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60화 (160/200)
  • ◈160화

    어둠 속을 걸어가며 정혁은 엔듀라곤에서 마주할 진실은 또 무엇인지 궁금했다.

    마치 이곳이 모든 비밀의 마지막 열쇠인 양 젠트라는 이야기했었다.

    엔듀라곤의 화산은 ‘노래하는 화산’이라고도 불린다.

    끊임없이 열기를 내뿜는 이 활화산 속에서 가끔 우렁찬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기 때문이었다.

    꼭 그런 노랫소리가 들리고 나면 화산은 용암을 토해 냈다.

    그래서 플레이어들은 그저 화산의 활동 소리가 노랫소리처럼 들리는 것이라고 치부하곤 했다.

    엔듀라곤은 타이런 대륙 한 가운데, 가장 높이 솟은 화산이다.

    주변에 진을 치고 있는 몬스터의 레벨도 상당하며 가까이 가면 갈수록 화염 속성 저항이 없는 플레이어들은 지속 데미지에 노출돼야만 했다.

    그러다 보니 더욱이 어떤 목적이 있지 않는 한 찾지 않는 곳이 되었다.

    정혁 역시 주변의 열기에 목이 따끔거림을 느꼈지만 라테와 계약하며 생긴 ‘염제’의 칭호가 없어졌다고 해도 대장장이인 자신이 이 정도 열기를 버티지 못한다면 그것 역시 말이 안 됐다. 게다가 곁에 있는 에드가가 어느 정도 마나로 정혁을 돕고 있기도 했다.

    정혁은 에드가를 힐끔 보았다.

    그는 이곳에서도 말쑥한 정장 차림이었다.

    정혁은 진즉에 자신이 입고 있던 여러 장비들을 벗어 던지고 거의 내복에 가까운 차림으로 걷고 있는데도 에드가는 아무렇지도 않게 계속해서 그를 따라오고 있었다.

    쳐다보는 순간 더위가 확 밀려오는 것 같았다.

    “안 덥냐?”

    “덥겠냐. 우리는 심장이 뜨거운 용족이야.”

    “용족…이라고?”

    정혁이 어이가 없다는 듯 대답하자 에드가의 두 눈이 번뜩였다.

    정혁은 알겠다는 듯이 손사래를 치며 계속해서 동굴을 걸었다.

    분명 중심부로 진입하고 있는 것은 맞다.

    열기도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고 엔듀라곤 특유의 농도 짙은 마나 역시 짙어지고 있었다.

    마나석 동굴의 폭발적인 마나 중압을 느껴 본 정혁의 입장에선 이 정도는 간지러운 수준이었지만 일반적인 플레이어들에겐 숨쉬기 거북할 수준의 마나였다.

    몇 번의 갈림길을 지나 정혁은 마음이 이끄는 대로 계속해서 길을 걸었다.

    중간중간 어떻게 여기서 서식하고 있는지 모르겠는 몇몇의 고등 몬스터들을 만나 그들을 깔끔히 정리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치 마나석 동굴의 넓은 공터와 비슷한 공간과 느낌을 가진 어떤 장소에 도달했다.

    열기가 토해 내는 뿌연 연기들과 용암 폭포가 자리 잡은 묘한 공간이었다. 그곳으로 한발 내딛는 순간 정혁은 엄청난 마나의 파동에 곧바로 바닥으로 고꾸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 마나는… 너무나 익숙한….

    ***

    “앤이라고 했던가?”

    앤의 방문 앞에 서 있는 남자는 일전에 봤던 유르겐이라는 자였다.

    진중한 모습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꽤나 불쾌한 사람이라고 앤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밝은 구체가 하나 떠돌고 있었는데 그것은 유르겐의 곁에서 좌우로 움직이며 마치 앤을 관찰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무슨 일이죠?”

    앤이 날이 선 목소리로 물었다.

    제논의 전초기지에서 몇 겹의 차단 막이 쳐진 격리소에 붙잡혀 있은 지 벌써 3일이 지났다.

    제논의 땅으로 온 이상 에도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 역시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아니 롬의 의심 가득한 눈을 보기 싫어서라도 에도라로 갈 마음이 전혀 없었지만 그렇다고 제논의 이런 일방적인 통제가 마음에 드는 것 또한 아니었다.

    그렇다고 앤이 특별히 할 수 있는 행동은 없었다.

    마법사는 자신의 한계와 또 가능성을 너무나 잘 안다.

    리안이라는 마법사가 이곳에 있는 이상 자신이 어떤 변수를 만들어 낼 가능성은 전혀 없다.

    다른 이들은 모를지라도 그녀는 안다.

    이 전초기지 곳곳에 뻗어 나간 방대한 범위의 마나 감시선을.

    이곳에 단 하나의 불결한 의도라도 감지되는 순간 리안이라는 마법사가 즉시 그자의 뒤통수로 순간 이동해서 숨통을 끊어 낼 것이다.

    그저 앤은, 아쉽고 두려울 뿐이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곳에 왔으나 결국 그녀의 에고 장비는 되살릴 수 없다는 사실과 더불어 난데없이 드러난 이 세계의 진실까지 알게 됐으니 마음의 중심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모르게 되었다.

    “들어가도 될까?”

    유르겐의 물음에 앤이 고민하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대로 넓고 으리으리하게 꾸며진 응접실이었다.

    커다랗고 아늑한 침대와 딱 봐도 고풍스럽게 조각된 테이블과 의자가 인상적이었다.

    “신경 많이 썼네-”

    유르겐이 휘파람을 한 번 불며 주변을 둘러보곤 빙글 돌아 의자에 앉았다.

    의자는 특유의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앞뒤로 움직였다.

    유르겐은 흔들의자인 것을 깨닫고 몸을 조금씩 앞뒤로 움직여 의자의 움직임에 몸을 맡겼다.

    “용건만 빨리 부탁해요.”

    “뭐, 내가 널 보고 싶어서 온 건 아냐. 나는 개인적으로 여기 있는 플레이어들을 만나는 걸 별로 좋아하진 않거든.”

    유르겐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자 그의 곁에 있던 밝은 구체가 휙 하고 날아와 앤 앞에 섰다.

    구체의 빛이 거둬지고 그 안에서 옅은 날개를 가진 천사가 드러났다.

    앤은 처음 보는 천사의 모습에 흠칫 놀랐다가 신기한 듯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 그렇게 계속 보는 건 인간들 사이에서도 실례 아닌가요?”

    에트론이 앤의 시선에 부담을 느낀 듯 고개를 아래로 내리며 우물쭈물댔다.

    유르겐은 그 모습이 퍽 웃겼는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아, 아 네! 죄송합니다. 천사님.”

    “에트론입니다. 천계의 무기고를 담당하고 있어요.”

    “그러시군요!”

    에트론은 간단히 자기소개를 하고서 다시 앤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마치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말이다.

    “제 느낌이 맞는지 모르겠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어요. 앤… 님에겐 과거 제가 잃어버려서 소멸당할 뻔했던 어떤 무기의 마나가 옅게 느껴져요.”

    “…무슨 소리죠?”

    “참 이상하죠? 앤 님에게 느껴지는 드래곤의 마나는 분명 당신들이 받았다는 용의 가호 때문일 텐데, 그 외에 왜 천계의 마나가 느껴질까요? 이건 아마 저밖에 모를 거예요. 저와 계약한 유르겐 님에게도 천계의 마나는 흐릅니다. 저와 계약 했었던 정혁 님께도 마찬가지로 천계의 마나가 남아 있어요. 마나의 잔향, 특히 천계의 마나는 그 향이 오래 남고 깊이 뱁니다. 앤 님은… 꽤나 오래 그 향에 젖어 있었어요.”

    “이해가 되지 않아요. 무슨 소리를 계속…?”

    “혹시 돌체라는 무기를 가지고 계셨던 적이 있나요? 천계에서만 자라는 천목 비도라 나무로 제작된, 대천사장 돌체 님의 영령이 깃든 무기거든요?”

    앤은 에트론의 말에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마지막 희망일까?

    “…그걸… 어, 어떻게…?”

    앤은 인벤토리에서 두개로 갈라진 지팡이를 급히 꺼냈다.

    어떤 힘도 남아 있지 않은, 그저 바닥에서 주웠다고 해도 믿을 것 같은 모습의 이 나무 지팡이를 에트론은 찬찬히 바라보았다.

    에트론이 곧 뭔가를 찾은 듯 지팡이의 상단부 작은 홀에 자신의 마나를 살짝 주입하자 밝은 섬광이 지팡이 속으로 흡수되더니 지팡이에서 이제껏 볼 수 없었던 빛이 어떤 무늬를 그리며 타고 흘렀다.

    마치 길이라도 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반으로 갈라졌기에 그 빛은 갈라진 곳에서 끝나고 말았다.

    에트론은 입맛을 한 번 다시곤 앤을 올려다보았다.

    “이 무기는 천계에서도 장비라고 말씀드릴 수 없어요. 아마…지금의 저와 같은 형태의 독특한 계약형 에고 장비의 시초였겠죠. 아시겠지만 정혁 님의 에고 장비들은 일반적인 에고 장비가 아니죠. 보통은 한 가지 종류의 장비가 오랜 시간 주인과 교감하면서 스스로의 에고가 발현되거나 혹은 장기간 방치된 장비가 어떤 계기에 의해 에고가 발현됩니다. 그러나 저희는 보시다시피 계약형 에고 장비로 본래의 모습에서 무기화가 가능하게 된 케이스랍니다. 저는 이 과정이 전례에 없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네요. 당신.”

    에트론이 앤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

    “그래서 정혁 님을 찾아온 거군요. 단순히 에고 장비를 가지고 있는 대장장이여서가 아니라 자신과 같은 과정을 거쳐 에고 장비를 습득한 사람이기 때문에요.”

    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유르겐은 흥미롭다는 듯이 몸을 앞으로 당겨 그 둘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렇다면 저 역시 당신에게 꼭 들어야 할 말이 있어요. 이건 매우, 굉장히 중요한 일이에요.”

    에트론이 굳은 표정으로 지팡이를 손에 가득 움켜쥐었다.

    “어떻게 이 땅에서 돌체 님을 뵙게 된 겁니까? 정지된 천계의 대천사장님을요?”

    그때서야 유르겐이 의자를 박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라고?”

    천계의 대천사장이라니…!

    천계는 정지된 지 한참 되었다.

    이는 몇 번의 리사이클 과정 동안 픽스된 부분이다.

    악마들의 침공은 플레이어들에게 다양한 감정을 자극하고 그것을 에너지원으로 삼는 그 녀석들에게 좋은 효과를 주기 때문에 적극 활용하지만 이에 반대되는 개념인 천사들은 그들이 세계를 더 이상 침범하지 않겠다 조약하는 순간부터 오아시스는 그들의 모든 활동을 틀어막았다.

    유르겐과 로만은 사방으로 다시 이 천계를 움직이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았지만 쉽지 않았다.

    일단 천사를 만나는 것 자체가 힘들었고 리안에게 천계로 가는 차원 문을 열 수 있겠냐고 물었지만 뚜렷한 대답이 돌아오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천계의 대천사장을 이 여자가 만났다니?

    그럴 리가 없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변수다.

    “…그가 천계의 대천사장이든 그저, 하나의 지팡이든 저는 상관없었습니다.”

    앤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

    “몰랐다는 건가요?”

    “정확히 말하면 그래요.”

    에트론의 질문에 앤은 고개를 끄덕였다.

    “용의 가호를 받기도 훨씬 전의 일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