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47화 (147/200)
  • ◈147화

    모험가들이 왁자지껄 모여드는 에도라 왕국의 동남쪽 외곽 경계 초소엔 유명한 여관이 하나 있다.

    기가 막힌 청량감으로 여행자들의 피로를 씻겨 주는 라거 맥주가 일품인 이곳에는 항상 어딘가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전쟁의 소문이나 유명한 몬스터의 토벌 작전, 몇몇 길드들의 승전보가 안줏거리가 되곤 한다.

    지금도 한창 사냥 시즌이라 마땅히 떠들썩해야 하지만 요 근래엔 이상하게도 무거운 적막 속에 조용한 중얼거림만 남아 있다.

    어쩌면 타이런 대륙 전체에 감돌고 있는 불쾌한 전운과 사방에서 드러나고 있는 이해할 수 없는 일련의 사건들이 플레이어들의 기를 죽이고 있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데릭과 잭슨은 이 여관의 한쪽 벽에 몸을 기대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들을 주시하는 플레이어들은 없었다.

    두건과 망토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이 그들을 알아볼 수도 없었다.

    주인장이 그들에게 라거 맥주 두 잔을 가져다주곤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금화 두 닢을 챙겨 돌아갔다.

    잭슨은 가만히 톡톡 터지고 있는 맥주의 표면을 바라보다가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지켜보기만 하는 데릭을 힐끔 보곤 조용히 말했다.

    “연기까지 소질이 있으실 줄은 몰랐네요.”

    잭슨의 말에 데릭은 곁눈질로 잭슨을 살짝 보곤 어깨를 으쓱하며 퉁명스레 대답했다.

    “무리를 이끄는 자는 어쩌면 훌륭한 연기자일 수도 있는 겁니다.”

    잭슨 역시 그의 말에 피식 웃으면서 맥주잔을 들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다만 데릭은 최대한 주사위에 높은 숫자를 쥐고 싶을 뿐이다.

    랭커들을 충분히 자극했다. 안도리니의 사이코, 제이크와 에도라의 머저리 롬.

    그리고 그 외에 감정적인 랭커 유라와 아룬.

    앤은 자연스럽게 이 전투에서 빠지고, 린은 결국… 롬을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직은, 아직은 아니겠지만.

    “…여물길 기다리고 있군요.”

    잭슨의 곁을 지나 2층으로 올라가는 몇몇의 플레이어들을 주시하며 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당연합니다. 그들에겐 당장에라도 물고 싶은, 덤비고 싶은 목표가 될 테니까요. 특히 롬, 그자에겐 말입니다.”

    “언제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사실을 묵인하며 기다릴 생각이죠?”

    “롬이… 뿔피리를 우렁차게 울리는 순간, 그때까지. 혹은, 린 그 여자가 제 예상외의 행보를 걷게 되는 순간까지.”

    “뭐, 의장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럼 앞으로 저희는요?”

    데릭이 몸을 돌려 잭슨을 바라보았다.

    그를 따라 대륙을 떠돌며 많이 피폐해진 그였다.

    자신의 모습도 그러하리라.

    의회에서 말끔한 옷차림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며 연설하고, 또 다양한 의제들을 나누며 결정하던 권위 있는 모습은 이제 없다.

    마치 부랑자처럼 누더기 옷이나 걸쳐 입고 얼굴을 숨기고 기척을 숨기며 어둠 속에서 돌아다닌 지 한참이다.

    그러나 이젠 그들도 멈출 수 없다.

    멈추기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앞으로를 계획하고 더 치열하게 달려야 한다.

    제논은 생각보다 더 빠르게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데릭이 가장 억울한 것은 바로 조용한 그들, 검은 말 조직이었다.

    제논이 본격적으로 욘마곤에서 마계의 세력들과 상대할 때 어쩌면 검은 말 조직이 제논의 뒤를 치기 좋은 시기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왜?

    왜 그들은 그 좋은 타이밍을 두고, 그들의 강함을 숨기며 안도리니 쪽에 더 공을 쏟고 있는가?

    데릭은 아직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허점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데릭이 품에서 손을 들어 테이블을 한 번 훔쳐 내고 손을 펼쳐 마나를 이용해 타이런 대륙의 지도를 만들어 냈다.

    제논이 장악하고 있는 남서쪽 욘마곤, 북동쪽의 안도리니, 그리고 북서의 에도라.

    가운데에 활활 타오르는 노래하는 화산이 있다.

    이미 안도리니와 욘마곤은 두세 차례 큰 마찰로 접경지에서 전쟁이 한창이다.

    에도라는 이를 주시하고 있다.

    욘마곤에는 제논이 함께한다.

    안도리니는 검은 말 조직이, 그리고 에도라 전역에는 에도라 국민들에게 우호적인(?) 마계의 악마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미 소문은 파다하게 퍼졌다. 국왕 롬이 곧 마계의 대 악마 아크와 계약할 것이라는 풍문이 말이다.

    이는 에도라 국민들과 플레이어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보통 마계니, 악마니 하는 것들은 악한 존재로 치부되고 플레이어들 입장에서는 때려 잡아야 하는 존재들이 아닌가.

    그런데 한 국가의 왕이 그들과 손을 잡는다는 소문. 이게 과연 옳은가, 하는 본질적인 의문이 그들 사이에서 일렁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악한 롬은 그 이후 곧바로 왕국 내 우호적이거나 확고한 플레이어들, 그리고 동맹들에게 전언을 보냈다.

    아크와의 계약을 통해 서로 얻을 수 있는 이득과 그가 그리고 있는 에도라의 미래, 제논의 성장와 안도리니의 불쾌한 도발 등, 현재 처한 모든 상황들을 나열하며 스스로 이 동맹을 불편한 계약이라고 칭했다.

    데릭은 알고 있다.

    롬은 지금 일생 일대 최고의 흥분도를 가슴에 품고 어찌할 줄 모르며 날뛰고 있을 것이다.

    누가 그러지 않던가, 세상의 끝을 본 사람은 더 이상의 재미와 즐거움도 남아 있지 않은 사람이라고.

    어쩌면 ‘한’이 그런 미치광이가 된 것도 이와 같은 이치였을 것이다.

    롬은 그 수순을 밟기 일보 직전 세상이 끝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을 것이다.

    데릭은 지금 그의 이 마음에 더 큰 폭발을 안겨 주고 싶지만 아직은, 방금 잭슨과 나눈 대화처럼, 아직은 아니다.

    곧이다.

    이 플레이어들의 연합되지 않는 마음들은 치열한 전투를 통해서 하나로 합쳐질 것이다.

    아무리 악마들이 싫다고 해도 자신의 곁에서 압도적인 파괴력과 끈질긴 생명력으로 전장을 누비고 다니는 그들을 보면 없던 전우애도 생길 것이 뻔하다.

    인간은 지극히 이해타산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잭슨은 데릭이 그려 놓은 지도 속에서 앞으로를 그려본다.

    과연 그들의 계획대로 에도라는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을 것인가.

    - 똑똑.

    그 사이 누군가 그들의 테이블을 두드렸다.

    잭슨과 데릭은 자신들이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에 놀라면서 당당히 그들에게 모습을 드러낸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박…달수?”

    그들의 앞에 선 남자는 제논의 수비대장, 박달수 였다.

    ***

    “너희의 준비는 진즉에 끝났지만 아직 세계의 온도가 미지근하구나. 그러나 이제….”

    “예….”

    어둠 속에서 말쑥한 정장을 입은 남자가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

    10평 남짓 되는 공간에 한쪽엔 구체가 푸르스름한 빛을 발하고 있었고 그 빛 속에서 중저음의 목소리만 흘러나오고 있을 뿐이었다.

    그 구체를 향해 남자는 예의를 갖추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 세계의 적이 완벽하게 규정되었고, 시계의 초침을 거듭 빨라지고 있다. 우리가 너희를 지원하고, 우리가 너를 세운 이유. 이제 그 대가를 회수할 차례다.”

    “준비하며 바라고 있던 바입니다.”

    “장렬히… 산화하라.”

    “반드시…!”

    남자가 고개를 들어 구체를 바라보았다.

    안도리니의 지도자, 제이크였다.

    그날 최종적인 브리핑을 마치며 안도리니의 모든 부서에 전쟁의 신호탄을 날리고 대기 중이었다.

    그러나 알파는 그에게 그 이후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그가 알파와 대면하기 위해 만든 이 비밀 공간에서 지낸 시간도 한참,

    갑작스레 등장한 알파의 목소리에 제이크는 떨리는 마음으로 화답했다.

    “시작. 하라.”

    “예…!!”

    구체는 산산조각 나 사방으로 흩어졌다.

    제이크는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켜고 목을 풀었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완연했다.

    어둠 속에서 벗어나 밖으로 몸을 옮긴 그를 반기는 것은 며칠 새 피곤함이 역력해진 그의 참모진들이었다.

    제이크는 거침없이 그들을 지나 중앙 제어 본부로 향했다.

    다양한 전자기기들이 시시각각 안도리니 영토의 각 핵심 전략지를 비추고 알람들과 위험해 보이는 버튼들이 가득했다.

    제이크는 그것들 사이 하나의 버튼 앞에 섰다.

    모두가 그를 지켜보며 긴장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제이크는 그들을 보며 활짝 웃었다.

    “내가 시작하고 그들이 맺으리라!”

    알 수 없는 외침과 함께 빨간 버튼을 강하게 누른 제이크의 뒤로 거대한 화면을 통해 엄청난 수의 미사일이 공중으로 솟구쳐 오르는 것을 비춰 주었다.

    “이제… 시작이다…!”

    제이크는 희열에 찬 표정으로 괴랄한 웃음소리를 뱉어 대기 시작했다.

    그러곤 천천히 화면 앞으로 다가갔다.

    일제히 발사된 미사일들은 찬란한 빛을 뿜어내며 상공으로 날아간다.

    제이크는 그것들을 흡족하게 바라보다가 화면 위에 양손을 올렸다.

    파직거리는 전류가 그의 몸을 짜릿하게 만든다.

    불쾌할 법도 한데 그는 손을 떼지 않았다.

    어깨를 들썩일 정도로 웃어 젖히던 제이크는 몸을 휙 돌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많은 수의 플레이어들을 향해 소리치기 시작했다.

    “아둔한 자들아! 이제 진정한 게임이 시작된다! 이 모든 괴로움의 족쇄를 풀고 이제 진짜 게임을 시작하자! 누가 이길까, 너희? 아니면 우리? 아무도, 아무도 모르겠지!”

    확신에 찬 그의 목소리에 공감할 자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 그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다.

    그는 계속해서 아이러니한 문장들을 쏟아 냈다.

    “멍청한 것들이 알기엔 너무나 넓고 너무나 잔혹한 세계니까! 너희는 그냥 그곳에서 계속해서 소모되어라! 나는, 우리는 더 높은 곳에서 너희의 피와 너희의 고통으로 즐거이 삶을 영위할 테니!”

    양손을 높게 뻗은 제이크가 희열에 차 몸을 부르르 떨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몇몇 사람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그의 뒤로 펼쳐진 화면 속에 몇몇 미사일들은 이미 공중에서 하나둘 격추당하고 있다.

    그럼에도 제이크는 아랑곳없이 고개를 숙인 채 이죽이고 있다가 머리를 번쩍 들어 좌중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그가, 돌아온다. 진짜 그가!”

    그러곤 강하게 한 손으로 화면을 내리치며 더 큰 소리로 소리쳤다.

    “한! 그가 돌아온다아아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