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나이프워커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녀는 이곳의 지휘관이 하늬안이라는 여검사라는 것을 알고 이쪽으로 접근했다.
하늬안은 그녀가 알고 있는 아린 국왕과 친밀한 인물이라는 것을 안다.
다른 인간들이야 엘프에게 워낙 부정적이기에 접근하기 어렵다고 해도 아린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사람이라면 보다 대화하기 편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최대한 조용히 그녀의 거점에 돌입하려 했건만 예상외로 제논의 병력들은 잘 훈련되
어 있었다.
그녀의 접근을 미리 알아챈 척후병들에게 붙잡힌 것이다.
대응하려면 할 수 있었지만 불필요한 무력 충돌은 그들에게 위화감만 줄 것이었다.
애초에 그녀의 복장부터 엘프 답지 않은 무기들까지 그들에겐 자신이 안도리니의 첩자라는 느낌을 강하게 들게 할 테니 말이다.
거친 심문이 닥칠 수도 있겠다고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그들은 젠틀하게 그녀를 대했다.
이프는 그렇게 거점 중심부에 결박된 채로 몇 시간을 대기했다.
저 멀리 말발굽 소리가 들리고 이곳의 지휘관인 하늬안이 다가온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하늬안은 거점 한가운데 공터에 묶여 있는 수려한 외모의 나이트 엘프를 만날 수 있었다.
나이트 엘프라니,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희귀한 종족에게 흥미가 생긴 그녀는 천천히 말에서 내려 엘프 여성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보면 볼수록 이질적인 엘프였다.
보통 엘프들의 복장은 꽤나 자연 친화적이다.
그들이 사용하는 무기나 마나 역시 상당히 그렇다.
하지만 이 여자는 다르다.
권총도 차고 있고 단검 같은 것을 뒤춤에 달고 있다.
복장 역시 지극히 현대적이어서 마치 엘프 종족을 선택한 플레이어 같다.
인간이 아닌 종족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은 드워프뿐이다.
그들을 제외하고는 플레이어들은 다른 종족을 선택할 수 없다.
이는 오아시스의 종족 문화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오아시스엔 다양한 종족이 있지만 연대가 가능한 종족은 인간과 드워프뿐이다.
나머지 종족들은 각자의 개성이 강해서 애초에 플레이어라는 개념 자체를 적용할 수 없다.
엘프는 특히나 더 그렇다.
그렇다면 저 여성의 이런 복장이 가능한 공간, 그곳은 안도리니밖에 없을 텐데.
어떻게 나이트 엘프가 안도리니 제국의 복장을 입고 있을까.
“목적이 무엇이기에 이곳까지 왔을까요? 고귀한 엘프 나리께서.”
하늬안이 조금 날카롭게 첫 질문을 던졌다.
이프는 그녀를 보며 싱굿 웃더니 순식간에 자신에게 묶인 결박을 풀어 내고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거친 동작에 주변의 모든 병력들이 급히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오래 기다렸어요.”
이프는 품에서 은행나무 엘프 왕의 인장이 박힌 나무 토큰을 꺼냈다.
하늬안이 그것을 받아 들고 유심히 보다가 그녀를 보며 물었다.
“아린 국왕과 아는 사이?”
“뭐, 그렇다고 할 수 있겠죠?”
하늬안이 흥미롭다는 듯이 토큰과 그녀를 번갈아 보다가 다시 물었다.
“은행나무 엘프가 나이트 엘프들과 교류하고 있는 줄은 몰랐네? 그래서요?”
“그래서는, 그, 정혁인가 하는 분과 거래 비스무리한 걸 하긴 했는데 카탈까지 도망간 것 같아서 내가 찾을 수가 있어야지요. 결국 제일 만만한 당신에게 찾아왔는데.”
도망?
하늬안은 그녀의 말투에 경이로워 하면서도 참, 엘프들은 한결같이 불쾌한 생명체라는 것에 다시금 동의했다.
물론 귀여운 아린 국왕을 제외하면 말이다.
“너 나 잘 모르지?”
하늬안이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잘들어 싸가지, 네가 어디서 그따위 말투를 배워 왔는지는 내가 알반 아닌데, 나도 한 성깔 하거든? 아린의 끄나풀인지 뭔지는 알바 없고, 우리 마스터와 무슨 거래를 했는지도 모르겠는데 그건 그쪽 사정인 거잖아?”
“아니, 음, 뭐 제논과 한 거래니까. 그쪽이 좀 높으신 분이고 아마 아린 국왕과도 아시는 사이라고 알아서요. 난 그래서 여기로 온 건데?”
“이거, 상상치 못한 빌런이네.”
하늬안이 살기를 뿜으며 한걸음 더 그녀에게 다가갔다.
“뭐 그래서, 어쩌라구.”
그때서야 분위기 파악을 한 듯 이프가 두 손을 들며 말했다.
“싸우자는 건 아니고…요.”
“그럼?”
“아린… 국왕의 은행나무 엘프 병력들을 이곳으로 이동시킬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에 대해서 같이 한번 잘 논의 해보자 뭐, 이런 의미죠.”
“그래? 그럼 그 좋은 제안을 함께 이뤄 내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있을 것 같은데.”
“조건…? 아, 조건이요?”
“그따위 말투와 눈빛으로 나를 보지도, 말하지도 않는다는 굉장히 간단한 조건이거든?”
“아, 그건 내가 살아온 삶이 그런 건데 어떻게….”
“이 녀석이… 하하.”
그날, 하늬안의 거점은 또 다른 전투가 벌어졌고 이는 두고두고 그날 거점에 있었던 플레이어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들이 부딪쳤던 그 어떤 악마보다 악랄하고 고차원적인 고문이 가련하고 멍청한 나이트 엘프에게 치러졌다고 말이다.
어쩌면 하늬안은 인간이기보단 악마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소문 역시 한동안 제논에서 팽배하게 돌아다녔다.
한차례 상황이 정리되고
이프는 굉장히 예의범절을 갖춘 채 책상에 앉아 두 손을 공손히 모았다.
마나석 동굴에서 만난 엘라에게는 본능적으로 경외감이 들었다면 이 여자는 다른 측면으로 대단했다.
외관상 전혀 상처를 남기지 않고 내상을 입힐 줄 아는 굉장한 기술의 소유자였다.
특히 귓전을 때리는 정신 나갈 것 같은 고함은 전매특허.
“자아- 이제 우리 이성적으로 이야기를 나눠 볼까?”
싱긋 웃는 미소에 내포된 살의.
이제 뼛속 깊이 알겠다.
이프는 생존을 위해 웃으면서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안도리니에서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은 그녀였지만 제이크만큼 정신 나간 사람이 제논에도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계획이 뭐였는데?”
“어떤 버전으로 알려드릴까요? 표면적으로? 아니면 궁극적으로?”
“뒤질래?”
“아 예, 둘 다요. 둘 다.”
이프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일단 아린 국왕은 제가 느끼기에 지금 전 대륙의 엘프 종족들을 단합시킬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신 것 같아요. 그분이 쥐고 있는 독특한 힘을 지닌 목걸이. 그것은 잠든 선조들의 영혼을 깨울 수 있는 힘인 것 같거든요. 아마 지금은 은행나무 엘프 영토에만 국한된다고 느끼고 계신 것 같은데.”
이프가 호주머니에서 작은 보석 하나를 꺼냈다.
“예로부터 각 엘프 종족들에겐 자연의 위대한 존재들이 선물해 준 종족 고유의 보물이 있죠. 아린 국왕의 목걸이 속 보석 역시 마찬가지인 거구요. 이것 또한 그래요. 저희 나이트 엘프 종족의 마지막 남은 보물. 이 힘과 아린 국왕의 보석을 공명시킨다면 아마 동일한 힘을 저희 영토 내에서도 발현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게 궁극적인 목적인거네?”
“…예, 그렇죠.”
“그러니까.”
하늬안이 책상에서 일어나며 팔짱을 꼈다.
“너는 타이런에 은행나무 엘프 군대를 끌고 오고 싶은 거고, 그건 표면적으로는 이 전쟁의 승기를 제논이 붙잡게 하기 위함이지?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너네들 종족, 몰락한 나이트 엘프를 부흥시키고 싶은 거야. 그치?”
“…정확 합니다.”
“그 귀찮은 일을 우리가 왜 도와야 하는데?”
그녀의 반응에 이프의 눈썹이 움찔했다.
이프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겉에 입고 있던 재킷을 벗었다.
그러자 민소매만 입은 그녀의 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팔과 어깨에 크고 작은 상처가 가득했다.
그녀가 손으로 옷을 당겨 올려 배를 보이자 그곳에는 마치 총알이 뚫고 지나간 것처럼 동그란 상처들이 가득했다.
“에도라 왕국에서 지내던 하이 엘프들과 나이트 엘프들, 그들 중에 몇몇은 마나석 동굴의 마나에 취해 바닥으로 떨어진 자아를 쥐고 좀비처럼 살아가요. 나머지 엘프들은 에도라 왕국에서 더는 왕국이라고 불릴 수 없는 소수의 부족민으로 살아가다가 가끔 인간들에게 사냥당하고 끌려가죠.”
하늬안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그렇게 안도리니에서 컸습니다. 수없이 긴 시간 그들의 움직이는 사냥감이 되어 베이고 뚫리고 찔리고 맞으며 치유받고 회복되고 다시 들판을 뛰었죠. 그러다가 그들에게 특수 암살자 교육을 받아 전쟁의 일선에 서기도 했고… 노리개가 되기도 했어요. 이는 모두, 우리가, 우리 엘프가.”
“힘이 없어서지.”
그녀가 하려고 하는 말을 하늬안이 대신하자 이프는 입을 삐죽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너도 알잖아. 그러나 너희는 그런 존재들이야. 자만, 교만 그것들에 취해서 세계의 모든 고결한 척은 다하는 위선적인.”
하늬안이 은행나무 엘프 종족들의 모습들을 생각하며 말했다.
“맞아요, 그렇죠. 그러나 저는 변한 은행나무 엘프들을 보면서 깨달았습니다. 처음 그들이 카탈에 자리 잡았을 때는 오히려 그들의 역사가 바닥으로 치달을 거라고 생각했던 선조들이 많았어요. 그러나 이 부유한 타이런 대륙에 자연 속에서 숨 쉬던 나이트 엘프, 인간들과 공존하기를 원했던 하이 엘프 모두 결국 지금 저 한없이 깊은 나락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지만 되레 은행나무 엘프들은 완전한 왕국으로 성장했죠. 그들의 단단한 사고가 나이트 엘프와 하이 엘프의 교만과 어긋난 자존감을 이겼고 이제는 그 단단한 사고를 유연하게 해 주는 국왕을 만나 더 폭발적으로 발전 중입니다.”
이프가 다시 재킷을 걸치고 의자에 앉았다.
“우리도 이제는 그렇게 돼야 하지 않을까요?”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자신해?”
“글쎄요. 시도해 보지 않으면 변화조차 없는 거잖아요.”
“그래? 그렇다면 조건은?”
“아린 국왕의 병력들이 이곳으로 넘어오기 위한 첫 번째 선결 조건은 강대한 마나석의 확보에 있었어요. 마나석 동굴에서 만난 정혁 님을 통해 이를 해결해 보려고 했지만 제 특유의 싸가지… 맞죠? 당신들 표현으로.”
“음… 네 싸가지는 그것으로 다 커버되지 못할 것 같은데.”
“아… 뭐 어쨌든 그 제 빌어먹을 성격.”
하늬안이 엄지를 들었다.
“그 성격 덕택에 엘라 님이 노하셔서 물거품이 됐어요.”
하늬안은 그 부분에서 박수를 치며 웃었다.
장면이 눈에 훤했다.
“그럼 차선책은?”
한참 웃던 그녀가 눈가를 훔치며 묻자 이프가 눈동자를 굴리며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제논 쪽에서 마나의 농도가 깊은 마법사가 제가 제공하는 고대 나이트 엘프들의 고등 마법진을 소환해서 그것을 자신의 마나로 활성화한 다음에 거기에 지속적으로 마나를 공급하여 차원 문을 유지해 주는 방법이 있어요.”
“아…?”
“어… 그니까… 그, 마나석 없이는 그냥 음, 어 당신들 말로 존나 어렵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럼 왜 찾아왔냐고 여기에.”
하늬안이 답답하다는 듯 묻자 이프가 잠시 숨을 고르고 어딘가로 손가락을 가리켰다.
“저 여자라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하늬안은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허공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하늬안은 또 한 번 웃으면서 이프를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를….”
그러곤 대검 두 자루를 급히 잡아 빼 그곳으로 집어던지며 소리쳤다.
“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