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53화 (153/200)
  • ◈153화

    “일단 자리를 옮기도록 하지.”

    감창수의 말에 앤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 지금의 행위는 도박에 가깝다.

    어쨌든 아직 우호적이지 않은 집단과 그 수장을 만나러 적의 심장부로 가는 것은, 아무리 랭커인 그녀라고 한들 쉽게 내릴 수 있는 결정이 아니다.

    게다가 앤은 알고 있다.

    아무리 그녀가 기척을 숨기고 아무도 모르게 이곳에 왔다 해도 롬, 그는 이미 에고 장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앤의 숨은 의도를 알아챘을 것이며 아룬이 그녀를 계속해서 추적하고 있을 것이다.

    배신의 행위.

    롬의 표독스러운 웃음과 아룬의 비열한 표정이 떠오른다.

    린이라면 이런 자신을 이해해 줄지 모르겠지만, 이젠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과 다름없다.

    앤은 잠자코 김창수의 뒤를 따랐다.

    주변에 모여 있던 제논의 플레이어들이 그들의 사령관과 함께 걸어 나오는 여마법사에게 흥미를 보였다. 그러나 곧 그녀가 최상위 랭커라는 것을 깨닫고 당황한 듯 뒷걸음질을 치거나 소곤거렸다.

    앤은 결심했다.

    모 아니면 도.

    앤에겐 무엇보다도 자신의 에고 장비를 되찾고자 하는 열망이 강했다.

    그를 다시 품에 안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를, 한 번만 다시 볼 수 있다면 이보다 더한 짓도 할 수 있다.

    이 세계에서 에고 장비를 제작하는 유일한 대장장이.

    그 말고는 자신이 걸 수 있는 희망은 없다.

    “욘마곤의 제논 진지로 이동하는 포탈을 열어 줄 수 있겠나?”

    “…좌표는?”

    김창수가 보안 채널을 열어 차단된 전음으로 제논 진지 핵심부의 좌표를 앤에게 전달했다.

    앤이 가볍게 몸을 움직여 포탈을 여는 주문을 외울 때 김창수가 뒤로 돌아 그들을 따라 나온 이프라는 나이트 엘프를 바라보았다.

    “자네, 자네도 같이 가지.”

    “…예?”

    “뭘 당황하나, 자네도 우리 마스터와 못 나눈 이야기가 있을 것 같은데?”

    “아, 뭐 그렇긴 한데요….”

    이프는 저 덩치 큰 남자가 도대체 무엇을 믿고 자신과 저 최상급 랭커를 제논의 본진지로 들이는지 의아했다.

    풍겨 나오는 아우라를 봐서는 자신의 거대한 힘을 믿는 건가 싶다가도 이프, 자신은 그렇다 쳐도 눈앞의 여마법사 앤

    은 저 남자 혼자만으로는 버거운 존재일 뿐 아니라 마법이라는 특성상 일갈에 진지 전체가 초토화될 수도 있다.

    그런데도 당당히 진지로 가는 포탈 좌표를 알려 주다니.

    “내가 우리 마스터를 만나고 나서 크게 바뀐 것 중 하나인데.”

    김창수가 이프의 표정을 읽고 웃으며 말했다.

    “별다른 생각 없이 행동해도 결과는 항상 마스터의 손안에 있기에 아무 상관없다는….”

    김창수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툭툭 두드렸다.

    “확신일세.”

    이프는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다가 침을 꿀꺽 삼키고 막 열리는 포탈로 시선을 돌렸다.

    “하늬안, 이곳의 방어를 더욱 철저히 하고 언제든 드웨이크와 인접 진지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전체 채널을 열어 둬. 이 여자….”

    김창수가 숨을 고르며 마나를 안정화 하는 앤을 힐끔 보곤 말을 이었다.

    “이 여자가 여길 다녀갔다는 것을 다른 랭커들이 금방 알아챌 거야.”

    하늬안은 김창수의 말에 곤란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최상위 랭커가 우르르 달려들면요?”

    그녀의 볼멘소리에 김창수가 허허 웃으면서 대답했다.

    “우리 마스터가 있는데 감히?”

    하늬안은 김창수도 많이 변했다고 생각하며 껄끄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황만 보면 우리에게 상당히 불리하지. 최전방 경계 지역에 팀장들이 모두 흩어져 나가 있기에 든든하다고는 하나 우리는 너무 넓은 범위를 지키고 있으니 말이야. 본디 방어 하는 쪽이 더 치열한 법일세. 그러나 잊지 말게. 롤란의 불칼이 어떻게 무너졌는지. 그들은 쉽게 우리를 먼저 치고 들어오지 못할 거야. 지금과 같은 자잘한 공격들만 이어지겠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채널은 반드시 개방해 놓게.”

    김창수는 이 말을 남기고 이프와 앤과 함께 포탈로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지자 포탈은 천천히 공간으로 흡수되어 사라졌다.

    하늬안은 진지 내 마법사 플레이어들을 불러 주변의 마나 흐름을 완전히 환기시켰다.

    그리곤 저 멀리 먼지가 피어오르는 적진지를 바라보며 자신의 두 대검을 고쳐 쥐었다.

    ***

    욘마곤의 제논 진지 본성.

    그곳엔 정혁과 안나, 그리고 리안이 함께 있었다.

    리안의 손에는 엘라가 쥐어져 있었다.

    정확히는 스태프화 된 엘라.

    예전이라면 기겁을 하며 어서 본래 모습으로 돌려달라고 아우성을 쳤을 그녀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녀는 마치 스태프의 모습이 자신의 본모습인 양 아무런 반항 없이 리안의 손에 착 붙어 있었다.

    정혁과 안나는 리안과 함께 욘마곤으로 넘어왔다.

    그곳에서 정혁이 궁금해 했던 이야기들을 풀어낼 수도 있었지만 카탈 대륙에서 눈을 뜬 리안은 이미 카탈에 눈과 귀가 너무 많다는 말을 하며 자리를 옮기길 원했다.

    대장간으로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일단 타이런으로 넘어오기로 했다. 앞으로의 전장은 이곳이 될 테니 말이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작은 정령의 모습으로 변한 라테가 카탈을 지켜 주기로 했다.

    바람과 물의 정령왕의 엄청난 마나가 계속해서 흘러들어가 필요시마다 유지되고 있는 거대한 포탈을 타고 타이런의 욘마곤, 그 제논의 위대한 전초기지 본성에 도착한 그들은 따로 마련된 마스터의 집무실로 올라갔다.

    모든 플레이어들이 마스터 정혁에게 예의를 표하는 한편 그의 곁에서 숨 막힐 듯 엄청난 마나를 뿜어 대는 남마법사를 보며 놀라움에 휩싸였다.

    “확실히, 엘라를 쥐고 있으니까 쉽지 않네요.”

    리안이 멋쩍은 듯 웃으며 쥐고 있던 엘라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럼요, 무려 제가 첫 번째로 얻은 에고 장비였었으니까요.”

    정혁히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도, 좀 더 통제하셔야 다른 플레이어들이 좀 편할 겁니다.”

    “아시다시피, 엘라는 워낙 통제가 쉽지 않아서….”

    리안의 말에 정혁은 격한 공감을 표하며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엘라가 움찔거리며 작은 불평을 토했다.

    오아시스의 대기에 흐르는 마나는 산소와 같아서 주변의 마나를 가진 존재들과 공명하며 플레이어들이 자연스럽게 흡입한다.

    과한 마나 반응을 가진 소위 고위급 마법사들의 경우 이 마나를 늘 통제하고 조절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주변의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예기치 못한 치명적인 데미지를 입힐 수 있다.

    지금 리안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지만 아직 엘라와의 마나 결이 맞지 않아 주변에 유출되는 힘이 다소 과하다.

    그로 인해 다른 플레이어들이 그들이 걸어갈 때마다 거북한 느낌을 받는 것이다.

    “집무실에서 대장간을 열겠습니다.”

    “드디어 그 공간을 보게 되겠군요.”

    리안이 조금 들뜬 얼굴로 말했다.

    정혁은 어느새 도착한 집무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예상치 못한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마나석 동굴에서 만난 이프와 ‘한’의 기억이 기억하고 있는 앤이라는 여마법사. 그리고 김창수였다.

    “엥?”

    “…오…셨습니까.”

    김창수가 정혁에게 인사를 꾸벅하면서도 동시에 그의 곁에 있던 마법사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안나는 그런 김창수와 비슷하게 앤을 보며 인상을 구겼다.

    “뭐예요? 저 여자가 왜 여기 있죠?”

    안나의 다소 거친 억양에 김창수가 손바닥을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이유가 있네, 마스터에게 볼일이 있어서 데려온 거야.”

    “저한테요? 아….”

    정혁이 뭔가 알겠다는 눈으로 앤을 보았다.

    그러나 앤은 되레 리안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전신을 떨고 있었다.

    마법사는 기본적으로 마나 친화력이 높고 강하다.

    그리고 각자 다루는 마나가 있고 그 마나의 결에 따라 자신의 특화가 설정된다.

    이는 곧 칭호로 발현된다.

    마나 친화력이 높은 마법사들은 서로가 서로의 강함을 단번에 알아본다.

    마나가 마법사의 주위에 얼마나 흐르고 있는가, 그 흐름의 얼마나 유연하고 또 동시에 거친가.

    이 흐름이 크고 거대할수록 마법사들은 상대에게 압도된다.

    지금 앤은 오아시스를 돌아다니며 경험한 바 자신이 모든 마법사들 중에 가장 강하다고 생각했다.

    자신 앞에 모든 마법사들이 압도되어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지금은 반대다.

    그것도 견딜 수조차 없는 수준이다.

    숨을, 숨을 쉴 수가 없을 정도다.

    어떻게 저런 자가 존재하는가.

    어떻게 저런 자가 이제까지 숨어 있었는가?

    이게 가능한 일인가?

    도대체 정혁이라는 남자는 그 근원이 무엇이기에 주변에 이런 인물들이 계속해서 등장하는 건가?

    “아, 어. 미안합니다. 제가 아직 이 스태프를 통제하지 못하고 있어서요. 아마, 힘드…실 텐데.”

    리안이 먼저 앤의 상태를 깨닫고 당황하며 손사래를 쳤다.

    “엘라, 안 되겠어. 우리의 마나 결을 맞추는 작업은 조금 뒤에 하자. 지금은 다시.”

    그의 말에 스태프가 은은한 노란빛으로 물들었다가 은행잎들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정령 모습의 엘라로 돌아왔다.

    정혁이 스태프로 쥐고 있었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이펙트였다.

    이 모습을 보며 정혁은 허탈함에 혀를 찼다.

    엘라의 모습을 보며 두 명이 놀랐는데, 하나는 김창수.

    엘라가 정혁의 손이 아닌 이 남자 마법사의 손에 쥐어져 있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다.

    그리고 에고 장비를 소유한 적이 있던 앤, 그녀 역시 소스라치게 놀랐다.

    마나의 흐름이 한결 유해진 상황에서 앤은 또 다시 닥쳐온 충격에 몸을 부르르 떨어야 했다.

    그리곤 정확히 정혁을 쳐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혁…님.”

    나름대로 최상위 랭커로 제논의 적이었던 자.

    앤은 양손을 모아 쥐고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혹시… 제 에고 무기를 고쳐주실 수 있을까요?”

    “…예?”

    다들 일제히 정혁을 쳐다보았다.

    정혁은 당황한 표정으로 앤을 쳐다보다가 뭔가 떠올랐는지 씨익 웃으면서 자세를 고쳐 잡고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글쎄요… 해 볼까요?”

    앤의 눈동자가 반짝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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