 걸어오면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저 로브를 입은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이 기운은 정혁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힘이다.
저자는 분명
‘그’다.
‘한’ 말이다.
* * *
에드가는 열기에 계속해서 칭얼댔다.
뜨거운 것보다는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뿐더러 자기 존재를 세계에 명확히 드러낸 뒤로 자유롭게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다닐 수 있었기 때문에 이젠 오히려 인간의 모습으로 오래 있는 것을 불편해했다.
그러나 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그들이 화산 심장부로 돌입하자 이내 경직되었다.
화산 심장부 전체를 압도하는 기운이 그곳에 가득했다.
정혁은 젠트라를 쥐고 마나의 흐름에 집중했다.
화산 심장부 전체에 부유하는 마나는 무겁게 침전되어 흐르고 있었는데 유독 한 부분에 부딪쳐 맴돌고 있었다.
그것은 사람의 형태로 서 있었고 정혁은 엄청난 은신 기술을 가진 실력자라고 생각했다.
그때까지도 그자에게서 풍기는 알 수 없는 익숙함에 의문을 품을 뿐이었다.
그러나 에드가는 그 의문을 확인하고 싶어 했다.
“어때?”
에드가가 검을 빼들었다.
정혁은 에드가를 바라보았다.
녀석은 사냥감을 발견한 야수처럼 맹렬한 투기를 보이고 있었다.
“맞는 것 같지? 가짜 양반?”
정혁은 녀석의 말투에 혀를 한 번 차면서도 속으로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여 뭐라 대답할 수 없었다. 정말 ‘그’일까?
“매운지 짠지는 찍어 먹어 봐야 알겠지!”
에드가를 말릴 수 없었다.
그는 바닥에 균열을 만들 만큼 강렬하게 지면을 박차며 순식간에 허공을 향해 검을 가로 그었다.
허공에서는 철과 철이 부딪칠 때 피어나는 열꽃이 사방으로 퍼져 오르며 동시에 에드가의 옆구리 쪽에서 또 한 번 철이 부딪치는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에드가는 충격으로 뒤로 밀려났고 허공에서 사람의 형상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로브를 입은 남자였다.
그는 양손에 단검을 쥐고 있었는데 정혁은 단박에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한의 유일한 무기.
악몽의 비수.
정혁은 머릿속에 비상 알람이 울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 기운, 이 기세.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에드가는 검을 부딪치며 전신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가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진짜 적수, 인생을 전부 걸 수 있을 만큼 짜릿한 경험을 선사해 줄 최고의 적.
그가 다시 자신의 눈앞에 나타났다는 사실을 말이다.
에드가는 자신에게 부여된 젠트라의 힘을 이용해 몸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두 눈이 용안으로 변화하고 외부에 드래곤의 외피로 구성된 갑옷들이 천천히 입혀진다.
다시 몸을 틀어 반격을 하려던 그때 에드가는 어느새 자신의 몸이 화산 심장부 외곽에 옮겨져 있다는 것을 깨닫곤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옆을 돌아보았다.
옆에는 거친 숨을 내뱉고 있는 정혁이 피가 흐르는 옆구리를 부여잡고 로브를 입은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죽을 뻔했어, 방금.”
정혁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하자 에드가는 코웃음을 쳤다.
찰나의 순간.
에드가가 용기사의 모습으로 변하기도 전에 남자는 에드가의 목과 심장을 정확히 두 갈래로 찌르려 들었다.
애초에 정혁이 위기를 감지하고 마나를 이용해 시간 정지를 시전하고 있지 않았다면 분명 그는 그 순간에 죽어 없어졌을 것이다.
정혁은 시간을 멈추고 재빨리 에드가에게 다가갔다.
시간 정지는 하루에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의 제한이 있다.
그와 싸워야 한다면 10분으로는 충분치 않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 시간을 쓰면 쓸수록 시스템의 감지에 의해 더 많은 적들이 이곳으로 몰려들 수도 있다.
그는 에드가에게 날아드는 두 악몽의 비수를 치워 내려 했다.
그때 에드가의 심장을 노리던 남자의 오른손 쪽 공간이 비틀어지더니 멈춘 시간 속에서 그의 손이 움직여 정혁의 옆구리를 베고 지나갔다.
몸을 비틀어 피한 덕분에 살았다. 아니었으면 더 깊이 찔러들었을지도 모른다.
정혁은 멈춘 시간조차 그가 뚫어 낼 수 있다는 것에 경악하며 에드가를 급히 이동시켰다.
“방해하지 말라고.”
에드가는 이미 광기에 젖어 있었다.
그는 이런 싸움을 원했다.
한과 다시 대면하는 것은 그의 평생소원이었다.
비록 드래곤의 모습으로 변할 수 없다고 해도 에드가는 이곳에서 그와 전력을 다해 겨루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그의 열망을 익히 알고 있는 정혁은 그를 막아서지 못했다.
불나방 같다.
타 죽을 것을 알면서도 그는 덤비고야만 하는 것이다.
에드가가 다시 그에게 돌진했다.
정혁은 그 사이를 비집고 공격을 이어 간다.
에드가의 두터운 양날검이 방금까지 남자가 서 있는 곳을 빠르게 찔러 냈으나 남자는 에드가의 검 위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곤 연기처럼 사라졌다가 에드가의 턱을 발로 차 올렸다.
에드가는 붕 떠오르는 몸을 한 바퀴 돌려 검기를 사방으로 소용돌이처럼 내보냈다.
정혁은 소용돌이를 피해 사라진 남자의 기척을 찾아 그곳으로 검을 찔러 넣었지만 이내 악몽의 비수와 부딪쳐 튕겨지며 날아드는 발길질을 양손으로 막아 냈다.
비어진 남자의 등을 에드가의 검이 내리찍었다.
그러나 남자는 사라지고 정혁이 되레 그 검에 피해를 입을 뻔했다.
둘의 합은 원활하지 않았다.
엘라나 라테는 정혁과 함께 한 시간이 오래 되었고 그만큼 전장에서 경험한 일들이 많았기에 말하지 않아도 맞아떨어지는 부분들이 있었지만 애초에 에드가는 정혁에게 호의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합을 맞춘 전투 경험도 적다.
또한 지금 에드가는 통제 불능의 상태다.
서로 불편한 시선을 교차하곤 정혁은 재빨리 몸을 뒤로 움직여 그를 찾았다.
정혁이 그를 찾았을 때는 이미 악몽의 비수가 에드가의 오른쪽 허벅지를 긁고 지나간 뒤였다.
에드가가 중심을 잃고 쓰러졌지만 그는 양날검을 집어던지며 남자가 사라진 곳을 찾아냈고 정혁은 그 신호를 놓치지 않고 그곳으로 순식간에 달려들었다.
두 단검이 한참을 공중에서 부딪쳤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람의 움직임은 거의 비슷했다.
정혁의 기억 속에 내재된 한의 전투 스타일이 정혁의 기본적인 움직임에 상당수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한은 이 부분에 조금 흥미를 느끼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자비는 없었다.
정혁은 지면에 닿기도 전에 그에게 걷어차여지며 허공을 날았다가 순식간에 자신의 얼굴 앞으로 달려드는 다음 발길질에 여지없이 타격을 입으며 땅으로 처박혔다.
양손으로 막았음에도 충격이 뒤통수를 뚫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허벅지를 깊게 베였지만 에드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한에게 검을 휘둘렀지만 한은 귀찮다는 듯 성의 없는 움직임으로 그의 검을 피하고 재빠르게 악몽의 비수로 수십 번 그의 신체를 마구 난도질했다.
몇 번을 찌르고 베었는지 세어지지도 않았다.
단단한 드래곤 비늘 재질의 갑옷도 그 명성이 무색할 정도로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에드가의 갑옷은 순식간에 너덜너덜해졌고 그는 그대로 몸에 힘을 잃은 채 무릎을 꿇었다.
‘이 정도였다고……?’
에드가는 생각했다.
그와 살벌한 전투를 벌였던 시절보다 지금의 자신은 강해졌다.
이 강한 힘이라면 그때보다 훨씬 즐거운 경합을 벌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압도적으로 밀리고 말았다.
자신의 힘을 전부 발현할 기회조차 놈은 주지 않았다.
지나가는 개미를 별거 아니라는 듯이 짓밟는 것처럼 자신은 유린당했다.
정혁은 에드가를 잃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럴 순 없다.
정혁은 재빨리 호흡을 가다듬고 시간을 멈춰 다시 한번 에드가에게 달려들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정혁의 곁으로 그가 다가왔다.
“그런 꼼수는 재미없지.”
그는 차가운 말투로 중얼거리고는 정혁의 양 손목을 얕게 베었다.
힘줄이 끊어지면서 손에 힘이 그대로 풀렸다.
그리곤 옆구리를 걷어찬 뒤 그가 암석 깊숙히 박혀 들어가는 것을 보고 에드가에게 다시 움직였다.
암석에서 떨어져 내리며 고꾸라지는 에드가를 바라본다.
정혁은 자신이 큰 착각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억이라는 것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퇴행한다.
대상이 어땠는지에 대한 기억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그는 한이라는 남자가 가진 힘과 잔혹성에 대해서 기억 속 퇴행을 경험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는 오아시스의 모두에게도 마찬가지다.
한이 살아 있다면 말이다.
제논도, 에이드윈도 모두 무엇보다도 그를 경계해야만 했다.
아니, 정혁이 자신의 정체를 알았을 때 한이 살아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에 대한 대비가 우선이어야 했다.
지금부터라면 늦었다.
저 녀석은 더, 더 강해졌다.
사실 모르겠다.
원래 저렇게 강했던 것을 자신의 오만으로 낮췄을지도.
녀석은 어째서 지금 이 순간에 또 나타났을까.
희망이 보이던 이 순간에.
무엇보다도 어깨가 무거웠던 이 순간에 말이다.
이곳에서 쓰러지려고 엔듀라곤에 온 것이 아니다.
이제 완전한 책임에 더 큰 힘을 얻어 보려고 온 것이었다.
녀석은 왜 이렇게 항상 비열한가.
에드가를 정리한 그가 천천히 정혁에게 다가왔다.
정혁은 그가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숙이고 다음 수를 고민해 봤다.
그렇다고 무너질 수는 없지 않은가.
포기할 수는 없다.
놈의 현재가 어떤지를,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지를 계속해서 생각해야 한다.
그때 악몽의 비수 칼날 끝이 정혁의 정수리에 톡톡 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정혁은 그 날 끝에 서린 광기를 느끼며 몸서리쳐야 했다.
그는 날 끝을 옮겨 정혁의 턱 아래에 대곤 그의 몸을 뒤로 젖혔다.
정혁은 힘없이 등을 암석에 기댄 채 그를, 한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