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지금 당장 안나 님과 김창수 사령관님을 봬야겠어요.”
에트론이 유르겐을 돌아보며 말했다.
유르겐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에트론은 천천히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러자 조각난 돌체 역시 공중으로 부유했다.
에트론이 허리춤에서 열쇠 몇 개를 뒤적이다가 손에 쥐자 열쇠가 밝은 황금빛을 내뿜으며 사방을 환하게 만들었다.
에트론은 침을 꿀꺽 삼키곤 허공에 열쇠를 꽂았다.
열쇠가 꽂힌 곳으로부터 빛이 퍼져 나가더니 그 빛은 곧 문이 되어서 어떤 공간을 열었다.
돌체는 천천히 그 공간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는데 공간 안으로 흡수되면서 두 동강 났던 부분이 천천히 메워졌다.
빛이 빛을 붙들고 스태프를 회복시키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앤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가 달려들 기세처럼 몸을 움직이자 에트론이 어울리지 않게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완전히 하나가 된 스태프 돌체는 그렇게 빛 속으로 사라졌고 빛의 문은 다시 닫혔다.
“……대천사장 무기 아니랄까 봐, 휘황찬란하구나.”
유르겐이 중얼거림을 들은 에트론이 싱긋 웃었고 이내 앤에게 날아가 그녀의 앞에 섰다.
“돌체는 이제 영령을 잃어버린 스태프가 된 겁니다. 당신이 아는 그런 에고 장비가 아니라 단순히 사용자의 마나와 효율을 극한으로 증대시키는 천계의 천사장 무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 거예요. 뭐, 그렇다 해도 이 땅에 있는 어떤 스태프보다 강……하겠지만요.”
에트론은 중간에 엘라를 떠올린 것이 분명했지만 이내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며 말을 이어 갔다.
“앤 님의 말씀으로는 영령이 파괴되었다고 봐야 해요. 그러나 이 영령은 주인이 있는 영령입니다. 그 주인이 누구일까요?”
“……돌체……?”
“감히…… 돌체라고 부르셨지만…….”
에트론이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다음부터 그러시면 곤란합니다. 살아 있는 천계의 법도 대천사장 돌체 님에게 이 영령 ‘돌체’는 돌아갔을 거예요. 저 스태프는 이제 돌체라고 부를 수도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걸까요?”
“모르겠습니다. 영령이 되돌아간 건 한참 되었겠죠?”
“네……. 적어도 3년 이상은 되었어요.”
“마계가 중간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마계의 모든 규칙이 무너지고 있는 이 시기에 천계의 시계가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껴요. 보이시나요?”
에트론이 자신의 날개를 펼쳤다.
이전까지는 조금 흐릿했던 그의 날개가 전보다 훨씬 더 선명해져 있었다.
앤이 조심스럽게 에트론의 날개에 손을 가져다 대자 날개가 만져졌다.
“당신 같은 인간들에게도, 중간계의 존재들에게도 천계의 상징이자 권위의 표본인 이 날개가 선명히 보이고 손에 잡히기까지 한다는 것은 오랜 기간 정지되었던 천계의 사이클이 끝에 다다랐다는 뜻이 됩니다. 저는…… 그 안에 있는 하드린을 찾고 싶었어요.”
에트론이 유르겐을 돌아보았다.
에트론은 정혁과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자신과 친밀도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정혁이 사용할 수 있는 천계의 무기가 다양해지고 있었다.
더불어 그는 더욱더 깊이 있는 무기 자체의 능력을 끌어올렸다.
또한 그와 오랜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처음 보는 건방진 유르겐이라는 남자보다 정혁의 곁에 계속해서 남고 싶었다.
하지만 유르겐의 힘과 마나를 본 순간 그는 결국 유르겐에게 자신의 계약 양도를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유르겐의 마나는 천계의 마나와 많이 닮아 있었다.
게다가 자기 스스로 이야기하는 ‘강탈’이라는 개념의 능력은 친밀도가 쌓이지 않은 에트론에게 대천사장의 무기까지 꺼낼 수 있을 만큼의 힘을 발휘했고 유르겐은 심지어 그 무기를 쥐고 사용하려고 하기까지 했다.
정혁의 설득 역시 한몫했는데, 이제 정혁은 나무가 아니라 숲을 봐야 하는 입장이었다.
중간계에서 에트론의 사명은 하드린을 찾아 친구로 남을지 적으로 돌릴지를 스스로 결정해야 했다.
두 눈으로 그의 친우가 어떻게 되었는지 봐야만 했다.
그런 일을 정혁에게 부탁하기엔 그가 짊어지고 있는 이곳의 무게가 너무 컸다.
하드린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부디 천계가 그 전에 움직이길 바랐지만…….
“잃어버린 마지막 조각이 무기고에 채워진 이상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천계가 깨어날 겁니다.”
“……빌어먹을 천사 놈들이 드디어 눈을 뜨는구만.”
“하여간, 저도 천사라니까.”
“아, 넌 예외.”
유르겐이 살짝 윙크를 하며 에트론을 달랬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에트론에게 물었다.
“천계가 깨어나면 중간계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데?”
“대천사장님이 강림하시겠죠…….”
“……돌체가……?”
에트론이 한숨을 푹 쉬며 앤을 쳐다보았다.
“아니, 그렇게 부르시면 안 된다니까, 실례라니까요? 게다가 대천사장님께서 당신이 아는 그 ‘돌체’와 같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요. 전혀 다른…… 상상도 못할 모습일 겁니다.”
“……미안, 미안해요.”
앤은 금방이라도 두 눈에 눈물이 터져 나올 것처럼 빨개진 채로 겨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 이후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지금 안나 님과 김창수 님을 봬야 합니다. 대책이 필요할 거예요.”
에트론이 다시 유르겐의 곁으로 날아가자 앤이 가슴을 움켜쥐고 에트론에게 물었다.
“에트론 처, 천사님! 그래도, 그래도 어쩌면, 아니, 조금이라도 도, 돌체 니, 님께서 저를, 저를 기억할까요?”
에트론이 날아가다 말고 앤을 돌아보며 말했다.
“글쎄요. 한편으로는 당신의 입장에선 기억하시길 바라야 할 거예요. 기억하지 못하신다면 앤 님은 죽음을 면치 못하실 겁니다. 영령이 파괴된 죄는 크거든요. 당신도, 그리고 저에게도…….”
에트론의 목소리에 씁쓸함이 묻어났다. 둘은 앤의 방에서 나왔다.
둘이 나가고 앤의 울음을 참는 신음 소리가 문 밖으로 흘러나왔다.
유르겐이 에트론과 속도를 맞춰 나아가다가 말고 문득 서서 그에게 물었다.
“천사들이 전쟁에 나서면 나는 무기를 쓸 수가 있나?”
에트론이 날카롭게 그를 노려보며 짜증난다는 듯이 소리쳤다.
“지금 그게 중요해요?!”
그러곤 슝 하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자 유르겐은 쩝 하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긁적이다가 이내 총총걸음으로 복도 끝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 * *
“젠장.”
제이크의 곁에 서 있던 작은 천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이크는 생각보다 타격을 입히지 못한 채 동나 버린 마나 미사일 때문에 크게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래도 뭐, 상관없었다.
어차피 선전포고용.
이제는 전면전으로 돌입하면 그만이니까.
안도리니와 함께하고 있는 검은 말 조직의 수하들이 조만간 합류할 것이다.
정혁?
그 녀석도 곧 끝이다.
모든 것은 그분의 뜻대로 이뤄질 것이 분명했다.
우리를 산화시켜 내 자리만 잘 차지하면 그만 아닌가?
지금은 그의 곁에 있던 이 작은 천사의 한숨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할 것 같다. 이젠 천사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이 존재는 날로 날로 더 타락하고 있는 것 같았다.
“왜? 무슨 일이야, 하드린.”
이미 얼굴의 반은 거무죽죽해졌고 천사의 날개는 떨어진 지 오래다.
입고 있는 옷매무새만 천사일 뿐 전반적으로 악마의 형상에 가까워지고 있는 타락 천사 하드린.
녀석 덕분에 아크까지 움직일 수 있었다.
녀석의 세치 혀 덕분에 말이다.
“……돌체, 그놈이 깨어났어.”
“돌체?”
“대천사장 말이야.”
제이크의 눈썹이 움찔했다.
대천사장이 움직였다고? 이는 그들에게 썩 좋은 이야기가 아니다.
천계는 모든 세계가 수복될 때까지 방관하고 묵인해 줘야 한다.
귀찮은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악마들의 압도적인 힘도 천계의 힘 앞에 굴복될 가능성이 높다.
그들의 거대한 물량이 받쳐 줘야 에도라가 신나게 칼춤에 뛰어들 텐데 말이다.
“그놈이 갑자기 왜?”
“몰라, 나도. 근데 느껴져. 보여?”
이제 겨우 하나 남은 녀석의 흐릿해져 가던 천사 날개가 갑자기 진해졌다.
그러곤 날개와 신체가 맞닿은 어깻죽지로 화상 자국이 번져 가고 있었다.
“왜 이러는 건데?”
“지금 나는 천계의 규율을 배반하고 타락해서 악마화되고 있으니까, 천계의 법도가 깨어났으니 그 굴레 안에 있는 나의 남은 천계의 마나가 마계의 마나와 마주쳐 타오르는 거지. 아프긴 하지만 괜찮아. 어차피 변태라는 건 쉽지 않은 법이지.”
하드린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제이크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도움이나 되라고. 마지막까지 불태우란 말이야.”
“너나 잘해, 인간 주제에.”
제이크가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비죽였다.
“각하, 준비되었습니다.”
그의 아래 사령실 내부에서 번잡하게 움직이던 여러 참모들이 제이크에게 보고하던 한 참모의 말과 함께 동시에 멈춰 섰다.
사령실 전면에 모든 스크린에서 일제히 사령실 외부 상황을 비춰 보였다.
수도 없이 많은 병력들과 각종 최신예 장비들이 금방이라도 사방으로 돌격해 갈 것처럼 모여 있었다.
모두가 같은 옷으로, 또한 비장하면서도 광기가 서린 얼굴로 도시의 바깥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들 마치 무언가에 세뇌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의 사이사이로 이질적인 복장의 병력들도 함께였는데 그들이 제이크가 말한 검은 말 조직의 일원들인 것 같았다.
“자, 새끼들아!”
제이크가 마이크를 쥐고 당겨 입 근처로 놓은 채 의자를 길게 빼고 뒤로 젖힌 뒤 두 다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말을 이었다.
“기깔나게 뒤질 시간이다! 이번 건만 해내면 뭐다?!”
[우리에게 자유를! 진짜 숨을!]
사령실 내부로 우렁찬 고함 소리가 쟁쟁하게 들려왔다.
“그래! 가자! 장렬하게 뒤지고 또 뒤져라!”
[우리에게 자유를! 진짜 숨을!]
그 외침과 함께 스크린을 통해 먼지를 흩날리며 사방으로 전진해 나가는 안도리니의 철의 군단을 제이크는 흡족하게 지켜보았다.
“너는 안 가냐?”
하드린의 물음에 제이크는 마이크를 집어던지며 말했다.
“원래 병졸들은 소모품일 뿐이야. 나 같은 진짜는, 진짜일 때 나타나는 법이고.”
“지랄.”
하드린이 피식 웃으면서 한쪽 손을 뻗어 자신의 천사 날개를 잡았다.
날개를 잡자마자 잡은 손이 불길에 휩싸였다.
그러나 하드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있는 힘껏 날개를 뽑아 냈다.
날개는 뽑히자마자 공중으로 흩어져 사라졌고 이내 그 속에서 간악한 악마의 날개가 돋아났다.
그와 동시에 하드린의 덩치가 점점 커지더니 제이크만 해졌다.
그의 전신에 단단한 피부조직들이 돋아나고 두 개였던 악마 날개가 여섯 개로 펼쳐졌다.
제이크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뱉는 하드린을 보며 감탄하듯 천천히 박수를 쳐 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