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57화 (157/200)
  • ◈157화

    가혹하다.

    정혁이 이끄는 승리는 결국 그의 마지막을 의미하는 것이다.

    정혁이 끝내 우리를 해방시켜 준다면 이는 반대로 그의 파멸을 의미한다.

    이 무슨 모순이란 말인가.

    안나는 눈 한가득 모인 눈물을 가까스로 삼키며 정혁을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정혁은 갑작스레 울컥하는 마음을 겨우 부여쥐었다.

    못 울었다.

    울지 못했다.

    젠트라를 통해 자신의 전부가 부정당했을 때도.

    당황과 어지러움 때문에 감정에 솔직하지 못했다.

    자신의 존재 의미가 대업으로 이어지는 순간.

    그 무게를 견디느라 자신의 마음을 챙기지 못했다.

    그런 그 대신 안나가 울어 주는 것 같아 고마웠다.

    울 것이다.

    언젠가 꼭 마음이 비워지도록 울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참아야만, 대의를 위해서 참아야만 한다.

    “미안합니다. 여러분들에게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서. 저는 제 스스로 이 충격을 가슴에 삼켰습니다. 프로그램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단순하기도 합니다. 주입된 제 목적을 저 스스로 인지하는 순간. 제 앞으로의 걸음은 결정되었으니까요.”

    정혁이 몸을 일으켰다.

    “저는 여기 계신 여러분들의 실질적 해방을 위해 이곳에 있습니다. 이곳에 에이드윈 저들 역시 제논의 가족들, 여기 계신 팀장님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오아시스의 음지에서 싸워 온 분들입니다. 우리의 최종 목표는 오아시스의 붕괴입니다. 그리고 그 걸음을 제논이 함께해야만 합니다.”

    김창수가 큰 숨을 내쉬며 얼굴을 한 번 쓸었다.

    앤은 도대체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었고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아 한참을 바닥만 보고 있었으며 이프는 이 대화의 본질에 접근조차 못하고 있었다.

    “정리해 보면.”

    김창수가 몸을 일으켰다.

    “우리의 현실 세계는 기계들에게 점령당했고 우리의 몸은 기계들의 에너지원이 되어 있으며 우리의 정신을 가두고 있는 곳이 이 오아시스라는 게임이다. 이 사실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자들이 바로 당신들이고. 당신들의 최종 목표는 오아시스의 붕괴다. 거기에 우리 마스터가 핵심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정도인가?”

    정혁은 여전히 자신을 마스터라 불러 주는 김창수에게 감사했다.

    김창수는 리안의 침묵에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참담하군.”

    “이 모든 사실을 모두에게 알릴 순 없어요. 대혼란이 일어날 겁니다. 일단 지금은 타이런을 수복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최대한 제논의 병력들을 많이 살려 놓아야 해요. 이유는 드웨이크가 말해 줬듯 죽음 이후에 깨어난 정신이 받는 고통을 우리 동료들이 받게 할 순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국가의 플레이어들의 죽음에 대해선 어쩔 수 없지만 그들을 빠르게 수복하는 것, 그러니까 저들의 수장을 먼저 쳐내는 것이 모두를 위해 이익일 겁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우리는….”

    정혁이 빠르게 다음 말들을 뱉어 내자 하늬안이 갑작스레 몸을 일으켜 바닥을 보고 말없이 정혁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가 일어난 자리에 눈물 자국이 가득했다.

    하늬안은 곧 정혁이 앉아 있던 의자 앞에 서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 그의 몸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그만. 그만해.”

    하늬안은 잠긴 목소리로 정혁에게 말하며 그의 등을 쓰다듬었다.

    갑작스레 하늬안의 품에 안긴 정혁은 눈앞이 점점 뿌옇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리안이 그들을 보고 몸을 일으켜 말을 하려다 말았다.

    그러곤 몸을 돌려 바깥으로 향했다.

    하나둘 자리를 떠났다.

    안나가 마지막으로 문을 닫고 자리를 떠나자 하늬안의 품에 안겨 있던 정혁은 끝내 고함을 지르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 마음에 담긴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허무를 그렇게 울음으로 토해 내기 시작했다.

    ***

    “우린 이야기를 더 나누도록 하지.”

    김창수가 리안을 붙잡았다.

    리안 역시 그를 따라 어두운 복도를 걸어 작은 방에 도착했다.

    리안이 문을 닫고 들어와 손가락을 하나 펼치며 잠시 기다리라는 신호를 보냈다.

    1분 정도의 정적 동안 김창수는 의자를 꺼내 리안 앞에 두고 자신 역시 반대쪽에 앉았다.

    “다중 결계를 쳤습니다. 이제 이곳은 안전합니다. 일전의 공간에도 역시 시스템이 알지 못하는 경계를 쳐놨었구요.”

    “…철두철미하군.”

    “별의 별일을 다 겪었으니 말입니다.”

    “통성명이나 하지.”

    “저는 이미 당신을 압니다. 김창수. 제논의 길드장. 아마도 이번 시즌에는 그랬죠. 네 번째 시즌에는 포레탈 왕국의 1등 기사였고 세 번째 시즌에는 대부호였습니다. 두 번째 시즌에는 너무 일찍 죽어서 기록도 없답니다.”

    “…허허, 설명이 다소 과한 친구로군.”

    “그랬나요?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는 오아시스의 마법사 리안 에이드윈입니다. 저희 에이드윈들은 다른 이들이 확인하지 못하는 특수 칭호가 붙어 있습니다. 선택을 받았다는 의미의 세계 이름 자체가 붙습니다. 그리고 저희들은 쉽게 설명드려 이 시즌. 시즌이 다음 시즌으로 넘어가는 리사이클 시기에 모든 기억들을 안고 갑니다. 당신들은 기억하지 못하는 그 모든 순간들을 우린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또 다른 에이드윈들이 생겨나죠.”

    “…알겠네. 그럼 지금은 다섯 번째 시즌이라는 거구만. 정혁의 이름에 에이드윈이 붙지 않는 것은 정혁이 말했던 것처럼 자신이 프로그램이기 때문인가?”

    “제가 추측하기론 그렇습니다.”

    리안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김창수가 리안의 눈동자를 깊이 바라보며 한 가지 물음을 던졌다.

    “혹시 자네들은 검은말 조직들과 무슨 연관이 있는가?”

    리안은 그의 통찰력에 조금 놀라며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저희 에이드윈들의 적이죠. 어떻게 보면 오아시스의 백신 프로그램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세계를 조율하고 톡 튀어나온 모난 것들을 없애거나 다듬습니다. 그리고 리사이클의 시기가 올 때 그들이 전면에 나서 이를 주도합니다. 세계를 끝으로 인도하는 거죠.”

    “그래서 그들이 정혁을 지속적으로 노렸던 거군. 잠깐만, 그렇다는 건.”

    “세계의 끝이 도래했냐는 질문입니까?”

    “…그런가?”

    “정혁이 깨어나고 성장해 가면서 이미 초침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저희는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보고 있구요.”

    “마지막이라면?”

    “이제 더 이상의 리사이클은 없을 겁니다. 오아시스는 이 세계를 폐쇄할 거예요. 다음에 어떤 방식으로 인류를 사용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런 방식은 아닐 겁니다.”

    “왜지?”

    “그는 그 스스로 자신의 시스템에 허점이 많다는 것을 학습했고 리사이클로 계속해서 보완해 왔지만 결국 고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요.”

    “그 증거가 정혁이고?”

    “예. 맞습니다. 첫 번째 리사이클 때 살아남은 저와 저를 살린 ‘그’. 그리고 ‘그’의 힘은 그때부터 저희들을 통해 계속해서 오아시스를 곤란하게 만들어 왔습니다. 결국 오아시스는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한 치명적인 오류를 지금에서야 납득하고 폐기 처분을 하려 하고 있는 거죠. 그러나 쉽진 않을 겁니다. 우리에겐 정혁이 있고 그에겐 ‘그’의 온전한 힘이 담겨 있으니까요. 어쩌면….”

    리안이 고민하듯 허공을 응시하다가 다시 김창수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우리 인간들이 결국 기계를 이길 순 없나봅니다. 이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는 우리도 결국 프로그램의 힘에 기대야 하니까요.”

    “정혁 역시 프로그램이라면… 오아시스가 소멸할 때 그도….”

    김창수가 차마 다음 말을 꺼내지 못하자 리안은 착잡한 표정으로 몇 번 고개를 끄덕였다.

    “참, 아이러니하구만.”

    “하지만.”

    리안이 갑자기 목소리 톤을 조금 높이며 확신이 깃든 어투로 말을 이었다.

    “저는 분명히 무언가가 더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무언가?”

    “예. 정혁을 위해 준비한 ‘그’의 계획엔 분명 무언가가 더 있을 거예요.”

    “도대체 자네가 말하는 ‘그’가 누군가?”

    “…음… 그는 오아시스의 첫 번째 알파. 첫 번째 백신 프로그램 ‘A’를 지칭합니다.”

    “A?”

    김창수가 가만히 생각해봤다.

    그들과 싸웠던 검은말 조직에게는 이니셜이 있었다.

    리안이 말한 것처럼 그들이 백신이라면 그 백신 넘버가 알파벳 이니셜이 되는 것이고 A는 그들의 대장 격일 터.

    게다가 오아시스의 첫 번째 시즌에 첫 번째 백신이라면 월등히 강한 존재였을 텐데 어쩌다 그 존재가 인간의 편에 서게 된 것일까.

    “당신의 궁금증은 이해되지만 이 이상은 시기상조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사령관, 한 가지는 꼭 기억해야 해요.”

    “…뭔가?”

    김창수가 침을 한 번 삼키며 리안에게 물었다.

    리안은 그에게 몇 마디를 건넸고 이는 김창수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 줄 수밖에 없었다.

    리안이 그 방을 나왔으나 김창수는 한참을 방에서 나오지 못했다.

    ***

    푹 자고 일어난 기분이었다.

    정혁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말이다.

    어느새 그는 자신만의 공간인 오아시스의 대장간에 누워 있었다.

    라테가 지펴 놓은 따뜻한 모닥불이 난로 속에서 타닥거리는 소리를 내며 타고 있고 그 옆에 작은 정령 모습의 라테가

    웅크린 채 불꽃들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의 곁으로 에트론이 대 자로 뻗어서 자고 있다.

    엘라의 기운은 이곳에서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아마 리안과 함께 있을 것이다.

    저 멀리 희미하게 에드가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이전의 말끔한 정장 차림의 조와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둘을 보니 이 긴 여정의 첫 시작의 순간을 떠올리게 된다.

    절망과 좌절 속에서 시작한 걸음이 아이러니하게도 희로애락을 거쳐 또 다른 절망과 좌절의 순간으로 인도하고 있다.

    정혁은 이 사실이 웃퍼서 작게 실소했다.

    담요가 몸을 덮고 있었다.

    정혁은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그의 어깨에 손길이 닿았다.

    “일어나셨습니까.”

    익숙한 목소리에 돌아보니 드웨이크가 곁에 있었다.

    정혁의 기괴한 표정을 눈치챈 드웨이크가 멋쩍게 웃으면서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 뭐, 그렇죠. 예, 이런 타이밍엔 아름다운 여성분께서 딱, 예? 그게 이쁜 그림이긴 한데 하하, 하.”

    “됐습니다.”

    정혁이 그의 어깨에서 드웨이크의 손길을 정중하게(?) 거절하며 뒤쪽에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

    드웨이크는 허허 웃으며 그의 곁에 앉았다.

    그러자 라테와 에트론 그리고 에드가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와 동시에 대장간의 문이 열리며 리안, 유르겐, 로만 그리고 안나까지 등장했다.

    리안을 따라온 엘라는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정혁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에서 진심을 느낀 정혁은 옅은 웃음으로 엘라의 마음을 달래 주었다.

    처음이다.

    이곳에서 정혁의 모든 에고 장비들과 에이드윈들이 모인 것은 말이다.

    어쩌면 이 공간 역시 그들의 마지막 안식처로 ‘그’가 마련해 준 곳일 수도 있다.

    알 수 없는 평온함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정혁은 이 여유가 마지막일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제부터 시작인 거죠?”

    정혁이 리안에게 물었다.

    팔짱을 낀 채 소파에 앉은 정혁을 내려다보고 있던 리안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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