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59화 (159/200)
  • ◈159화

    데릭은 서신을 읽은 후에 이번엔 그것을 구겨 버리지 않았다.

    그는 종이를 잘 접어 포갠 다음 손에 쥐고 생각에 잠긴 듯 서 있다가 천천히 주저앉았다.

    그는 벽에 등을 기대고 고개를 숙였다.

    안나, 그녀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수 싸움에 강할 줄은 몰랐다.

    철두철미하다.

    데릭은 결코 정치적 싸움에서 그녀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이 사실을 알면서도 입을 다물어야 하다니.”

    데릭은 자신과 함께하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무엇보다 강한 증오를 가지고 있는 잭슨.

    그가 과연 달라진 데릭의 행동을 납득할 수 있을까.

    영리해야 한다.

    영리해져야 한다.

    영리하지 않고는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

    이제 누가 더 큰 땅을 자치하느냐, 누가 랭킹 1위가 되느냐는 중요하지 않아졌다.

    이제는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자와 그것을 덮으려는 자들과의 싸움, 나아가 이 세계와 저 세계의 싸움이 될 것이다.

    ***

    “떠올려 보세요. 박달수 님께서 가지고 계신 컴퓨터가 예를 들어 작동 불능이 되었다고 칩시다. 우리 그 옛날에 컴퓨터가 고장 나면 블루 스크린? 그런 거 막 떴다고 하잖아요? 그랬다면 박달수 님은 그 컴퓨터를 어떻게 할 겁니까?”

    “…아마도… 어떤 조치도 통하지 않는다면 재부팅하지 않을까요?”

    “정확해요.”

    안나가 박수를 한 번 짝 치곤 말을 이었다.

    “여기 있는 모든 플레이어가 이 사실을 알고 오아시스에 대항한다면 오아시스는 컴퓨터가 고장 난 사람이 하는 대응과 같은 행동을 하게 될 겁니다. 강제 셧 다운이죠.”

    “아니 그것과 리사이클? 그것과는 무엇이 다릅니까?”

    “통제와 통제 불가의 차이에요. 리사이클은 철저히 계획적으로 통제된 환경 속에서 진행됩니다. 대응 절차들이 있고 이를 통해서 최소한의 에너지 손실로 최대의 효율을 만들어 내죠. 그러나 통제 불가로 인한 소위 강제 셧 다운은 오아시스조차 변수를 관리하기 어렵습니다. 컴퓨터도 그렇잖아요? 대개 다시 켜질 거라고 여기며 꺼 버리지만 다시 켜질 수도, 켜지지 않을 수도 있는 거니까요.”

    “그럼 저희 역시 아무것도 해 보지 못하고 그대로….”

    “네. 지금의 모든 기억은 사라지고 또 어떤 형태로 그들에게 이용당하겠죠. 아직은”

    안나가 큰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아직은 오아시스의 대응 플랜 안에서 우리가 맞춰 가며 움직이고 있습니다. 다만 오아시스 입장에서는 이제 더 이상 이런 과오를 범하고 싶지 않겠죠. 자꾸만 리사이클할 때마다 자신에게 반항하는 오류들이 많아지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전체적으로 완전 삭제 과정을 통해 새로 세계를 구축하려는 겁니다.”

    “결론은 같네요.”

    “뭐, 그럴지도요. 그러나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시간이 있는가, 혹은 아무런 시간 없이 어느 순간 블랙아웃이 되느냐 이 기로에 있는 겁니다.”

    “그렇담 데릭도…?”

    “제가 아는 데릭 의장이라면 이미 상황을 납득했을 겁니다. 어느 정도는요. 그렇다면 꽤나 상식적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높아요. 우리의 요구대로 그는 움직여 줄 거고 우리는 원하던 대로 현재 랭킹 1위를 만날 수 있겠죠.”

    “앤을 통해서는 안 되는 겁니까?”

    “그녀는… 글쎄요.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녀보단 데릭 쪽이 조금 더 활용 가치가 높아요. 그는 우리의 적대 세력과 나름의 커넥션을 가지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박달수는 그녀의 통찰력에 놀라면서도 이것이 아마 그녀가 견딘 시간들 속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내공일 거라고 생각했다.

    문득 리안이라고 하는 엄청난 마력의 마법사가 떠올랐다.

    그는 무려 다섯 번의 리사이클을 견딘 자다.

    그렇다는 건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힘과 경험이 쌓여 있다는 말일 터.

    그는 새삼 과거 우리가 모두 벌벌 떨었던 ‘한’이라는 남자에 대해서 의문을 가졌다.

    리안이라는 남자는 왜 오만가지 악행을 저질렀던 한을 그냥 두고 보기만 했을까?

    한이 리안보다 강할까?

    글쎄,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다.

    “일단 기다려 보죠.”

    “데릭 쪽에서 먼저 연락이 올 때까지 말입니까?”

    안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박달수 역시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몸을 돌려 회의장의 문을 향해 걸어갔다.

    문고리를 잡으려던 박달수가 몸을 돌려 안나를 돌아보았다.

    안나가 그와 눈이 마주치곤 고개를 갸웃했다.

    “…그… 드웨이크와는 혹시….”

    박달수는 멀리서도 자신의 한 눈동자에 안나의 동공이 흔들리는 것이 보이자 피식 웃으며 다시 몸을 돌려 낮게 말했다.

    “아닙니다.”

    그는 그렇게 여운을 남기고 회의장을 벗어났다.

    물론 문 앞에서 드웨이크를 마주친 것도 자연스럽게 웃어넘기고서 말이다.

    ***

    [아낌없이 주는 나무시군.]

    창공을 가르며 날아가는 에드가의 등 위에서 에드가의 핀잔 아닌 핀잔을 들으며 정혁은 팔짱을 끼고 앉아 있었다.

    “그냥 가던 길 가자 제발.”

    [넌 무슨 현자냐.]

    “내가 너보단 착하잖아, 이 사이코 용아.”

    에드가가 화난 듯 공중에서 급격히 한 바퀴 돌았다.

    그러나 정혁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비늘 깃을 굳게 쥐고 딱 달라붙어 있었다.

    “너 자꾸 이러면 내가 등에 안장 달 거야.”

    “크릉-”

    에드가의 입에서 붉은 화염이 옅게 새어 나왔다가 들어갔다.

    이제 정혁의 곁에는 에드가뿐이다.

    마지막 전쟁을 위해서 정혁은 자신의 역할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가 대장장이라는 직업을 가지게 된 이유.

    그 본질에 닿은 결론을 짓게 된 것이다.

    정혁이 드웨이크를 마지막으로 에고 장비화했을 때 그는 세계의 가려진 마지막 퀘스트를 완료했다.

    이제 그는 명백히 세계의 적이 되었고 더불어 그는 “세계의 적”이라는 괴이한 추가 칭호를 얻게 되었다.

    이제까지의 모든 칭호는 정혁의 힘을 비약적으로 상승시켜 주었지만 오히려 이 칭호는 정혁의 모든 것을 앗아 갔다.

    [세계의 적]

    - 당신은 이제부터 세계의 적으로 간주됩니다.

    - 시스템이 당신의 존재를 느낍니다. 시스템은 끊임없이 당신을 찾으려 노력할 것입니다.

    - 당신은 바이러스로 인식되어 백신에게 치명적인 데미지를 입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 당신의 에고 장비는 본래의 주인을 찾아가게 될 것입니다.

    - 당신으로 인해 세계의 멸망이 초래될 것 입니다.

    드웨이크를 끝으로 정혁은 이 칭호가 활성화되고서 점점 자신의 에고 장비들과의 마나 연결이 약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는 사실 다른 에고 장비들도 동일하게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 리안과 엘라를 시작으로 정혁은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정혁이 대장장이였던 이유는 사실 이제까지 최전선에서 싸워 왔던 모든 에이드윈들에게 이 마지막 전쟁을 이길 거대한 힘은 인계하는 것이었다.

    대장간에서 에이드윈들은 각자의 마나를 흘려보내 자신의 마나 결이 맞는 에고 장비들과 양도 계약을 맺었다. 라테와 에트론은 여기에 강하게 반발했지만 웃기게도 이 역시 계획된 것이 분명했다.

    로만의 붕대가 감긴 양 손바닥 안에는 가이아의 징표가 새겨져 있었다.

    그가 고난 속에서 당당한 한 명의 에이드윈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가이아의 보살핌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재밌게도 무투가였던 그에게 건틀릿 형태의 무기인 라테는 제격이었다.

    에트론은 능글맞은 유르겐과 마나가 연결되었다는 것이 굉장히 불쾌했지만 이내 유르겐의 능력을 보곤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유르겐은 오아시스의 강탈자.

    그는 그의 칭호답게 많은 것을 ‘강탈’할 수 있었다.

    정혁만이 할 수 있다고 여겼던 천계의 무기들까지 말이다.

    에트론은 그가 열어 준 천계의 무기고에서 유르겐이 정혁처럼 천계의 무기를 꺼내 휘두르는 것을 보고 양도 받는 것에 수긍했다.

    그러나 여기엔 반드시 천계에서 중간계로 타락한 천사 하드린을 찾는데 최선을 다하겠다는 조건이 붙었다.

    안나와 드웨이크는….

    [걔네 둘이 제일 싫어.]

    갑자기 에드가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정혁은 오히려 그 떨림에 떨어질 뻔했다.

    그러면서 피식 웃었다.

    사실 안나와 드웨이크가 왜 마나 결이 맞았는지 모르겠다.

    유르겐도 로만도 다 이유가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드웨이크와 안나 역시도 어떤 연결점이 있다는 건데 안나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드웨이크는 왠지 모를 이상야릇한 기분에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며 헛기침만 뱉을 뿐이었다.

    정혁은 이제 드웨이크에게 ‘주인님’이라고 불리지 않아도 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시커먼 남정네가 주인님이라니.

    다시 한번 소름이 돋았다.

    이번엔 정혁이 부르르 떨자 에드가가 또 한 번 콧김을 뿜었다.

    [엔듀라곤에 다 와 가.]

    정혁은 천천히 느껴지는 열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자신을 태우고 있는 이 화려한 황금빛 드래곤과 양 허리춤에 차고 있는 두 단도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에게 할당된 에고가 없는 에고 장비.

    그리고 언제든 비상하여 하늘에서 공포를 선사하는 드래곤.

    그나마 이 녀석이라도 남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세계의 적이라는 게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아직까진 와닿지가 않는다.

    이제까진 제논의 영토 내에서 보호를 받았기 때문에 잘 모르겠다.

    그러나 온전히 필드로 나와 있는 지금 숙련도만으로 충분히 강한 힘을 가지고 있을 자신이지만 혹시 모르는 상황에서 에드가의 힘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긴, 생각해 보면 이 망나니를 누가 제대로 데리고 다닐 수 있겠는가.

    어딜 보나 정혁만이 가능하다.

    [온다.]

    정혁은 저 멀리서 엔듀라곤의 타오르는 화산 근처를 배회하는 많은 수의 가고일들과 하피들의 자유로운 비행이 어느 순간 정혁과 에드가에게 집중되기 시작했다.

    “세계의 적이라더니….”

    정혁이 웃으면서 목을 풀었다.

    그의 양손에 오랜만에 두 망치가 쥐어졌다.

    번뜩거리는 전력과 타오르는 불꽃이 강렬하게 용솟음친다.

    하피와 가고일의 군집이 마치 벌 떼처럼 에드가에게 날아든다.

    에드가는 용울음을 떨치며 맹렬하게 그 안으로 파고들었다.

    마치 검은 구름에 집어삼켜진 것 같지만 번개와 화염이 계속해서 요동친다.

    하피와 가고일이 유연하게 공격을 시도하지만 에드가의 움직임은 훨씬 빨랐고 정혁의 공격 역시 매서웠다.

    둘은 빈 공간을 만들어 노래하는 화산 엔듀라곤의 측면에 보이는 동굴 안으로 날아들었다.

    그들의 뒤로 재빠르게 하피와 가고일이 달라붙었지만 정혁이 동굴 안으로 모습을 감추자 더 이상 쫓아오진 않았다.

    동굴로 들어가면서 에드가는 자신의 덩치보다 작은 동굴 때문에 급히 인간화했고 정혁은 에드가의 등에서 뛰어내려 바닥에 안전하게 착지했다.

    몸에 덕지덕지 적들의 살점이 붙었지만 더러운 것을 상당히 싫어하는 에드가가 그의 몸에 붙은 모든 지저분한 것들을 전부 마법으로 씻어 주었다.

    정혁은 빙긋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였다.

    그렇게 환상의 짝꿍이 되어 가는 그들이었다.

    정혁은 내심 짜증이 치밀었다.

    줬다 뺐으면 더 기분 나쁘다더니 물론 지금 자신이 결코 약한 것은 아니지만 예전의 그 압도적인 무력, 그러니까 소위 ‘다구리’ 작전을 펼칠 수 없다는 게 기분을 잡치게 만들었다.

    저 정도 수의 적이면 엘라의 나뭇잎 창으로 한 번 싹 쓸고 화염 파도로 밀어 버린 다음 영궁으로 화살 비 한 번 뿌려 주면 될 텐데 말이다.

    정혁은 속으로 입맛을 다시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래 이게 사실 대장장이지.”

    “무슨 소리야, 넌 이미 대장장이에서 한참 벗어났거든.”

    초를 치는 에드가의 한마디에 정혁은 어깨를 으쓱하며 어둠 속을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