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잠깐. 저 나이트엘프와 랭커가 이 자리에 있는 게 맞는가?”
정혁이 막 말을 시작하려 하자 박달수가 그의 입을 막고 물었다.
정혁은 앤과 이프를 보며 싱긋 웃더니 말했다.
“박달수 님, 어차피 이 전쟁이 모든 것을 끝낼 것이고, 저희는 반드시 이길 것이기 때문에 상관없어요.”
정혁의 의지가 담긴 말에 박달수는 자신의 염려를 한 수 물렸다.
정혁은 실제로도 상관이 없었다.
이미 에도라의 랭커 연합에서 배제되고 있을 앤이나 배신자로 낙인찍힌 안도리니의 사냥 노예 이프가 하는 말을 쉽게 믿어 줄 사람도 없을 뿐 아니라 지금 하는 이야기를 듣고, 이곳에 모인 자들의 힘과 능력을 실질적으로 보고 나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리안. 저는 이들에게 모든 사실을 말할 겁니다.”
정혁이 리안을 보며 말했다.
모두의 시선이 리안에게 향했고 리안은 정혁과 눈을 마주쳤다.
“당신의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제 긴 이야기를 시작할지 말지를요.”
김창수는 정혁의 말에 조금의 불쾌함을 표했지만 정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리안은 이미 알고 있다.
리안이 깨어나고 에이드윈이 모두 모인 지금, 세계의 마지막이 오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의 마지막을 끝으로 오아시스의 세계는 완전히 폐기될 것이라는 것을.
유일하게 에이드윈의 이름을 가지지 않은 저 남자 정혁은.
끝내 자신의 완전한 정체를 알아 버렸다는 사실을.
그러나 다만 그가 자신의 모든 비밀을 완전히 공개하지만은 않기를 리안은 바라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비밀을 말하며 스스로에게 상처받지 않기를 말이다.
하지만, 이들이 정혁이 택한 마지막 전쟁의 동료들이라면, 지금 이순간이 아니고서는 이 이야기를 전할 시간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렇기에 리안은 천천히 입을 열어 대답했다.
“당신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리안이 조용히 대답하자 정혁이 후련하다는 듯이 후- 하고 숨을 뱉었다. 그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로그아웃한 지 얼마나 되셨나요?”
뜬금없는 정혁의 말에 다들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곰곰이 자신의 로그아웃 시간을 떠올려 보는 듯했다. 그러다 아리송한 얼굴들이 되어서 책상을 혹은 다른 곳을 쳐다보았다.
오직 드웨이크만이 뭔가 착잡한 표정을 띠고 있을 뿐이었다.
“아시겠지만 오아시스의 세계에서는 굳이 로그아웃이 필요 없잖습니까. 마스터께서 ‘한’이셨을 때도 그랬겠죠. 오아시스의 시스템상 우리가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이 캡슐 안에서 실제로 우리 몸과 유기적 작동을 하기 때문에 신체에 무리도 없구요. 그래서 아주 이곳이 현실이 된 사람들도 있다고 알고 있는데… 굉장히 뜬금없는 말씀을 하시네요?”
무역 팀의 샹드레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정혁에게 되물었다.
“그럼 한번 해 볼까요? 로그아웃?”
정혁의 되물음에 김창수가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지금 뭐 장난하자는 건가? 자네도 알겠지만 로그아웃을 하면 하루 정도는 재접속이 불가능하네. 신체 리듬 때문이지. 이 시기에 누가 로그아웃을 하겠나. 개개인이 가장 큰 전력인 지금 말일세.”
“아뇨. 사령관님 아닙니다. 제가 제논의 안전을 완전히 보장할 테니. 잠시 현실 세계로 다녀오시죠. 여기 모두, 로그아웃해 보세요.”
“마스터! 자꾸 개소리할래?”
하늬안이 빽 소리를 질렀지만 정혁의 표정엔 어떤 장난기도 없었다.
그러자 하늬안이 더욱 화가 난 듯 다시 한번 소리쳤다.
“그래! 내가 해 볼게요!”
“잠, 잠깐 하늬안…!”
뭔가가 걱정된 듯 드웨이크가 손을 들며 그녀를 말리려 했지만 하늬안은 거침없이 시스템을 호출해 로그아웃을 시도했다.
[SYSTEM ERROR 플레이어의 명령을 실행할 수 없습니다.]
[SYSTEM ERROR 플레이어에게 권한이 없습니다.]
하늬안은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두개의 반복된 알림 창에 당황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어?”
정혁은 그녀를 보며 다른 팀장들에게도 말했다.
“해 보세요. 로그아웃.”
그러자 다른 팀장들과 이번엔 앤까지 뭔가를 시도해 보는 것 같았다.
그들은 모두 동일하게 로그아웃을 시도해 보았고 이는 곧 당황스러운 시스템 에러 경고와 함께 이행되지 못했다.
“…이게…무슨?”
리디안이 작게 탄식했고 김창수의 표정에 황당함이 어렸다.
“…우리는 시스템에 의해 로그아웃할 수 없습니다. 아시겠죠? 여러분들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언제든 로그아웃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계셨겠지만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로그아웃 시도해 본 적이 없으실 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되짚어 보란 말입니다.”
정혁의 말에 모두들 과거를 복기해 보았다.
그리고 다들 뭔가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이다.
정말 한 번도 로그아웃해 본 적이 없다.
왜지?
언제부터지?
아니 오히려 자신들의 기억에 로그아웃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이러니한 착각의 조각들이 심어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일종의 시스템 점검 기간이거나 혹은 일시적인 에러가 아닐까요?”
하늬안의 말에 정혁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일도, 모레도 동일할 겁니다. 여러분은 절대로 로그아웃할 수 없어요.”
“그럼… 우리가 이곳에 갇힌 상황이라는 건가.”
김창수의 낮은 목소리가 모두의 염려를 뚫고 송곳처럼 지나갔다.
“…맞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오아시스에 갇힌 겁니다.”
“믿기 어려운 소리군.”
박달수가 이마를 긁적이며 고개를 갸웃했다.
당연하다.
그의 반응이 당연한 것이다.
조작된 기억이 억지로 주입된 그들에겐 각자 현실의 아름다운 세계가 뇌리에 남아 있으며 그곳에서의 자신과 이곳에서의 자신이 반드시 둘로 존재한다.
그러나 실제는, 사실은 그렇지 않다.
현실이라고 착각하는 그곳이 얼마나 끔찍한지는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될 만큼 충격적이다.
“왜 우리가 이곳에 갇힌 거지? 이유를 아는가?”
박달수가 말을 이었다. 정혁은 말을 하려다 말고 드웨이크를 보았다.
드웨이크는 정혁과 눈이 마주치곤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리안은 그와 정혁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리안은 드웨이크를 보며 괴이한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 이질감은 정혁에게서 느껴지는 것과 비슷했다.
또한 엘라에게서 느껴지는 것과도 비슷했다.
저자는 플레이어이면서도 플레이어가 아니고 플레이어이면서도 장비와 같은 느낌이 났다.
그의 신체에서 자꾸 정혁의 황금빛 마나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게다가 그 마나는 정혁에게서 작게 연결되어 흐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자는 아마도.
“여러분에게 현실이 어떤지에 대한 이야기를 제가 해 드려야겠네요.”
갑작스런 드웨이크의 말에 김창수와 다른 팀장들이 일제히 그를 쳐다보았다.
드웨이크는 몸을 일으켜 가운데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가만히 서서 숨을 고르곤 입을 열었다.
“다들 아시겠지만 저는 혼수상태였습니다. 혼수상태가 유지되면 뇌사가 되기 전 시스템은 알아서 사망 판정을 내리고 강제 로그아웃을 시켜 버립니다. 이게 저희가 알고 있는 기본적인 ‘플레잉 캡슐’의 메커니즘이죠. 그럼 혼수상태에 빠진 저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뇌사 판정으로 로그아웃되기 전 오아시스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제 자아 말입니다. 저는 현실 세계에 있었습니다.”
모두들 그의 목소리에 의아했다.
현실세계에 있었다는 말이 이렇게도 무겁고 두려움에 휩싸인 목소리여야 하나 하고 말이다.
실제로 드웨이크의 듬직한 몸은 어딘가 작게 떨리고 있었다.
“여러분이 기억하고 있는 현실세계는 실제와 매우 다릅니다.”
“매우… 다르다?”
김창수가 작게 웅얼거렸고 드웨이크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서 한마디 뱉었다.
“현실 세계는 기계들이 지배합니다.”
“…엥?”
하늬안이 고개를 한번 갸웃하고는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핫, 아니 팀장. 무슨 소설 써요? 요즘 글 써?”
하늬안의 말에 드웨이크는 씁쓸한 웃음을 띄우며 대답했다.
“나도 소설이었으면 좋겠지만 사실이야, 하늬안.”
오히려 더욱 진지한 목소리에 하늬안은 웃음을 슬며시 속으로 삼켰다.
티는 안내고 있지만 팀장들과 김창수 그리고 앤은 드웨이크의 말이 납득이 되지 않아 한참을 속으로 곱씹었다.
오히려 이들이 짜고 무슨 몰카라도 하고 있는 건지 의심하기도 했다.
그만큼 그들에겐 너무나 허무맹랑한 소리였다.
각자 현실 속의 기억이 존재한다.
자신의 가족과 아는 사람들. 밝게 뜬 해와 살랑이는 바람.
주변의 소음들, 냄새, 촉감과 자신의 집.
그리고 그 집에 얽힌 자기만의 공간.
그 안에 마련된 플레잉 캡슐.
아니, 그보다도 전에 자기의 걸음마, 자전거를 처음 타던 날과 말을 처음 했던 때.
그 모든 기억들이 복합적으로 머릿속에 담긴 이들에겐 현실이 기계들에게 지배당한다는 말이 삼류 SF 소설 속 이야기와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다.
“언제 적까지 기억이 나나요? 김창수, 당신은 어때요?”
뜬금없이 리안이 김창수에게 묻자 김창수가 침묵을 이어 가다가 대답했다.
“…걸음마를 처음 떼던 순간.”
“최민식. 당신은요?”
외교 팀장 최민식이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뒷머리를 긁적이곤 대답했다.
“저는… 처음 아빠라고 말한 날이 기억나네요.”
리안이 싱긋 웃으면서 그들 모두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모두들 아마 아주 어린 갓난아기 때의 기억부터 세밀하게 다양한 기억들을 가지고 계시죠. 아주 디테일하고 상세할 겁니다. 하지만 그건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모두 똑같이 갓난아기일 때의 기억부터 모두 그때의 향기와 촉감까지 기억을 할 수 있나요?”
“…그럴 수도 있죠.”
하늬안이 리안의 말을 납득하기 싫다는 투로 끼어들었다.
“아니요. 그럴 수 없어요. 인간은 자기가 정말 필요한 기억을 제외하곤 망각합니다. 망각이라기보단 사실 기억하고 있으나 기억하지 않는다고 표현해야 맞을까요. 누군가 그런 말을 했다죠. 신이 있다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망각일거라고. 그래요. 하늬안, 당신의 말대로 그 모든 기억들을 다 가지고 있다고 칩시다. 사람마다 개인의 능력은 다른 법이니까요. 근데 여기 있는 모두가 다 그렇다? 그건 이상하지 않나요? 앤?”
리안이 앤에게 시선을 돌려 물었다. 앤이 조용히 대답했다.
“저 역시 엄마라고 부른 순간부터 기억이 나네요….”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리안이 정적을 깨고 말을 이었다.
“자, 이번엔 드웨이크의 가설? 그래요. 여러분의 이해를 위해 지금은 가설이라고 합시다. 드웨이크의 가설대로 현실 세계가 기계에 의해 점령당했다고 해 보죠. 기계들이 여러분들에게 기억을 주입해 놨다고 가정해 보는 겁니다. 어때요? 그럼 이렇게 모두에게 동일하게 아주 어렸을 때부터 여러분들이 오아시스의 플레잉 캡슐에 들어가 눈을 감는 순간까지 생생히 기억이 나도록 하는 것은 어려울까요?”
리안의 말은 모두의 현재를 천천히 비틀어 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