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50화 (150/200)
  • ◈150화

    “어이구, 무서워라아-”

    아크가 재빨리 몸을 뒤로 물렸다.

    “그래도, 잘난 랭커 양반, 우리 마계에 힘을 빌리고 있는 입장에서 그렇게 불편하게 나오면 쓰나? 거래가 안 되잖아.”

    “…어차피 너희도.”

    “하! 그래?”

    아크가 롬의 말을 재빨리 끊으며 허공에 검은 마나를 잔뜩 흘려 보냈다.

    안도리니의 제이크, 그의 곁에서 움직이는 수많은 병력들, 그리고 무기들.

    제논의 김창수 그리고 날아다니는 용과 엄청난 속도로 주변을 누비는 그, 정혁이라는 남자.

    마나로 형상화된 그 모습 자체로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그에 비해 마나가 걷어지고 비춰진 에도라의 상황.

    랭커들의 분열, 모여지지 않는 힘.

    벌어진 상황이 아니라 예견이라고 해도 완전히 가능성 없는 상황을 시사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에 롬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치?”

    아크의 불타오르는 눈이 움찔 거렸다.

    해골 대가리가 저렇게나 다양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지 롬은 다시 한번 이 세계의 경이로움에 찬사를 보냈다.

    왜 아크 제국의 흑마법사들이 하나같이 제정신이 아니었는지 확실히 알 것 같은 부분이었다.

    “자, 이제 제대로 ‘갑’과.”

    아크의 한 손이 그 스스로를 가리켰다.

    “‘을’을.”

    그리고 다른 손이 롬을 가리켰다.

    “나눠보자고. 이의?”

    롬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크가 또 한 번 자지러지게 웃었다.

    “아아, 물론 오해하지 말라고, 고결한 랭커 양반. 자네 다섯이 한데 뭉쳐서 나와 한바탕 하겠다면 나 역시 그렇게 쉬운 싸움은 아닐 테야. 뭐, 내가 질 수도 있겠지. 그러나 나 혼자 제논의 그 양아치를 상대한다? 그건 나도 상상하기 힘든 상황이라구. 그건, 자네들도 마찬가지고. 그런 데다 자네들은… 반드시 그와 싸워야 할 이유도 있고… 말이야?”

    아크가 말끝을 흐리다 의문을 가진 눈으로 롬을 보았다.

    그의 말 속 의도를 롬은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크는 흥미롭다는 듯이 턱을 문지르다가 빙긋 웃었다.

    재밌게 돌아가는 구나.

    “음, 그건 뭐, 상황 봐서 전해 주기로 하고. 수지타산. 그게 맞으니 자네들과 우리. 내 휘하에 수도 없이 많은 배고픈 쓰레기 자식들을 마음껏 휘둘러 줄 테니 말이야, 부담 갖지 말고 소비하라고. 그러다가.”

    아크가 다시 롬의 앞에 서서 얼굴을 들이밀고 말을 이었다.

    “그놈, 그놈과 딱!”

    네 개의 손이 서로 맞닿아 박수 소리를 크게 내었다. 그 파동이 어찌나 큰 지 주변의 먼지가 일제히 날아가 공중에 흩날렸다.

    “마주쳤을 때, 니들이 부르지 않아도 내가, 참전하도록 하지 어때? 괜찮지? 니들은 고기 방패를 얻고 나는 클라이맥스를 얻고.”

    “…놈은… 내 거야.”

    “허?”

    아크가 헛기침을 하며 팔짱을 꼈다.

    그러곤 황당하다는 듯이 롬을 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래, 뭐 네놈의 피도 그땐 맛있게 마셔 줄 테니, 나쁘지 않은 자만인 것 같군. 그럼, 또 보자구.”

    아크가 어둠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따각거리는 발굽 소리와 함께 그가 사라진 곳 아래에 작은 돌멩이가 놓였다.

    롬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그 돌을 들었다.

    한 손에 가득 쥔 돌이 부르르 떨렸다.

    예상은 한 일이었지만 이 정도로 무시당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롬은 입술을 강하게 깨물며 아크가 사라진 곳을 한동안 노려보았다.

    ***

    욘마곤의 북쪽, 에도라 왕국과의 분쟁 지역에 드웨이크와 하늬안이 제논의 병력들과 함께 파견되어 대립하고 있는 곳.

    드웨이크는 정신을 차리고 회복한 뒤로 자신의 몸에 차오르는 괴이한 마나의 흐름에 곤란해하면서도 기억 속에서 상기되는 독특한 장면들에 계속해서 신경을 쓰고 있는 중이었다.

    혼란스러웠지만 쉴 틈이 없었다.

    불칼의 몰락 이후 제논의 정세는 급박히 돌아갔다.

    삼파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안도리니의 선공과 미사일 세례가 끝없이 이어졌다.

    에도라의 경고 이후 제논이 물러서지 않자 에도라 역시 북쪽에서 압박해 오고 있다.

    노래하는 화산이 있는 중심부는 중립 지대라고는 하지만 이는 곧 서로가 뒤엉켜 전쟁이 벌어지는 무법 지대가 되어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드웨이크의 회복은 제논의 전력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의 힘보다도 그의 회복, 즉 정혁이 일궈 낸 또 다른 기적은 제논의 병력들의 사기를 키우는 데 일조했고 드웨이크를 믿고 따르던 그의 레이드 팀 역시 다시 기운을 찾았다.

    정혁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왜일까, 그를 회복시킨 정혁은 이후로 드웨이크와 만나지 않았다.

    마치 그와 만나는 것을 꺼려하는 느낌이었다.

    머릿속에 맴도는 이 기억들이 왜곡된 기억인지 아니면 실제인지 분간되지 않는 지금, 혼란을 떨궈 내는 것은 이곳에서 터지는 아드레날린에 모든 것을 거는 것뿐이었다.

    하늬안의 부대와 드웨이크의 부대는 산발적인 공격에 지속적으로 대응하면서 전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늬안과 드웨이크는 하루에 두번씩 만나 다양한 정보들을 나누었고 또 다시 전장으로 돌아갔다.

    김창수의 증원 병력과 욘마곤의 병력들이 계속해서 그들의 전장을 왕래했다.

    아직 뚜렷한 기세로 내려오진 않았지만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요즘이었다.

    “몸은 어때요?”

    임시로 세워 놓은 전진 기지 초소에서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고 있던 드웨이크의 곁으로 하늬안이 다가오면서 물었다.

    드웨이크는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자신을 깨우며 하늬안을 바라보았다.

    하늬안은 고개를 작게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게, 좀 쉬어야 된다니까, 그 양반 참.”

    여기서 그 양반은 정혁일까, 김창수일까. 아마 정혁일 것이다.

    “아니, 괜찮아.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든 이럴 수밖에.”

    “알죠, 알지만 몸이 우선 아니겠어요.”

    그녀의 말에 옅은 웃음으로 화답한 그는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초췌해 보이는 하늬안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쪽은 어때?”

    “오늘 아침에 한바탕 하고 지금 재정비 중이죠. 오늘은 빌어먹을 그 특임대 놈들이었어요.”

    “그 큰 검으로 총 든 놈 상대하려면 힘들지 않나?”

    “에이,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하늬안이 싱긋 웃으며 실없는 농담이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팀장 몸이나 잘 챙기세요. 또 쓰러지기만 해.”

    “걱정할 것 없어.”

    하늬안이 초소를 나가려다 말고 문득 걸음을 멈춰 드웨이크를 돌아보았다.

    그러곤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팀장, 근데 요즘 고민 있어?”

    “…고민… 음.”

    드웨이크가 말꼬리를 흐렸다. 하늬안도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예전 같지 않은 느낌이랄까.

    그가 회복되었을 때, 하늬안은 그때의 기억이 불분명하다.

    기절 따위를 한 것 같았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드웨이크가 깨끗이 회복되어 정신을 차리고 있었고 정혁은 홀연히 그곳을 떠났다.

    평소와 다른 기분과 느낌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그를 껴안았지만 그랬다. 드웨이크는 뭔가, 다른 존재가 된 건 아닐까 하는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상식적으로 그는, 로그아웃이 돼야 맞았으니까.

    그런 그를 다시 이 세계로 끌어올릴 수 있는 방법은 도통 없어 보였는데도, 이렇게 그녀의 곁에서 동료로 서 있으니까.

    “나는 아마, 주… 마스터와 어떤 계약… 같은 것을 한 것 같아.”

    “…계약?”

    하늬안이 고개를 갸웃하며 그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그래, 네게 당장은 말해 주기 힘든, 어떤 계약을.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 도대체 무슨 일이 나에게 벌어진 건지.”

    “안나님께 검사를 좀 받아봐야 하지 않을까?”

    “…글세, 그냥 아직, 이 모든 것들을 이해하기엔 내가 경험한 일들이 말로 설명하기 어려워.”

    “참….”

    하늬안은 고개를 들어 초소 천장을 응시했다.

    많은 일들이 있었고 납득하기 어려운 경험들을 수도 없이 했지만 이제는 더 없겠지 해도 또, 또 다시 놀라운 일들이

    계속해서 펼쳐지고 벌어진다.

    나름대로 오아시스에서 잔뼈가 굵었다고 여겼지만 이 세계는 놀라움의 연속이고 정혁이라는 남자는 그 놀라움의 소용돌이 속에서 더 큰 파동을 일으키고 있다.

    어쩌면 지금 제논을 기점으로 벌어지고 있는 이 모든 전쟁 역시 정혁으로부터 촉발된 일이 아닐까.

    그의 납득하기 힘든 능력과 더불어 다들 뭔가를 숨기고만 있는 것 같다.

    그가 이 세계의 정점에 서게 된다면 정말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까.

    타이런까지 정복하고 나면 끝나는 걸까?

    아니다, 결코 아닐 것 같다.

    그가 일으킨 이 소용돌이는 대륙을 통일하고도 절대 멈출 것 같지 않다.

    “…그럼에도 이곳에 남아 있다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야, 하늬안 팀장.”

    하늬안은 다시 드웨이크를 보았다. 하늬안만큼이나 지쳐 보이는 그였지만 눈빛만큼은 빛났다.

    “맞아요, 만약에 로그아웃되셨다면 제논이 이 세계의 정점에 선 모습을 못 볼 뻔했잖아요?”

    “그렇지, 그 순간에 같이 서 있을 수 있다는 게 기적이야.”

    하늬안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 하곤 바깥으로 향했다.

    많은 수의 병력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각자의 일들을 하고 있다.

    드웨이크가 지키고 있는 이 초소도 수십 번의 변칙적인 공격을 막아 낸 훌륭한 거점이다.

    그만큼 훌륭한 플레이어들이 함께하고 있다.

    이 동시다발적인 공격을 완전히 틀어막고 나면 제논은 더 강한 타격을 이어 갈 것이다.

    그 초탄이 발사되기를 하늬안은 고대하고 있다.

    자신의 마스터가 카탈에서 다시 돌아오기를 말이다.

    “팀장님!”

    그때 한 병사가 하늬안에게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는 하늬안과 함께 인접 거점에서 이곳까지 왔던 플레이어였다.

    “왜?”

    “웬 여자 나이트 엘프 하나가 저희 거점으로 침입했다는 정보입니다. 급히 저희 지역으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여자 나이트 엘프?”

    “…예! 보고로는 안도리니 쪽 인물일 수도 있다는 추측입니다!”

    “피해는?!”

    “그게, 좀 이상한 게 순순히 잡혀… 줬다고 합니다!”

    “뭐?!”

    하늬안은 생각 외의 답변에 놀라며 빠르게 말에 올라 자신의 거점으로 향했다.

    드웨이크는 저 멀리 사라지는 하늬안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또 한 번 몸을 추스르며 다음 전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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