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58화 (158/200)
  • ◈158화

    데릭은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날 의외의 장소에서 재회하게 된 박달수에게 몰래 설치한 도청장치를 통해 듣게 된 세계의 진실 앞에서 그는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외곽 정찰을 다녀왔던 잭슨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데릭에게 몇 가지 물었지만 그의 질문이 명확히 들리지도 않았다.

    데릭 역시 수십 번 로그아웃을 시도해 봤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시스템 에러라는 붉은 경고창만이 눈앞을 가득 채울 뿐이었다.

    그는 손톱을 몇 번 깨물며 모든 상황을 복기해 봤다.

    그날, 박달수가 그들을 찾아왔던 날부터 말이다.

    ***

    박달수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들이 앉아 있던 테이블에 앉았다.

    잭슨의 암영검이 박달수의 뒷목에 겨눠졌지만 아랑곳하지 않는 듯했다.

    박달수는 손을 들어 맥주를 한잔 시키곤 손에 끼고 있던 가죽 장갑을 벗어 상처투성이의 손을 슥슥 비볐다.

    그리곤 데릭과 잭슨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데릭은 그가 먼저 뭔가를 말해 주길 바랐지만 묘한 긴장감 속에서 맥주가 나올 때까지 아무 말도 오고가지 않았다.

    데릭과 잭슨은 끊임없이 날을 세우고 박달수를 경계했지만 오히려 박달수는 어떤 반응도 없었다.

    맥주가 나오자 박달수는 잔을 들어 벌컥벌컥 마셔 넘기고는 팔짱을 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황당한 상황에 데릭은 어쩔 수 없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가 서로 겸상할 처지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요.”

    의외의 존대에 데릭의 한쪽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호의일까?

    모르겠다.

    아직은 그가 왜 이곳에 찾아왔는지 아니, 애초에 어떻게 그들의 현재 위치가 발각됐는지조차 모르겠다.

    제논이 강성해지면서 자유 연맹의 잔불 정도는 완전히 무시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 겨우 조금 뜻을 같이 하는 자들이 모이고 있는데, 어부지리를 통해 다시 재기를 이뤄야 하는데 제논이 이 정도로 꼼꼼하게 뒤처리까지 하고 있다는 것은 계산 외의 대응이었다.

    “찾아온 이유를 말해 주시오. 상당히 불쾌하니 말입니다.”

    “수작질은… 슬슬 그만두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수작질?”

    잭슨이 작게 테이블을 내리쳤다.

    괜한 소란은 일으키고 싶지 않다는 의도였다.

    그러나 그의 전신에서 뿜어 대는 강렬한 살기는 이미 주점 전체를 뒤덮고도 남았다.

    “동료애를 버리고 단 한 번에 변절한 네놈이 떠벌릴 만큼 가벼운 일이 아니야.”

    잭슨이 이빨을 갈듯 증오를 떨쳐 내며 강렬하게 박달수를 압박했다.

    그러나 박달수의 눈동자엔 흔들림이 없었다.

    그의 외눈은 여전히 잭슨에게 눈길 한 번 주고 있지 않았다.

    “데릭 의장님. 우리 솔직해 집시다.”

    박달수가 조금 몸을 앞으로 당기며 데릭에게 집중했다.

    데릭 역시 그의 눈동자를 피하지 않았다.

    여전히 자신을 의장이라고 부르는 그에게 역겨움을 느끼면서도 이 기 싸움에서 밀리고 싶지 않았다.

    “정말로 자유 연맹이 무덤에서 기적적으로 부활할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까?”

    “단순히 조롱 따위나 하려고 여기까지 찾아온 겁니까?”

    “아니, 나는 진짜 궁금해서 그럽니다. 당신 꽤 똑똑한 양반이었잖습니까.”

    “…그리고 당신은 꽤나 실리주의적이었구요. 그쵸?”

    “하-”

    박달수가 헛웃음을 치며 다시 팔짱을 꼈다.

    그는 힐끔 잭슨을 보곤 다시 시선을 옮겼다.

    도끼눈을 뜨고 있다고 해도 변하는 것은 없다.

    “코끼리에게 모기 한 마리가 붙었다고 해서 코끼리가 반응이나 하겠습니까?”

    박달수의 물음에 데릭은 싱긋 웃으면서 되받아쳤다.

    “그러나 그 코끼리는 결국 모기를 죽이지 못하지요.”

    “끝내 모기를 죽이지 못한 코끼리는 결국 수도 없이 많은 모기떼에 의해 죽게 될 거고.”

    잭슨이 거들자 박달수는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저는 여전히 당신 두 모기가 윙윙거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습니다만.”

    박달수는 턱에 손을 괴고 몇 번 쓰다듬다가 말을 이었다.

    “제논에서는 은근히 신경이 쓰이나보더군요.”

    박달수는 품을 뒤적이다가 곱게 접혀 제논의 인장이 박힌 종이 한 장을 꺼내 데릭의 앞에 턱 하고 내려놓았다.

    “안나 님의 서찰입니다. 내용은 저도 모릅니다. 읽어 보시죠.”

    “…지금?”

    “예, 문제 있습니까?”

    박달수는 다시 맥주 한 모금을 들이켰다.

    데릭은 그런 그를 힐끔 보곤 조심스럽게 밀랍 봉인을 풀고 종이를 펼쳤다.

    [데릭 의장님 안녕하십니까. 기억하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제논에서 내외 외교와 정책을 담당하고 있는 안나라고 합니다. 카탈에서 타이런으로 거처를 옮기신 이후로 저희 제논은 꾸준히 두 분의 행보를 주시하고 있습니다. 최근 몇 가지 이색적인 행동을 하셨더군요. 아마도 이런 불쾌한 행동들을 통해서 현재 타이런 대륙의 세 세력의 괴멸을 꾀하시려는 것 같습니다만 글쎄요. 저는 마냥 데릭 의장님의 뜻대로 되진 않을 것 같네요. 저희가 계속해서 두 분을 미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염두에 두고 계신 것 같지 않아서 경고차 이렇게 연락을 드립니다. 최대한 정. 중. 하게 말이에요. 앞으로의 일들은 알아서 잘 처신하시기 바랍니다. 부디 의장님과 자유 연맹의 잔존 세력들이 완전한 패망으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간결하면서도 모욕적이다.

    데릭은 종이를 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잭슨은 데릭의 반응을 보곤 인상을 구기며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그러자 박달수가 그의 허벅지를 손으로 내리 눌렀다.

    곧바로 잭슨이 그의 암영검을 박달수의 목덜미에 내리꽂으려 했지만 잭슨은 박달수의 손으로부터 전해지는 강한 압박과 마비 증상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의 당황한 동공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데릭은 잭슨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곤 입술을 깨물었다.

    정확히 그때의 굴욕이 다시 상기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알아서 조심하자 이겁니다.”

    “오만…방자하군요.”

    “저기, 의장 양반.”

    박달수가 한숨을 푹 쉬더니 말했다.

    “그런 말은 보통 자기보다 한참 아래인 자들에게 강력한 힘을 가진 자가 뱉는 말입니다. 근데 지금은 완벽히 다르죠? 잭슨, 당신의 암영검은 이제 시대에 뒤떨어졌네. 우리에겐 염주의 힘이 깃든 무기가 있고 그 힘은 당신의 암영검보다 월등히 강해. 게다가 내가 입고 있는 이 모든 장비들은 전부 희귀 등급 이상의 장비들이야. 자금에서부터 능력까지 모든 것이 한참 뒤처진 자유 연맹의 망령들이 무엇을 더 어떻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박달수가 손을 떼자 잭슨이 끄응 소리를 내며 머리를 탁자에 박았다.

    그는 그렇게 서너 번을 분을 가득 담아 머리로 탁자를 내리쳤다.

    “고삐를 풀어 줬다고 여기지 말길 바랍니다. 여전히 당신 둘의 목숨 줄은 우리 제논이 쥐고 있어요.”

    박달수는 맥주의 마지막 한 모금을 들이켜곤 탁자를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잭슨이 데릭의 신호를 받고 조심스럽게 그의 몸에 최상급 은신 마법이 깃든 도청 장치를 던져 달았다.

    강력한 마법으로 데릭과 연동되어 있어 차단된 공간에서도 내부에 장착된 사람이 있다면 도청이 가능하다.

    박달수가 찾아온 것을 오히려 기회로 만들어야만 했다.

    그것은 등 한쪽에 붙었다가 자연스럽게 녹아들 듯 사라졌다.

    박달수는 뒤를 힐끔 돌아보곤 다시 걸음을 옮겨 주점을 벗어났다.

    ***

    데릭은 자신을 늘 냉철한 판단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료를 쉽게 생각할 만큼 냉혈한도 아니었다.

    그에게 의리는 무엇보다 중요했고 모두를 존중했다.

    자유 연맹은 그의 이런 신념 아래 하나로 뭉쳐 공동체의 이득을 위해 성장했었고 또 그 허점으로 인해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여전히 데릭에게 기대는 사람들을 위해, 그곳에서 함께 생활했던 자들을 위해 데릭은 또 한 번 지도자를 자처하고 최선을 다해 발품을 팔아 왔다.

    겨우 모든 계획들이 어느 정도 아구를 맞췄다고 생각될 때 이런 고민들 따윈 전혀 중요하지 않은 핵심적인 사실이 드러나 버렸다.

    데릭은 자신의 현실 속의 기억과 왜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로그아웃이라는 것을 시도해 보지 않았는지에 대해서 되새겨보았다.

    자신의 어린 시절은 너무나 또렷하다.

    그러나 오히려 오아시스의 초반과 중반까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게다가 왜 로그아웃을 시도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대답도 내릴 수가 없다.

    애초에 사고 자체가 자꾸만 그 질문 앞에서 후퇴하는 느낌이었다.

    알 수 없는 두통이 머릿속을 치고 지나간다.

    이 모든 싸움이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인가.

    그들이 하는 말이, 지금 자신의 상황이 이 세계에 가려진 흑막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활활 타오르던 제논을 향한 분노는 점차 진화되어 가고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하지.

    그때 그의 낡은 원목 집 다락에서 붉은 섬광이 반짝였다.

    이마를 감싸 쥐고 있던 데릭이 고개를 돌려 다락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집엔 저런 마나를 가진 오브젝트가 없다.

    데릭은 의문을 가지고 다락으로 향했다.

    낡은 나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다락을 보니 저 멀리 구겨진 종이가 붉은 빛을 은은하게 뿜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일전에 주점에서 건네받았던 안나의 서신이었다.

    ***

    “부르셨습니까.”

    박달수가 전초기지의 회의장에서 안나를 찾았다.

    안나는 드웨이크와 함께 그곳에 서서 뭔가를 이야기하다가 박달수의 등장에 흠칫 놀랐다.

    박달수는 그녀와 드웨이크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조금 주춤했다.

    “아, 아 오셨습니까.”

    “…네, 찾으…셨다고.”

    조금 달라진 박달수의 말투에 안나는 싱긋 웃었고 드웨이크는 박달수에게 인사를 한 번 한 뒤 뭔가 굳은 모습으로 뚜벅뚜벅 회의장을 나갔다.

    “어떻게 생각은 좀 정리되셨나요.”

    “…뭐, 글쎄. 거기에 대해서는 아직 뭐라 답변드릴 게 없습니다.”

    “하긴, 맞아요. 그게 바로 납득이 되면 이상한 거죠. 아.”

    안나가 손가락을 살짝 들어 입에 댄 뒤 왼손으로 자신의 마나를 응집 시킨 다음 박달수의 몸에 흩뿌렸다.

    그러자 그의 몸에서 도청 장치가 떨어져 나갔다.

    박달수는 그것을 발로 밟아 없애 버렸다.

    “이제 좀 시원하네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계획하신 일이 잘 된 겁니까?”

    “네.”

    “사실 아시지 않습니까. 마스터가 그 이야기를 꺼내기 전 제가 막은 이유는 바로 저 도청 장치 때문이었다는 것을.”

    “그럼요, 알죠. 하지만 그게 목적이었습니다.”

    “…그들이 이 사실을 아는 게 말입니까?”

    안나는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물론, 정혁이… 그런 상태일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지만요….”

    그녀는 한숨을 한 번 쉰 뒤에 말을 이었다.

    “곧 데릭이 저희에게 연락을 할 겁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거예요.”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는 아마 제가 마법을 입혀 놓은 두 번째 서신을 발견했을 테니까요.”

    “두 번째 서신?”

    “두 번째 서신을 읽고서는 저희의 계획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우리는 그를 통해서 어떻게든 그녀와 접선해야 해요.”

    “근데 말입니다. 제가 궁금한 건, 왜 이 사실을 모든 플레이어들이 알아서는 안 되는 겁니까?”

    “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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