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52화 (152/200)
  • ◈152화

    하늬안의 두 검은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구석 공간을 향해 날아갔다.

    날아간 두 자루의 검이 벽에 꽂혀야 했지만 어떤 베리어에 막혀 두 검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늬안이 급히 몸을 일으켜 그곳을 향해 달려들려 할 때 투명한 공간에서 형체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자였다.

    그리고 그 여자는 하늬안이 익히 잘 아는 자이기도 했다.

    실제로 만나 본 적은 없지만 세계에서 유명한 존재.

    가장 강하다 여겨지는 마법사.

    현존하는 최고의 마법기를 가진 자.

    랭킹 3위의 마법사 앤이었다.

    하늬안은 매서운 눈으로 이프를 보았다.

    그녀의 말과 이곳의 현재 상황.

    아이러니하게도 딱 떨어지지 않는가?

    “저, 저는 하늬안 당신을 찾아온 게 맞아요. 그러나 재밌게도 이곳에서 차선책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대륙의 가장 강한 마법사의 존재를 식별하게 될 줄은 몰랐죠. 당신들의 훌륭한 척후병들도 저자의 기운은 느끼지 못했던 것 같더라구요. 이곳에 숨어 계신지는 꽤 됐죠?”

    이프의 말에 앤은 잠자코 두 여성을 바라보다가 가볍게 목례를 하고 입을 열었다.

    “반가워요. 제논의 수비대 팀장 하늬안 양, 그리고 안도리니의 배신자, 나이프워커 양.”

    “이게 반가워야 할 상황인가?”

    하늬안이 인상을 구기며 그녀의 단조로운 인사를 맞받아쳤다.

    “하늬안. 알겠지만 당신 정도는 내가 손가락 하나로 구겨 놓을 수 있답니다.”

    앤의 침착하고도 살벌한 경고에 하늬안이 움찔했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덤벼들 수는 없었다.

    그녀는 랭커다.

    랭킹은 곧 강함의 척도.

    게다가 마법사라면 그녀의 말대로 하늬안은 이곳에서 흔적도 없이 ‘구겨질’ 수 있다.

    “그러니 괜히 여기서 나설 생각하지 말고 내 질문에 대답이나 해 줘요.”

    “질문?”

    분위기를 살펴야한다.

    괜한 지원 요청은 오히려 이 랭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것이다.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은 곧 불필요한 희생을 초래할 수도 있다.

    다행히 어떤 목적이 있어 이곳에 잠입한 모양.

    하늬안은 그녀의 의도를 알아보기로 했다.

    일단은 전투 의지를 거두고 자세를 고쳐 잡았다.

    “당신네 마스터. 그 제논의 길마 정혁이라는 사람.”

    앤은 정혁의 이름을 대고 잠시 뜸을 들였다가. 깊이 한숨을 쉬고 물었다.

    “에고 장비를 제작할 수 있다죠?”

    랭커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걸까?

    하늬안은 랭커들의 거만함 때문에라도 이런 사실들을 귀담아 듣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랭커 중 하나가 이렇게 적진의 한가운데까지 왔다는 것은 그들 역시 이 모든 일들에 어느 정도는 신빙성을 가지고 접근하고 있다는 뜻 아닐까?

    “그걸 어디에서 들었지?”

    하늬안의 질문에 앤이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목을 가리켰다.

    순간 하늬안은 자신의 숨통이 급격히 죄여 오는 느낌을 받으며 목을 감싸 쥐었다.

    이프가 침을 삼키며 뒤춤으로 손을 가져다 댔지만 앤은 냉정한 표정으로 이프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예의를 갖춰 주세요. 저급한 건 딱 질색이니까.”

    차가운 한마디와 함께 하늬안은 폐부 깊숙이 몰려 들어오는 산소들을 마구 들이마시며 컥컥거렸다.

    “내 질문에 대답이나 하세요. 맞나요, 아닌가요?”

    하늬안이 잔기침을 해 대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들도 아는 사실을 구태여 숨겨 봐야 소용없다.

    이미 소문이 거기까지 퍼졌다면 오히려 좋다.

    제논이 그만큼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니까.

    에고 장비를 만들 수 있는 대장장이는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불의 정령왕과 고대 엔트, 천계의 천사, 황금빛 드래곤까지. 그 모든 것들이 전부 에고 장비화되었다는 것도 사실인가요?”

    그래, 잘 알고 있네!

    하늬안은 속으로 웃음을 지으며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이 아무리 뭉쳐 덤벼 봐야 정혁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타이런의 통일은 이제 시간문제나 다름없다.

    하늬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상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다시 확인해 보려 이곳까지 온 것은 아닐 텐데 말이다.

    그녀의 목적이 무엇일까.

    “그렇다면 그 장비들을 수리하고 복구시키는 능력도 있겠네요.”

    어라, 이 부분은.

    하늬안도 잘 모르는 부분이다.

    정혁이 다루고 만지는 장비는 수도 없지 많고 모든 장비들을 수리 및 복구하지만 에고 장비까지 가능할까?

    정혁이 자신의 에고 장비들을 뚝딱거리며 수리하는 것을 본적은 없다.

    “그, 그건 잘.”

    앤의 눈썹이 움찔 하더니 다시 손가락이 하늬안의 목을 가리켰다. 하늬안은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몸을 비틀어 댔다.

    이번엔 생각보다 긴 시간 고통에 떨어야 했다.

    “크억, 컥!”

    하늬안이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토해 댔다.

    “솔직하게 다 말해 주기로 해요, 알려 줘요. 수리, 복구 가능한가요?”

    그때, 하늬안의 머리를 스치고 간 부분.

    세계에 마지막 남은 에고 장비가 있었다고 했다.

    그 장비는 어느 순간 어떤 이유로 사라졌는데 그 주인이 랭커였다고.

    그렇다면 앤은 어쩌면 정혁에게 자신의 에고 장비를 수리해 달라고 요청하지 않을까?

    그것이 목적이라면.

    이 분위기를 역전할 수 있지 않을까?

    “당신. 그거지?”

    하늬안이 고개를 천천히 들며 앤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

    앤은 그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신의 파괴된 에고 장비, 그것을 수리하고 싶은 거지?”

    하늬안의 질문에 앤은 구태여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표정에서 언뜻 그 간절함이 보이는 듯했다.

    “우리 마스터에겐 그만의 대장간이 있어. 그리고 그곳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다양한 능력의 전설적인 무기와 장비들이 쏟아지지. 내가 그분의 능력의 전부를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네 말처럼 에고 장비를 수리할 능력이 없다고 단정 지을 수도 없을 것 같은데.”

    어느새 기세를 차린 하늬안과 그에 반해 기가 꺾인 앤이었다.

    “왜? 만나고 싶어?”

    앤은 엄지손톱을 깨물었다.

    이 여자의 말이 거짓은 아니다.

    제논의 팀장들 중 데릭의 중간 보고로 제일 오래 그와 활동했던 자다.

    곁에서 많은 것들을 보고 깨달았을 것이다.

    그녀의 말 속에 조그만 희망이라도 있다면 앤은 반드시 정혁을 만나야 한다.

    그리고 그녀를 완성시켜 줄 자신의 잠든 에고 장비를 깨우고 싶다.

    그러고 싶다.

    영혼을 팔아야만 한다 하더라도 마지막으로 그를 보고 싶다.

    “에고 장비를… 사랑했구나?”

    순간 앤의 전신에서 살기가 피어올랐다.

    건들면 안 되는 역린을 건든 것 같았다. 하지만 하늬안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리 강한 장비였다고 해도 여전히 랭커를 유지하고 있는 당신이 장비를 복구하는데 이렇게 적진에 자신보다 강한 자를 만나고 싶어 목숨까지 버리려는 선택을 감히 시도 할리가 없지.”

    “예의를 차리라고….”

    “내가 아니면 당신은 쉽게 마스터를 만나지 못할 텐데.”

    그도… 맞는 말이다.

    랭커 앤이 제논의 정혁이라는 남자를 만나려면 유혈 사태를 피할 수 없다.

    몇 겹의 방어진을 뚫고 정혁 앞에 당도해서 자신의 에고 장비를 수리해 줄 수 있냐고 부탁하는 것은 어불성설에 가깝다.

    부탁하는 것은 오히려 자신의 입장.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열 수 있다.

    앤은 살기를 거두고 천천히 양손을 모아 공손한 자세를 취했다.

    “부탁…합니다. 제논의 지도자를 만나게 해 주세요.”

    하늬안은 빙긋 웃더니 이프를 보았다.

    “그전에 당신도 들었겠지만 가능하겠어?”

    “어떤?”

    “저 나이트 엘프 여자, 아 이름이 나이프 워커?”

    이프를 보며 이름을 재차 확인하자 이프가 재빨리 대답했다.

    “그냥, 이프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그래, 이프가 말한 조건, 그 차선책. 당신이라면 할 수 있는 거 아냐?”

    “…어렵겠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 정도 교환 조건은 돼야 내가 바쁜 우리 대가리를 만나게 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앤은 속으로 입술을 깨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둘이서 이야기를 좀 나누고 있어 줄래? 나도 보고를 해야 하니까.”

    하늬안은 앤에게 고개를 까닥하곤 초소 바깥으로 걸어 나왔다.

    어쩌다 이렇게 박진감 넘치는 순간을 포착할 수 있었을까.

    역시 정혁이라는 사람 곁에서는 뭐 하나 평범한 게 없다고 다시 생각하며 그녀는 김창수에게 긴급 전음을 보냈다.

    [사령관님?]

    [말하게. 무슨 일인가? 지원이 필요한가?]

    김창수의 즉각적인 응답에 하늬안이 당당한 어조로 말했다.

    [그건 아니고, 지금 와 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별다른 이유 없이 가기엔 안도리니 쪽 상황이 좋지 않다네]

    [에이, 그런 걸로 제가 부르겠어요? 빅 이벤트가 둘이나 있으니 오셔야 합니다.]

    […가치 있는 일이길 바라네.]

    [그럼요! 바로 오실 거죠?]

    [알겠네, 바로 가지.]

    전음을 닫으려는데 김창수가 다시 하늬안을 찾았다.

    [하늬안?]

    [예 사령관님?]

    [그, 드웨이크는 어떤가?]

    [뭐, 아직 여전히 그 상태예요. 혼란.]

    [그래, 알겠네. 가서 보세.]

    그의 말투와 목소리에서 드웨이크를 향한 염려가 느껴졌다.

    하늬안은 전음을 닫고 땅을 한 번 내려다보다가 주변에 소리쳐 알렸다.

    “사령관님께서 곧 오실 거야! 준비해!”

    ***

    김창수는 서둘러 그녀의 거점에 도착했다. 자초지종을 들은 김창수는 ‘앤’이라는 이름에 다소 껄끄러운 얼굴을 드러냈고 그녀가 무려 이곳에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게다가 잊혀진 종족이었던 나이트 엘프까지 함께 있다는 말엔 당황스러움까지 비췄다.

    둘은 급히 걸음을 옮겨 이프와 앤이 있는 초소 안으로 향했다.

    육중한 덩치의 김창수의 등장에 뭔가 긴밀한 대화를 나누고 있던 것 같은 둘이 대화를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앤, 오랜만이군.”

    김창수가 먼저 인사를 건네자 앤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네, 오랜만이네요. 저는 여전히 당신의 올곧은 신념을 존경합니다.”

    앤의 간결한 인사에 김창수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의자에 앉아 그녀의 자초지종을 다시 들었다.

    목적은 분명했다.

    그녀는 정혁을 만나고 싶어 한다.

    그리고 조건 역시 나쁘지 않다.

    제논에게 호의적인 은행나무 엘프 왕국의 군대가 타이런까지 넘어올 수만 있다면, 게다가 이 나이트 엘프 여자의 말대로 이 땅 가운에 잠든 선조들의 영혼이 깨어나 실체 없는 군대가 되어 함께 싸울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아군은 없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잘하면 앤, 이 여자를 우리 쪽 편에 세울 수 있고 랭커들의 연합을 무너트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교만한 롬의 콧대를 뭉갤 기회가 될 것이다.

    “우리 입장에선 나쁘지 않은 조건이지만, 앤, 자네는 괜찮나?”

    “…뭐가 말이죠?”

    “무슨 의미인지 알지 않나.”

    “뭐… 괜찮아요. 그들의 불편한 균형에 제가 한 명 빠진다고 달라질 건 없습니다. 롬은 언제나 린 뒤통수 쫓기에 바쁘고 아룬은 이상한 짓거리만 해 대며 유라는 여전히 자기만의 세상에 갇혀 있으니까요.”

    “유라, 그 녀석은 잘 있나?”

    “똑같아요. 그때 당신이 봤던 모습이나 지금이나.”

    “그렇겠지, 이곳에서 우리는 나이를 먹지 않느니 말일세.”

    “차라리.”

    앤이 잠시 말을 멈추고 김창수를 보며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다가 말했다.

    “당신의 신념에 우리가 함께 있었다면 더 괜찮은 오아시스를 만들어 갈 수 있지 않았을까요?”

    “글쎄, 그랬다면 나는 내 친우를 만나지도, 제논을 만나지도 못했을 걸세.”

    “그런가요?”

    앤이 웃음을 흘리며 말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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