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호박이 넝쿨째 들어온 격이다.
에도라의 골칫거리는 당연 최상위 랭커 연합이다.
이들의 분열은 에도라의 분열을 뜻한다.
앤이 요구하는 에고 장비 수리가 가능할지 모르겠다.
애초에 정혁이 에고 장비를 제작하는 과정은 일반적인 제작 과정과는 판이하다.
게다가 한 번도 다른 이의 에고 장비를 수리해 본 적이 없다.
아니, 애초에 다른 이가 가진 에고 장비를 본적도 없고 정혁의 에고 장비들은 하나같이 스스로 정혁의 마나를 통해 자가 회복을 해 냈다.
그의 두 망치로 에고 장비를 뚱땅거린 기억이 없다.
그런데 수리도 아니고 그녀가 바라는 것은 거의 부활 수준이 아닌가?
하지만 되든 안 되든 이것을 빌미로 저들의 분열을 꾀할 수 있다면 이미 충분히 이득인 상황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절박한 것은 상대지 자신이 아니다.
키를 쥐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정혁의 의미심장한 표정을 리안은 단박에 알아보았지만 그는 옅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당신의 에고 장비는 수리할 수 없습니다.”
적막을 뚫고 튀어나온 리안의 한마디에 정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예?”
그의 반응에 리안이 조금 굳은 얼굴로 정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람의 마음을 이용하진 맙시다. 그녀에게 희망은 더 큰 절망이 될 겁니다.”
앤의 동공이 좌우로 흔들렸다.
이들이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가.
잠시의 혼란 끝에 앤은 그것이 서서히 분노로 끓어오르고 있음을 느꼈다.
고개를 숙이길 몇 번.
자신의 지위에 대한 모든 권위를 내려놓고 이들의 앞에서 치졸하게 부탁하며 겸손히 대했던 모든 순간들이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정혁은 주변의 마나가 끓어오르듯 진동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이미 그것을 느꼈을 땐 앤의 입에서 주문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끓어오르는 분노는 주변에 흐르는 모든 마나를 용암과 같이 뜨겁게 달구었다.
그리고 그것이 곧 폭발하려고 했다.
모두가 당황한 순간 리안이 손가락 하나로 그녀를 가리켰다.
주변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방금까지만 해도 타오를듯 호흡조차 불편하게 만들었던 마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잦아들었다.
앤은 분노가 일순간 당황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다시 한번 실감했다.
마법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주문도 마나 발현도 없었다.
주문과 동시에 마법사 고유의 마나가 주변에 어떤 방식으로든 보여지게 된다.
그러나 저 남자는 아무것도 없이 자신의 고등 마법을 무효화 했다.
“자, 앤 침착해요.”
리안이 상황을 정리시키려는 듯 손을 들었다.
“앤,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에고를 잃을 장비는 그 누구도 되돌릴 수 없어요. 아무리 그가 에고 장비를 제작할 수 있는 대장장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하지만 시도라도 해 볼 수 있지 않나요?”
앤이 품에서 두 동강 난 지팡이를 꺼내 보였다.
지팡이의 가운데가 어떤 폭발에 의해 터진 것 같았다.
그리고 두 동강이 난 것이다. 리안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앤을 보았다.
“당신이 만난 돌체는 좋은 분이었어요.”
“…당신…!”
앤의 눈이 커졌다.
리안이 천천히 앤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에 들린 지팡이를 쥐었다.
앤의 손이 떨렸다.
리안의 주황빛 마나가 지팡이의 균열 사이사이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그 균열이 메워지며 지팡이가 서서히 완전한 모습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리안의 뒤로 스태프 형태의 엘라가 그의 마나와 공명하여 떠올랐다.
눈이 부실정도로 밝은 마나의 빛이 공간을 물들였다가 사그라들 때 젊은 남자의 형상이 빛 속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앤이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아련한 눈으로 다리에 힘을 잃고 주저앉은 앤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그러곤 형체 잃은 손으로 앤의 볼을 한 번 쓰다듬은 뒤 그녀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가져다 댔다.
앤이 떨리는 손으로 남자의 얼굴에 손을 대 보았지만 그저 허공에 흩어질 뿐이었다.
“…돌체… 내… 마지막 사랑.”
정혁 역시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며 할 말을 잃었다.
사실 그곳에 있던 모든 자들이 그랬을 것이다.
리안의 눈동자는 완전한 주황빛을 띄며 계속해서 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앤은 슬피 눈물을 떨구며 남자를 계속해서 쳐다보기만 했다.
“앤, 나는 항상 당신의 마나, 그 안에 함께 있어.”
낮고 여린 목소리가 따뜻하게 울린다.
그리고 밝았던 빛이 서서히 꺼져 간다.
끊어졌던 지팡이를 이은 주황빛 마나 역시 다시 리안의 몸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아니, 잠깐, 잠깐만, 잠깐만요 제발…!”
앤이 양손을 사방으로 휘저으며 간절함에 소리쳤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마나는 계속해서 리안의 몸으로 흘러들어갈 뿐이었다.
남자의 형체는 더욱 빛을 잃어 가고 공중으로 조금씩 흩어진다.
“돌체!!”
앤이 비명을 질렀다. 끔찍히도 절망적이고 고통스러운 비명이었다.
그 비명을 끝으로 남자는 완전히 사라졌다.
공중에 떠올랐던 지팡이가 다시 두 동강이 나 바닥에 떨어지고 앤은 진정이 되지 않은 듯 꺽꺽거리는 울음을 뱉으며 떨리는 손으로 지팡이를 쥐어 품에 안았다.
“제가 이야기해 보도록 할께요.”
리안이 조용히 이야기하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그곳에 있던 모두는 조용히 자리를 비웠다.
문을 닫으며 정혁은 힐끔 닫히는 문틈으로 오열하는 앤의 어깨에 손을 올린 리안을 쳐다보았다.
여러모로 대단한 자라고 정혁은 다시 한번 느꼈다.
“…저자는 누군가?”
김창수는 안나와 정혁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정혁은 김창수에게 웃으며 대답했다.
“제논의 모든 팀장들을 소집합시다. 상황이 좋진 않지만 전달해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프를 보며 말했다.
“당신도 함께하지.”
이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
마스터의 긴급 전언이 전달되고 반나절 뒤.
사방에 퍼져 있던 제논의 팀장들이 모두 소집되었다.
더불어 정혁은 안나를 통해 나머지 에이드윈들을 모아 달라고 부탁했다.
안나는 그들이 이미 이곳에 모여 있노라 말했다.
이로서 제논은 괴이한 회담을 시작하게 되었다.
제논의 지도부.
총사령관 김창수와 각 팀의 팀장들.
리안을 필두로 한 오아시스의 선택받은 자들.
이 사이에 낀 이프와 진정된 앤까지.
꽤 괴이한 조합이 아닐 수 없다.
서로 각각 다른 테이블에 앉은 이들은 고요 속에서 침묵했다.
정혁은 두 집단을 번갈아 보면서 이걸 이제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때, 정적을 깨고 입을 연건 아니나 다를까, 유르겐이었다.
“근데, 안나. 너는 왜 거기 앉아 있냐?”
“…입 드므러라.”
안나가 입술을 깨물며 조용하고 살기 섞인 목소리로 말하자 김창수가 그녀를 힐끔 쳐다보았다.
유르겐이 빙긋 웃으며 정혁을 한 번 쳐다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곤 의자를 박차고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아니, 그리고 애초에 우리는 정혁, 너보다 선배인데 왜 우리가 너의 부름에 맞춰서 여기에 모여 앉아 마치 네 통제를 받는 것마냥 이러고 있어야 돼?”
‘저… 인격 장애 새끼….’
정혁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제논의 지도부가 발끈해 몸을 전부 일으켰다.
“정혁? 마스터가 네놈 친구냐?!”
리디안이 고함을 버럭 질렀고 하늬안은 테이블 위로 번쩍 올라가 특유의 고함을 내질렀다.
“마스터는 나만 욕할 수 있어! 나만 조롱할 수 있다고!”
정혁은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보니 우리도 탄탄한 조직은 아니었구나 싶다.
뭐 사실 유르겐의 주장도 틀린 것은 아니다.
엄연히 그들이 자신의 선배이니 말이다.
리안이 유르겐을 보며 눈짓을 한 번 하자 유르겐이 그들에게 맞받아치려다가 속으로 뭔가를 웅얼거리며 의자를 고쳐 앉았다. 리안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고개를 숙이고 사과의 뜻을 전하고서야 제논 측이 진정되었다.
“정혁, 자네의 정리가 필요할 것 같네. 이 모임의 목적은 무엇인가?”
팔짱을 끼고 있던 김창수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는 천천히 앞에 앉아 있는 자들의 얼굴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오아시스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냈지만 이들에 대한 데이터가 없네. 이 정도로… 강한 자들을 내가 모르다니.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일세. 특히 자네.”
김창수가 손가락으로 로만을 가리켰다.
김창수는 기억한다.
정혁조차 쩔쩔 맸던 대악마 아크.
그를 맨손으로 밀어붙이던 괴이한 자.
그가 아니었다면 제논의 피해가 더 커졌을 지도 모른다.
드웨이크뿐 아니라 다른 팀장들까지 목숨이 위태로웠을 수도 있다.
멀리서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전투를 벌이던 자였지만 김창수는 그의 기운과 외형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게다가 저 마법사는 이곳에 있는 톱 랭커 앤보다도 강하다.
월등히, 압도적으로 강하다.
심지어 그에게 정혁의 고유 장비였던 은행나무 엔트 엘라가 쥐어져 있다.
애초에 무기화 모습을 싫어하는 엘라였지만 마치 태초부터 그의 무기였던 것처럼 스태프의 모습으로 조용히 침묵하고 있다.
김창수는 이 모든 상황들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시선을 돌려 정혁을 보았다.
찌푸린 미간 사이로 그의 고뇌가 비춰지는 듯 했지만 한편으로는 참 대단하다고도 생각됐다.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줄곧 그의 미스터리는 계속되고 있다.
늘 괴이한 상황과 해석해 줘야만 하는 사건투성이다.
“우리 모두가 느낄 테지. 지금 자네들은 제논의 모든 전력이 한꺼번에 덤벼들어도 결코 이기지 못할 만큼 강한 자들이 확실하네. 촉새, 당신의 힘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야.”
촉새라고 지적된 유르겐이 눈썹을 움찔했지만 리안이 여전히 그에게 눈짓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김창수가 안나를 한 번 보고는 경직된 얼굴로 말했다.
“모두 에이드윈이라는 이름을 공유하고 있군.”
안나는 고개를 숙이고 손톱 끝만 만지고 있었다.
제논의 모든 팀장들이 일제히 안나를 바라보았다.
유르겐이 싱글거리며 다리를 꼬아 앉았고 안나는 유르겐을 흘겨보곤 정혁에게 시선을 돌렸다.
“안나, 뭐예요, 이들과 무슨 관계에요?”
하늬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안나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그 사이에서 박달수가 손을 들어 안나에게 다가가는 그녀를 막았다.
드웨이크 역시 몸을 일으켜 하늬안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맨날 나만 답답해?”
하늬안이 테이블을 한번 쾅 하고 내리쳤다.
김창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마스터. 입을 열게. 자네의 정리가 필요하네.”
정혁은 한숨을 깊게 들이쉬며 양손으로 의자의 팔걸이를 강하게 움켜쥐었다가 풀었다.
그러곤 양손을 모은 채 말했다.
“잘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꽤 긴 이야기가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