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49화 (149/200)
  • ◈149화

    그날 엘라의 포효는 역사적으로 기록되었다.

    은행나무 군락지는 세계적으로 다른 의미로 유명한 곳이 되었으며 이는 역사 속에서 잊/혔(혀졌)/다가 다시 부각되기를 반복했다.

    엘라는 은행나무 군락지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리안이라는 사람에게 얻은 지혜로 마음 속 깊이부터 자신이 자유롭다는 사실을 아무리 기억하고 납득해도 은행나무 군락지는 벗어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인 것 같았다.

    또 긴 시간이 흘렀다.

    엘라는 이제 자신의 모습을 더 이상 나무가 아닌 그와 닳은 인간형으로 바꿀 수도 있었다.

    더 강해지고 더 위용 있어지고 더… 괴팍해졌다. 이젠 은행나무 엘프들이 쉽게 찾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그렇게 그녀는 또 역사 속에서 잊혀 갔다.

    다시, 정혁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

    “리안이 그라고 어떻게 확신하지?”

    “그의 마나는 잊을 수 없어. 독특한 색깔의 따뜻한 마나, 그 향기와 흐름과 신체를 따라 퍼지던 섬세한 갈래들까지 전부, 그날의 기억은 향기와 온도와 소리와, 그 모든 것이 전부 생생하거든. 리안을 처음 봤을 때 내 머릿속에서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 그였지만, 말투부터 많은 것이 바뀐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라고 확신 한 것은 절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만의 마나 때문일 거야.”

    맞는 말이다.

    오아시스의 칭호를 가진 플레이어들은 각각 독특한 마나색을 가지고 있으니.

    [당신의 장비가 진정한 주인을 찾기를 원합니다.]

    순간 정혁의 눈앞에 알림 창이 활성화되었다.

    [세계의 비밀을 모두 알게된 당신은 그 선택에 의해 세계의 앞날이 결정되는 권한을 갖습니다.]

    [당신은 세계의 적입니다. 모든 선택에 반드시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이젠 이런 알람에도 정혁은 특별히 당황하지 않았다.

    끝에 다다른 이 시점에서, 이젠 뭐, 한숨도 나오지 않는다.

    정혁은 엘라를 바라보았다. 리안을 보고 있는 그 눈길이 여전히 아련하기만 하다.

    엘라가 에고 장비가 되었을 때, 정혁 역시 처음 겪는 신비로운 일이었기 때문에 그 모든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오아시스에서 만난 모든 존재들 중에 제일 꼬인 자였다.

    괴팍하기도 하고 괴랄하기도 한 성격은 늘 모든 전투에서 적들과 싸우기보단 서로 싸우게 만들기도 했다.

    그래도, 그녀는 정혁의 첫 에고 장비.

    지금까지의 길에서 가장 오래 곁을 지키며 걸어왔던 동료였다.

    그럼에도 그녀가 스태프의 형상을 띠고 있다는 것.

    또한 누군가에게 대여가 가능하다는 옵션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어느 날, 어느 때가 되었을 때, 마법사와는 거리가 먼 자신이 아니라, 그녀를 통해 폭발적인 시너지를 발현할 수 있는 자에게 쥐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조금은 짐작하고 있었다.

    리안이 차원 문에서 만신창이로 등장했던 그 날, 리안의 등장에 이제까지 보여 주지 않았던 어색한 모습을 보여 주던 엘라를 보며 정혁은 느꼈다.

    엘라의 진정한 주인은 리안일 거라고.

    그의 칭호가 ‘오아시스의 마법사’라는 것을 듣고 더욱 확신했다.

    정혁은 ‘오아시스의 대장장이’

    이제까진 자신이 ‘한’이라는 생각에 어떻게든 좋은 무기로 싸움을 이어 왔다면 지금부터는 그와는 다르게 자신의 본질적인 역할에 대해서도 고민해 봐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이야말로 정혁의 칭호에 가장 부합한 상황이 아닌가.

    “엘라.”

    엘라가 정혁을 쳐다보았다.

    “나무였던 네게 자유를 선물해 줬던 리안에게, 너에 대한 내 모든 권한을 인계해 줄 수 있다면 너는 어떨 것 같아?”

    “…무슨 소리야?”

    “어쩌면 지금, 리안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네가, 그의 소유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너와의 계약을… 끊는단 말이야?”

    엘라의 동공이 커졌다.

    이런 표정을 볼 수 있게 될 줄은 또 몰랐네.

    정혁은 웃음이 나와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날 기억해? 너의 동의를 얻기 위해 시간을 멈추고 너와 엎치락뒤치락했던 날. 네가 내게 말했잖아. 가능하다면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그가 지금 이곳에 누워 있는 거잖아.”

    엘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너는 애초에 나와 계약한 이유조차 리안을 위해서였을 텐데, 안 그래?”

    그녀가 다시 고개를 한번 끄덕했다. 에트론과 라테는 조용히 둘을 지켜볼 뿐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나에게도 그가 필요하고.”

    정혁이 천천히 입을 열어 엘라를 보며 말했다. 엘라가 정혁과 눈을 마주쳤다.

    “너에게도 그가 필요해.”

    엘라의 눈에 천천히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가능하다면, 나는… 나는.”

    엘라가 양 손바닥으로 자신의 눈을 누르며 몸을 움츠려 떨었다.

    정혁이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를 토닥였다.

    “그동안 나와 함께하느라 고생 많았어. 이제부터는 그와 함께, 그리고 여전히 우리 곁에서 이 세계의 마지막을 향해 나아가자.”

    “…그래도 괜찮을까?”

    “안 될 건 뭐야, 네 덕분에 나도 여기까지 왔잖아.”

    정혁의 따뜻한 말에 엘라가 눈을 비비며 옅게 웃었다.

    어쩌면 앞으로 볼 수 없을 가장 아름다운 미소였다.

    [양도 승인]

    정혁이 알림 창에 우측 하단 작게 반짝이는 아이콘에 승인 의사를 보냈다.

    그러자 그의 양손이 번쩍이며 황금빛 마나를 분출하기 시작했다.

    엘라는 어느새 스태프 형태가 되어 공중에 떠올랐고 정혁은 그녀를 붙잡아 리안 곁에 섰다.

    창백해진 리안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정혁은 작게 속삭였다.

    “이제 일어나서 이 빌어먹을 세상에 어떻게 하면 큰 엿을 한 사발 먹일 수 있을지 이야기해 주지 그래, 노땅.”

    스태프 끝단으로 정혁의 마나가 쏟아져 리안의 몸 전체를 감쌌다.

    이는 리안이 가지고 있던 주황빛 마나와 공명하며 엄청난 빛을 뿜어냈다.

    이 빛기둥은 천장을 뚫고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그러더니 곧 사방으로 퍼져 강렬히 발산되었다.

    라테가 재빨리 에트론을 붙잡고 정혁의 몸을 감쌌다.

    정혁은 폭발하듯 부딪친 두 마나의 힘에 밀려 뒤로 날아갈 뻔했다.

    손에서 엘라를 놓치고 말았지만 정혁은 느꼈다.

    그는 엘라를 놓친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 엘라를 잡아챘다.

    그리고 그 손길의 주인은 분명 리안, 그였다.

    ***

    가뜩이나 정신없던 찰나에 보고된 괴이한 소식에 안나는 허겁지겁 본성 지휘부에서 뛰어내려 왔다.

    정혁의 사택에 마나 폭발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곳엔 정혁도, 엘라도 있던 터라 특별히 방어 장치를 마련해 놓진 않았었는데, 놈들이 허를 찌른 건지 안나는 당황했다.

    게다가 큰 마나 폭발이었다면 본성과 그리 떨어지지 않은 사택이기에 충격이 전해졌을 텐데 이상했다.

    보고받은 바로는 빛무리가 퍼지는 것만 굉장히 강렬했다고 한다.

    점점 사택과 가까워질수록 안나는 익숙한 마나 향을 느끼게 되었다. 이는, 그녀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그 향이었다.

    “…리안 님!”

    그리고 드디어 안나는.

    이 세계의 마지막 자락에서 그녀가 그렇게 재회하고 싶었던 남자.

    완벽히 회복된 리안 에이드윈을 만나게 되었다.

    ***

    “롬…이라 했던가?”

    사지가 완전히 묶인 채 공중에 매달려 있는 처참한 몰골의 흑마법사가 있다.

    아래는 그의 신체에서 쏟아졌을 것으로 예상되는 핏물이 흥건하다.

    그러나 그저 쏟아진 것은 아닌 듯, 핏물은 어떤 형태를 바닥에 그려 내고 있었다.

    “…고맙군… 내 마지막을 이렇게 영광되게…!”

    “변태 새끼들.”

    롬이 흥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나무 의자에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너도… 이미 알겠지만. 그분의 모습을 영접하는 순간… 그 환희, 그 쾌감, 쾌락으로 정의 할 수 없는… 강렬한…… 그 어떤 것.”

    “그만, 혀를 잘라 버리기 전에.”

    롬이 불쾌한 표정으로 인상을 구겼다. 그러자 흑마법사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것도… 나쁘지 않고.”

    “아이, 참 이거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거야.”

    롬이 혀를 차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흑마법사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

    그러자 그의 몸이 서서히 붉게 달궈지기 시작했다.

    그를 묶고 있는 4개의 돌기둥, 그리고 아래에 피로 그려진 마법진.

    이는 곧 그를 제물로 바치는 것과 같았다.

    가뜩이나 어두운 주변이 더욱 어둡게 잠식되는 것 같았다.

    롬과 롬을 지키는 정예 플레이어 넷은 이에 경계하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더더욱 흑마법사의 몸은 붉게 달아올랐다.

    마치 곧 폭발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정확히 일치했다.

    파직 하는 불편한 균열음이 일더니 그의 몸이 찢어져 갔다.

    그리고 붉은 기운이 피와 함께 사방으로 퍼졌다.

    예상보다 더 끔찍했다.

    롬은 방어진을 펼쳐 그의 주변을 깨끗하게 유지했지만 그 외의 지역은 사방이 피 칠갑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아크의 모습이 천천히 어둠을 걷으며 드러나기 시작했다.

    불타오르는 해골에 돋아난 위협적인 두개의 뿔.

    마치 황소를 연상케 하는 상체와 말의 하체, 발굽.

    그리고 우락부락한 네 개의 팔.

    각각의 팔에 쥐어진 우악스런 무기들엔 하나 같이 지저분한 핏덩이들이 더덕더덕 붙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필드에서 만날 수 있는 괴이한 악마들과 다를 것 없는 모습이라고 롬은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전신에서 뿜어지는 마계의 암흑 마나는 감히 롬조차도 상대하기 힘들다고 여겨지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롬은 보았다.

    그의 한 손에서 반짝이는 반지를 말이다.

    그는.

    “그래….”

    아크가 이죽였다.

    “비록 지상에서의 전쟁에선 내가 졌지만… 군주들의 파멸로 약해진 악마왕은 내 손에, 완전히 소멸했다!”

    아크가 웃어 젖히는 소리에 그의 곁에 있던 네 명의 플레이어들 모두 귀를 말고 몸서리쳤다.

    그러나 롬은 여전히 껄끄러운 표정으로 아크를 노려볼 뿐이었다.

    “어때, 악마왕이 된 소감은?”

    롬의 비아냥거림에 아크가 미소를 잃지 않고 말했다.

    “하찮은 것이 감히 지껄이긴, 뭐, 그래도 오늘은 너를 죽이고 싶지 않다.”

    “하……!”

    “네 거만함에 치가 떨리지만 나는 알고 있지. 네놈이 왜 나를 찾았는지. 네놈은 사실…….”

    순간 아크가 사라졌다가 롬의 얼굴 곁에 나타났다.

    롬은 자신이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는 것에 스스로 놀라면서도 동시에 그의 곁에 있던 네 명의 플레이어가 모두 목이

    잘린 채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당황하기 시작했다.

    “두렵지.”

    아크가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인간들이란, 그 감정.”

    피 범벅이 된 머리 중 하나를 들고 아크가 롬 앞에 섰다.

    그는 뚝뚝 떨어지는 핏물을 두 손으로 받았다가 다시 아래로 흘려보내며 머리를 집어던졌다.

    “그 감정을 이용하는 것이 참 재밌단 말이야. 지금 네 모습을 봐라. 방금까지만 해도.”

    아크가 롬을 보며 한껏 비웃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이, 무엇이라도, 되는 것마냥, 하하!”

    롬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지금은 어때, 어떻지? 네놈보다 더 강하고 더 잔혹한 존재가 네놈 앞에 있으니 어떻지? 그런데 뭐? 니들끼리 뭘 해? 어쩌고 뭘?”

    아크가 네 개의 손을 비비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용의 가호를 받았으니까아- 뭐 이딴 소리로 자위나 하는 주제에 말이야…. 아니, 아니, 롬.”

    아크가 롬의 곁으로 다가와 손가락으로 그의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롬이 불쾌하다는 듯 고개를 틀었다.

    “그래, 롬 너는 사실, 그 계집애, 그 계집애 마음에 들고 싶은 거야, 그치이-?”

    “…이제 닥치지 그래.”

    롬이 의자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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