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56화 (156/200)
  • ◈156화

    의심.

    어떻게 보면 이 오아시스 세계에서 가장 신뢰하고 있는 자의 입에서 나온 의심.

    시작은 정혁으로부터, 그리고 이어지는 동료의 증언과 덧붙여 마법사답게 논리적으로 결론을 지으려는 저 의문의 남자까지.

    그들이 던진 의심의 씨앗은 제논의 지도부, 각 팀장들의 마음에 심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계속해서 복기해 보고 있었다.

    내가 어디까지 기억하고 얼마나 상세하게 기억하는지 말이다.

    점점 자신의 기억이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들 정도로 디테일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때였다.

    “자, 그럼 한 가지만요. 이제 한번 바꿔 볼까요? 여러분이 오아시스를 플레이하고부터의 기억은 어떤가요? 현실 세계의 기억만큼 또렷한가요?”

    리안의 또 다른 가정이 그들의 머릿속을 뚫고 지나갔다.

    이들의 얼굴색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모두가 동일했다.

    현실 세계에서의 기억은 모든 순간들이 또렷한데 오아시스를 플레이하고부터는 하나의 순간들만 아득하게 기억날 뿐이었다.

    하나같이 기억할 수밖에 없는 업적을 세웠거나, 곤경에 처했을 때였다.

    그것도 현실 세계의 기억처럼 촉감이나 냄새까지 기억이 나는 수준도 아니었다. 그냥, 그땐 그랬었지 정도의 기억이었다.

    괴이했다.

    정말 괴이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군.”

    김창수가 낮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물론 드웨이크의 말이 사실이라고 납득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리안, 자네가 한 말처럼 우리의 기억에 어떤 조작이 가해진 것은 확실히 맞는 것 같네.”

    리안은 김창수를 보며 옅게 미소를 지었다.

    드웨이크가 정혁을 돌아보았고 정혁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계속해 달라는 의미였다.

    “제가 봤던 현실의 순간을 말씀드려도 될까요.”

    드웨이크는 자신의 입으로 자신이 겪었던 그 순간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마치 창고와도 같은 더럽고 불결한 공간에 빨랫감처럼 3층으로 널려 있는 진공팩에 보관된 사람들.

    그들을 관리하듯 날아다니는 드론들의 배려란 전혀 없는 과격한 동작.

    그리고 깨어난 사람들의 고통에 찬 울부짖음과 숨이 끊어진 자들을 폐기하는 행위들.

    자신들의 몸에 박힌 관을 통해서 에너지를 착취당하고 있는 모습과 무기력하게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

    이 말들을 이어 갈 때 에이드윈들은 모두 눈을 질끈 감고 인상을 구겼다. 발랄한 유르겐조차도 말이다.

    “그리고 저는 그곳에서 마스터를 느꼈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들리고 그의 기운이 느껴졌죠.”

    드웨이크의 말에 모두가 일제히 정혁을 쳐다보았다. 에이드윈도, 제논의 지도부도, 모두가 말이다.

    정혁은 무엇보다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리안을 보며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나 뭐,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정혁, 자신은… 프로그램 따위이기 때문에.

    “저도 제가 어떤 마법과도 같은 일로 그곳에 도달했는지 모릅니다. 저는 다만, 드웨이크가 쓰러져 누워 있을 때. 이 상황조차도 어떤 의미가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의미요?”

    안나가 작게 묻자 정혁은 조금 슬픈 눈으로 안나를 바라보았다.

    리안은 그 눈빛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아마 에이드윈 중에는 리안만이 정혁의 진짜 정체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가 플레이어가 아닌 그저 하나의 프로그램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여러분은 저를 어떻게 생각하시죠?”

    정적이 흘렀다.

    유르겐이 뭐라고 쫑알거리고 싶어 하는 눈치로 입술을 실룩거렸지만 그렇다고 입을 열어 몇 마디 꺼내지는 않았다.

    “저는 작은 난민촌에서 눈을 떴습니다. 대전쟁의 화마가 덮쳐 모든 삶의 터전을 잃고 부모를 잃은 한 아이. 그때의 기억이 제 첫 번째 기억이기도 합니다. 그때 저는 조 패더럴이라는 유명한 대장장이에게 거둬졌고 여러분 모두 알다시피 그가 운영하는 대장간에서 이 여정의 첫 단추를 꿰었어요.”

    하늬안이 과거를 상기하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저는 의문이었습니다. 왜 내 기억이 그때부터일까. 그땐 단순히 제가 ‘한’이었기 때문에. 신이라는 놈의 장난에 의해서 이런 이상한 신체로 옮겨 왔기 때문에 이 신체의 본래 주인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이리라 생각했죠. 그런데….”

    정혁은 다음 말을 속으로 삼키며 가만히 장내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과거 자신의 정체가 ‘한’이라고 밝힐 때보다 더 마음이 무거웠다.

    그땐 ‘한’이라는 괴랄한 위용이 제논의 앞길을 더욱 밝혀 줄 거라는 믿음이 이들 마음속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가 밝히려는 내용은 한낱 프로그램에 의해서 휘둘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편함을 안겨 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앞으로의 여정을 위해선, 이들의 신뢰를 받기 위해선 이 말을 꺼내야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저는 실제로 ‘한’과 같이 행동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제 행동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여러분이 기억하는 소위 ‘빌어처먹을 개망나니 한’과는 상당히 달랐잖아요?”

    하늬안이 글쎄 하는 눈빛으로 고개를 갸웃 하며 정혁을 바라보자 정혁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조금은 마음의 짐이 덜어진 것 같기도 했다.

    “괴리감이 있었습니다. 성장해 가면서 제가 가지고 있는 이 이상한 능력들과 제가 만났던 저 사람들과.”

    정혁이 에이드윈들을 가리켰다.

    “그 이후에 일련의 사건들이 자꾸 저 스스로를 부정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의문점을 가지고 있던 중 저는 결국 젠트라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김창수는 드디어 그가 가장 의문을 품었던 순간이 도래했다고 생각했다.

    갑작스레 나타난 황금빛 드래곤과 평소와 굉장히 달랐던 정혁의 모습까지.

    어떤 중요한 포인트가 있었을 거라 생각했었다.

    “젠트라는 꽤 오랫동안 저를 ‘계획’해 왔더군요.”

    “…계획해 왔다?”

    박달수의 의문섞인 말에 정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말 그대로 그는, 아니, 어쩌면 그의 모습을 한 것일지도 모를 또 다른 어떤 존재는, 저는 계획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를 모르겠지만 그는 저를 계획했고 그의 힘 전부를 제게 쏟아부었습니다. 그때 저는 알게 됩니다. 저는 여러분과 다른 존재라는 것을요.”

    “다른 존재라니?”

    하늬안이 묻자 정혁이 숨을 고르며 천천히 말했다.

    “저는… 프로그램입니다.”

    찬물을 끼얹은 듯 장내가 조용해졌다.

    차갑도록 고요했다.

    모두의 사고가 정지된 것 같았다.

    안나가 매섭게 리안을 노려보았다.

    마치 당신은 알고 있었냐는 듯한 느낌이었다.

    순간 스태프였던 엘라가 정령의 모습으로 변해 황당하다는 얼굴로 정혁을 바라보았다.

    제멋대로 대장간이 열리더니 라테와 에트론 그리고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에드가까지 튀어나왔다.

    그들은 모두 정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혁은 찬찬히 모두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담담히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애석하게도 여러분의 위에서 여러분을 통제하고 이끌었던 저는 적당한 자유도와 일정한 패턴을 가진 동네 NPC와 다름없는 하나의 프로그램입니다.”

    “돌아 버리겠군.”

    유르겐이 헛웃음을 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입. 조심하게.”

    김창수가 날카로운 눈매로 유르겐을 쳐다보았다.

    유르겐이 책상을 치며 몸을 일으켰다.

    “네놈들은 모르겠지만 이 세계가 초기화가 되면서 우리는 꽤 오랜 시간을 모든 기억을 안고 여기서 살아왔어! 지금 네놈들이 들은 이 황당한 이야기들을 우리는 익히 알고 음지에서 사투해 왔다고! 누구를 위해? 네놈들을 위해! 저 너머의 세계에서 끔찍하게 고통받은 우리의 실제 삶과 네놈들의 삶을 위해! 그리고 이제 이 마지막 관문에 최후의 병기라고 알고 있던 저자가!”

    유르겐이 손가락으로 정확히 정혁을 가리켰다.

    “오아시스와 다름없는 프로그램 쪼가리라고 시인하잖아! 이 참담한 기분을 네놈이 알아?!”

    유르겐의 거침없는 고함에 제논의 모든 팀장들이 몸을 일으켜 격분했다.

    금방이라도 충돌할 것 같은 분위기에서 김창수가 책상을 내리쳤다.

    그러자 거대한 책상이 박살나며 분진이 올라왔다.

    모두가 움직임을 멈췄다.

    “닥-쳐! 다 입 다물고. 가만히 있게.”

    그의 전신에서 이제까지 느낄 수 없었던 분노와 살기가 퍼져 나왔다.

    리안은 가만히 정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과 눈동자엔 여러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리안, 말해 봐요. 당신 알고 있었어?”

    안나가 눈빛에서 멈추지 않고 입으로 리안에게 물었다.

    “…알고 있었지.”

    리안의 대답에 에이드윈 모두는 꽤나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리안….”

    로만이 어처구니없다는 말투로 리안의 이름을 작게 읇조렸다.

    유르겐은 당장이라도 리안의 멱살을 잡으려는 것처럼 분개했다.

    그들의 입장에선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의 존재 이유.

    오아시스를 무너트리고 이 고통의 연쇄를 끊는 것.

    현실에서의 주권을 되찾는 것.

    배터리나 다름없는 실제 세상의 자신들을 해방하는 것.

    하지만 ‘그’가 약속했던 마지막 다섯 번째 리사이클 전.

    해방의 키라고 했던 자, 저 정혁이라는 남자가 오아시스와 다름없는 프로그램이라는 사실이 그들에게는 납득할 수 없

    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프로그램과 싸우고 있는데 그 승패의 사활을 또 다른 프로그램에게 걸어야 하다니 말이다.

    “아직, 정혁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어.”

    리안이 손가락을 움직여 박살난 책상을 원상복구시켰다.

    거친 호흡이 오고 갔지만 어느 정도 진정이 된 것 같았다.

    정혁은 눈을 감고 가만히 턱을 쓰다듬다가 다시 눈을 떠 자신을 바라보는 모든 이들을 둘러보곤 입을 열었다.

    “너무들 화내지 마세요. 사실 누구보다 충격적인건 제가 아니겠습니까, 하하.”

    그의 한마디에 거친 호흡도, 휘몰아치는 분노도, 답답한 공기도 모두 일순간에 가라앉는 것만 같았다.

    안나는 가만히 정혁을 쳐다보다가 뭔가가 가슴을 치고 지나감을 느끼곤 급히 고개를 숙였다.

    에이드윈 중에 가장 오래 정혁을 곁에서 본 사람이다.

    정혁은 자신이 ‘한’이라고 생각했다.

    안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다른 이들처럼 자신이 ‘사람’이라고 믿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전 랭킹 1위로서의 명예도 가슴에 품고 있었고 다시 돌아갈 거라는 희망도 안고 있었다.

    플레이어들은 오아시스의 NPC들을 놀라워하곤 한다.

    그들의 자유도와 행동 패턴들은 가끔씩 황당하게도 실제와 비슷하기에 신기하기도 하다.

    하지만 결국 NPC.

    어떤 이들은 그들을 가차 없이 베어 버리기도 하고 막 대하기도 한다.

    그들은 그저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정혁의 기억 속 내제된 ‘한’의 메모리는 ‘한’이 그동안 짓밟아 왔던 수도 없이 많은 NPC들을 기억할 것이다.

    플레이어들도 끝없이 괴롭히던 자였는데 NPC들이야 오죽하랴.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되살아날 프로그램일 뿐이니 말이다.

    이 기억 속 비참한 존재들이 사실 자신과 다를 것 없는 자였다는 것.

    그때 안나는 E가 소멸되던 순간을 떠올렸다.

    자신에게 진짜 인생이 존재한다는 건 어떠냐고 묻던 그의 비참한 마지막.

    안나는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다시 정혁을 보았다.

    그때 정혁과 안나는 눈이 마주쳤고 정혁의 두 눈동자 안에 담긴 그 참담함에 안나는 자신도 모르게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 오아시스가 소멸하면.

    같이 소멸할 수밖에 없는.

    그런 운명인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