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48화 (148/200)
  • ◈148화

    “최대한 공중에서 터트려!”

    안도리니의 접경지에서 제논의 병력들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밤도 아닌데 공중을 수놓은 밝은 빛들이 무엇인지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것은 무수히 많은 마나 미사일들이었다.

    대개 마나 미사일 하면 무슨 마법의 일종일진대 안도리니의 기술은 현실에 있는 실질적인 미사일의 파괴력에 마법을 더해 핵미사일보다 더 강하고 파괴력이 센 아종을 만들어 냈다.

    큰 덩치 덕분에 발견하기 쉽고 격추하기 쉽지만 단 한발이라도 떨어진다면 대지가 갈라지고 원형으로 주변 10km정도는 너끈히 소멸될 것이다.

    마법사들과 원거리 궁수들이 힘을 모아 한 발 한 발 떨어트리고 있긴 하지만 그 미사일의 파급력을 익히 알기에 식은땀을 흘리며 집중하고 있다.

    욘마곤 후방에 마련된 기지에서 쉬고 있던 정혁에게도 이 소식이 들려왔다.

    더불어 이들이 쏘아 보낸 미사일은 비단 이곳, 타이런 대륙만 노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카탈, 그곳이 위험하다.

    정혁은 이곳의 모든 권한을 김창수 사령관에게 인계하고 급히 카탈로 향하는 포탈에 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카탈의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카탈은 단순히 미사일 공격만 받은 것이 아니었다. 안도리니의 공세는 생각보다 교활하고 치밀했다. 카탈의 곳곳은 안도리니 소속 778 특임대의 산발적인 게릴라성 공격에 휘둘리고 있었다.

    다행히 제논과 동맹 관계인 아린의 은행나무 엘프 군대와 제논의 치안대가 사력을 다해 여기 저기 방어 중이었고 안나는 전반적인 전시 상황을 지켜보며 변수를 판단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정혁이 본성의 지휘부로 들어섰을 때 안나는 정혁을 보며 고개를 몇 번 저었다.

    그러곤 그가 가까이 오자 작게 한마디 건넸다.

    “엘라에게 가 봐, 리안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

    “…왜?”

    갑작스러운 소식에 안나에게 물었지만 안나는 대답하지 않은 채 카탈 전역을 비추고 있는 마법구를 팔짱을 끼며 지켜볼 뿐이었다.

    정혁은 몇 마디 더 건네려다 말고 리안이 회복 중이었던 그의 집으로 향했다. 넓은 마당을 급히 걷던 정혁은 생기를 잃어가는 마당에 심긴 은행나무를 보며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엘라!”

    정혁이 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리안이 누워 있는 방에서 엘라가 모습을 비쳤다. 그녀는 상당히 슬픈 눈으로 정혁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데?”

    정혁이 다급히 묻자 엘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모르겠어, 어느 순간 갑자기 그에게 차오르던 모든 생기가 바닥으로 흡수되듯 꺼져 갔어. 내가 최선을 다해 회복시키려 했지만 나의 힘으로도… 방법이 없었어.”

    이렇게나 기운 없는 목소리의 엘라는 본적이 없었다.

    그녀가 마나석 동굴에서 자신을 도우러 왔을 땐 아마 리안의 회복 가능성이 높아 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없어도 자신의 회복 마법과 에트론의 회복 마법으로 리안이 곧 일어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을 테니 먼 길이지만 그를 두고 타이런의 마나석 동굴까지 올 수 있었을 테지.

    정혁도 그쯤은 이해할 수 있었다.

    마나석 동굴을 찾은 그녀의 얼굴과 목소리에서 긍정적인 신호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정혁의 입장에서도 리안은 반드시 일어나야만 하는 존재였다.

    세계의 모든 이면과 현실 세계의 한 장면을 보았다고 하지만 이 모든 사실이 완전히 머릿속에서 정리된 것은 아니다.

    자초지종을 들으려면 가장 핵심적인 키를 쥐고 있는 첫 번째 선택자, 리안 에이드윈이 필요했다.

    드웨이크가 깨어나고 며칠이 지났지만 정혁은 그를 만나지 않았다.

    마나 동굴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 괴이한 궤적과 자신의 책임 아래서 정혁은 심각한 혼동을 겪고 있다.

    이 혼동의 바람은 쉽사리 꺼지지 않았다.

    이 마음이 정리되기 전까지는 그와 만나도 어떤 이야기를 나누기 힘들 것 같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아무리 많은 병력들을 이끌고 있고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이 많다고 해도, 자신의 정체성 즉, 본질이 틀렸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아, 그렇구나 하고 넘길 수 있는 존재는 세상에 없을 것이다.

    정혁도 사실 공허함에 사무쳐 있다.

    자신의 ‘생성’과 현재까지의 과정들,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비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정혁은 이 찝찝함을 채우고 싶었다.

    젠트라 그의 말처럼, 노래하는 화산에 가 보기 전 그는 리안에게 조금이라도 자신의 이 갈증을 채우길 원했다.

    그가 곧 일어날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왜… 이렇죠?”

    어느새 나타난 에트론이 리안의 주위를 돌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라테 역시 정혁의 곁에서 가만히 리안을 내려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엘라.”

    정혁은 안절부절 못하는 엘라를 보며 조용히 그녀를 불렀다.

    엘라는 고개를 돌려 정혁을 보았다.

    그녀의 두 눈은 이미 슬픔으로 잠식되어 있었다.

    “더 시간을 끌 순 없을 것 같은데, 이제 이야기해 줬으면 해. 너와 그는 무슨 관계인거야?”

    엘라는 가만히 정혁을 바라보았다.

    지금이 때가 아니라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지만, 그렇기에 정혁은 더욱 지금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지금 혼란스럽고 의지할 곳이 없어 보였다.

    당차고 싸가지 없는 그녀였지만 리안 옆에만 있으면 한없이 순한 양과 같았다.

    그녀라면 리안이 어떤 사람인지, 그가 무엇을 짊어지고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지 않을까.

    “리안은…….”

    엘라가 리안을 보며 말끝을 흐리다가 뭔가 마음이 선 것처럼 정혁을 다시 보며 그와의 묻어 둔 사연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은행나무 군락지에서 가장 높고 가장 아름다운 은행나무였던 엘라는 오랜 시간 은행나무 엘프들의 동경과 보살핌, 그리고 경외함을 받으며 군락지 전체에 자신의 존재감을 떨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만큼 그녀를 파괴하려는 자들도 많았다.

    카탈은 수세기 동안 다양한 종족들의 크고 작은 영토 분쟁 속에 있었고 전쟁이 커지면 커질수록 은행나무 엘프의 영토에도 몇몇 불씨들이 닿았다.

    은행나무 군락지는 몇 겹의 방어 마법으로 아무나 쉽게 들어오고 나갈 수 없게 설계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마법을 기반으로 세계를 돌아다니는 마법사들에게는 은행나무 엘프들의 고등 방어 마법 역시 그렇게 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마법사들에게 엘라는 타고난 영약 같은 것이었다.

    만 년이나 된 은행나무.

    이는 곧 세계의 모든 에너지를 만 년이나 축적하고 있었다는 뜻이고 이 축적된 마나를 원하는 마법사들이 생길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소문이 점점 퍼지고 엘라의 존재가 카탈을 넘어 타이런 대륙까지 전해지기 시작하자 은행나무 군락지 내부에서 빚어지는 마찰의 횟수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엘라는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때의 그녀는 그저 ‘나무’에 불과했다.

    시간이 지나고 마나가 그녀의 몸에 축적되면서 그녀도 자아를 가지고 군락지의 모든 존재에 대해서 느낄 수 있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뿌리를 들어 움직이는 고대 엔트들처럼 자신의 몸을 움직이거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더 답답한 상태로 긴 시간을 보내게 될 터였다.

    은행나무 군락지, 신성한 안토안에 화마가 들이 닥친 건 그 즈음이었다.

    오직 엘라를 베어 내기 위해 밀집한 몇 만의 인간 군대가 은행나무 군락지를 밀고 들어왔다.

    재빨리 은행나무 엘프들이 반응하고 그들의 유명한 까마귀 편대가 비행하며 날아들었지만 인간들의 힘을 누르지 못했다.

    은행나무들의 비명이 엘라에겐 들렸다.

    그러나 엘라가 할 수 있는 것은 은행나무 엘프들이 전투에서 승리하기만을 바라며 그녀가 뻗은 뿌리 곳곳에서 그들을 위한 마나 꽃을 피우는 것뿐이었다.

    영롱한 노란색 거대한 은행나무는, 그렇게 만 년의 긴 세월을 살아가던 나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사 주체를 모두 다른 이에게 맡긴 채로 안절부절못할 뿐이었다.

    그때, 엘라는 자신의 몸에 누군가 손을 대었음을 느꼈다.

    눈이 없기에 그를 볼 순 없었지만 따뜻한 손길만큼은 충분히 느껴졌다.

    “엘라. 네 이름이구나.”

    손길만큼이나 따뜻한 목소리였다.

    “너를 오래 보았다. 너의 답답함을 오래 보았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나무로서의 삶을 살아감을 너무 오래 보았다. 내가 너에게 조금, 아주 조금의 가능성을 줄 수 있다면 너는 어떻게 하고 싶으냐.”

    입이 있다면 대답하고 싶었다.

    좋다고, 무조건 좋다고.

    그렇게 해달라고.

    “하지만 엘라, 어쩌면 삶이라는 건, 네가 나무로 있을 때보다 더 치열하고 고통스러울지도 모른다. 너는 여전히 이 은행나무 군락지에서 벗어나지도 못할 것이며, 알아 가는 것이 많을수록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너는 너의 삶을 조금이나마 바꾸고 싶은 것이냐.”

    엘라는 사력을 다해 자신의 가지를 떨었다.

    그러자.

    지나치던 바람이 그랬을까, 아니면 강렬한 그녀의 바람이 그랬을까.

    찬란한 은행잎들이 우수수 주변으로 떨어져 내린다.

    “그래, 엘라. 네 뜻이 그러하다면, 내가 너에게 가능성을, 그리고 미래의 씨앗을 심어 주마.”

    그때, 알 수 없는 자의 따뜻한 손길이 그녀의 몸 전체를 감싸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어떤 강렬한 마나가 뿌리 끝부터 가지 끝까지 이어져 나갔다.

    은행나무들의 비명과 엘프의 고함이 반복되는 끔찍한 전쟁의 화마 속에서 엘라는 난생처음으로 자유라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자유, 그것이 사고적으로 이해되기 시작하자 엘라는 뿌리를 움직일 수 있는 자유에 대해서 깨닫기 시작했다.

    가지를 자신이 원하는 모양으로 비틀어 낼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볼 수 없었던 것이 아닌 볼 수 있었으나 보지 못했던 것뿐이라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그녀는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도 진심으로 느끼게 되었다.

    대지가 진동했다.

    엘라는, 자신의 만 년의 삶 속 가장 복합적이고도 획기적인 사고를 통해 한계를 뚫고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전쟁을 벌이던 모두가 멈춰 섰다.

    만 년이 된 찬란한 은행나무가 땅 속 길게 뻗은 모든 뿌리를 정리하고 지상으로 일어서는 순간을, 이 기적 같고 비현실적인 순간을 목도하고선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엘라는 눈을 떠 자신의 곁에 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한쪽 팔을 가슴에 대고 작게 목례했다. 할 수만 있다면 자신도 그에게 더 겸손히 인사를 건네고 싶었다.

    “엘라, 너는 이제부터 자유지만, 동시에 자유가 아니란다.”

    “……르에……?”

    “왜냐구?”

    입이 있다고 믿자 말이 나왔다. 고대 엔트어였지만 남자는 이해하는 것 같았다.

    “글쎄, 사실 모두가 그렇단다. 모두가 자유이지만 자유가 아닌 삶을 살지. 하지만 그건 자신이 주체적으로 선택해 가는 삶을 누리는 존재들만 느낄 수 있는 아이러니니까, 엘라, 너도 이제부터 그 아이러니와 싸우게 될 게야.”

    “우, 우리나테, 데, 데모라…….”

    “고마워 할 것 없다네. 언젠가 내가 당신께 고마워할 일이 분명 있을 테니… 엘라.”

    처음 뜬 눈과, 처음 나온 목소리로 그를 제대로 볼 수 없고 똑바로 자신의 마음을 전할 순 없었지만 엘라는 그 순간 그에게 자신의 만 년 동안의 삶 속에서 느끼지 못했던 포근한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부디 다시 만나는 날까지 그 시간들이 행복하기만을 바라네.”

    남자가 어디론가 가려고 하자 엘라가 급히 그를 불렀다.

    “리, 리네로…!”

    “…리안, 리안 에이드윈. 걱정 말게, 늘 그랬듯 내가 너를 먼저 찾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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