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45화 (145/200)
  • ◈145화

    정혁은 자신의 마나를 드웨이크에게 흘려 보았다.

    이들의 눈에는 감지되지 않을 만큼 약하게.

    테스트해 보고 싶었다.

    정혁은 불칼을 정리하고 욘마곤으로 돌아오면서 자신의 지난 걸음들을 총체적으로 복기해 보았다.

    욘마곤에 세워진 제논의 전초기지까지 돌아오는 데 걸린 시간은 꼬박 3일.

    물론 곧바로 차원 문 등을 이용할 수 있었지만 정혁은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 복귀해야 할 병력들과 함께 욘마곤으로 이동했다.

    그 과정에서 정혁은 자신의 삶이, 강철망치에서 지금까지의 모든 여정이 어쩌면 전부 계획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확실한 부분부터 정리해야 했다.

    일단 자신은 ‘한’이 아니다.

    그저 그의 기억을 이식받은 프로그램일 뿐.

    또한 어딘가 사라진 ‘한’이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

    이것을 제일 조심해야 한다.

    아무리 주입된 기억이라 하더라도 정혁은 피부로 ‘한’이 얼마나 강한지를 알기 때문이다.

    자신은 오아시스에 노예가 되어 있는 사람들을 해방시킬 마지막 키가 되었다.

    이제까지 모든 제약들을 견뎌 가며 자신까지 희생시킨 어떤 바이러스가 만들어 낸 독득한 개체.

    그것이 바로 지금의 자신이다.

    오아시스의 일반적인 프로그램,

    즉, 제한적인 자유의지를 가진 일반적인 NPC와 각 종족들은 내부에 심겨진 큰 틀에서의 제약 속에서 반복적인 패턴을 가지고 행동하기 마련이다.

    이 제약의 범위가 워낙 넓기 때문에 일반적인 플레이어들이 이를 눈치채지 못할 뿐, 그들은 모두 자신의 틀 안에서 제한적인 행동을 반복한다.

    이런 프로그램의 법칙에 따르면 정혁 역시 주입된 일련의 과정들이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과정들이 로드맵으로 설정되어 있기에 지금까지 버텨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까지 수십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엘라가 마나석 동굴에서 했던 말이 생각났다.

    결국 죽음의 문턱까지 다다라야 어떻게든 성장을 하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들 역시 우연과 운이 아니라 계획과 목적이 있었다고 한다면 말이 된다.

    그런 측면에서 드웨이크를 바라봤을 때 정혁은 그가 결코 가벼운 인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조 패더럴?

    그는 지금 정혁의 대장간에서 이 모든 병력들이 더 강한 힘을 낼 수 있는 각종 무기와 장비들을 만들고 정혁의 대장장이 숙련도를 올리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해 냈다.

    그는 심지어 프로그램이 삭제되었을 텐데도 복구되어 오아시스에게 탐지되지 않는 것 같은 정혁의 대장간에서 일을 하고 있지 않은가.

    에드가는 어떤가?

    에드가는 결국 정혁의 드래곤이 되었다.

    에드가는 젠트라의 소멸로 인해 자신의 존재 의미를 잃었었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이 유일한 황금빛 드래곤으로서 젠트라의 찌꺼기가 아닌 자신의 이름을 가진 드래곤이 되어 정혁의 엄청난 전력이 되지 않았나?

    그렇다면 드웨이크는?

    드웨이크는 정혁을 제논으로 이끈 남자다.

    그는 에드가나 조 패더럴과 달리 플레이어였다.

    계획되어 있지 않은 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드웨이크가 키메라와의 전투에서 정혁을 만나고 그를 보호하고 그의 가능성을 알아봤다.

    그의 첫 단추로 인해, 어쩌면 하늬안을 정혁에게 붙인 선택에 의해 정혁의 여정은 지금까지의 길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라면 드웨이크는 결코 지금 이곳에서 쓰러질 남자가 아니다.

    애초에 그가 쓰러진 이유조차 너무 황당무계했다.

    수도 없이 많은 고위험 레이드에서 수도 없이 많은 승전보를 안고 돌아온 자다.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해답을 만들어 내고 김창수조차 그의 전투 능력을 인정했다.

    그런 남자가 적의 단순한 공격 패턴에 의해 치명상을 입었다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이런 의문에 따라 정혁은 자신의 마나를 드웨이크에게 흘려 보낸 것이다.

    그러자 드웨이크의 몸이 작게 반짝였다. 물론 하늬안이나 박달수에겐 느껴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알림]

    - 당신은 지금 당신이라는 존재에게 부여된 마지막 퀘스트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 내용을 확인하시겠습니까? 이제부터는 결코 돌이킬 수 없게 됩니다.

    - Y / N

    정혁은 자신의 눈앞에 띄워진 알람을 보고 잠시 고민했다.

    예상 대로 뭔가가 더 숨겨져 있다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만 한편으로는 웃겼다.

    뭘 돌이킬 수 없다는 건가.

    어차피 이제 마지막을 향해 모두 달려가고 있다.

    각자 알고 있는 진실의 범위가 다를 뿐, 다른 정의를 가지고 찬란한 마지막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검은 말 조직도, 마계도, 안도리니, 에도라도 모두를 꺾고 제논이 그 중심에 서야만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지막으로 버티고 있는 오아시스. 그 빌어먹을 놈의 면상을 좀 봐야겠다.

    정혁은 거침없이 ‘Y’를 선택했다.

    그러자 정혁의 전신에서 황금빛 마나가 뿜어져 나왔다. 이 강렬한 마나는 하늬안과 박달수를 곧바로 기절시켜 버렸다.

    [오아시스의 대장장이가 자신의 마지막 에고 장비를 획득하려 합니다. 던전에 진입합니다. 승낙 하시겠습니까? Y/N]

    이건 또 무슨 말인지.

    정혁은 코웃음을 치면서 다시 한번 승낙했다.

    그의 몸은 어딘가로 빨려 들어갔다.

    ***

    “어으아악!”

    “제발… 제바아알…!”

    “제발, 죽여 줘, 제발…!”

    정혁은 붉은 알람 같은 것이 번쩍이는 낡고 오래된 창고 같은 곳으로 이동되었다.

    그는 그곳에 있었지만 또 그곳에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창고는 엄청 넓었고 비명이 가득했다.

    중심부에는 빠르게 회전하고 있는 엔진 같은 것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 기계로부터 뻗어 나오는 기괴한 형태의 줄기들이 밀봉되어 있는 두꺼운 비닐 팩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붉은 빛이 번쩍 거릴 때마다 사방에서 곡소리가 터져 나왔다.

    사람들은 두꺼운 비닐 팩 안에 갇혀 있었다.

    양팔과 다리가 묶여 마치 십자가에 매달린 형태로 고정되어 있고 그들의 목덜미와 가슴 부위에 창고 바닥에 나열되어 있는 괴이한 기계 장치로 이어지는 줄기가 박혀 있었다.

    그들의 곁으로 두 주먹을 합친 것과 비슷한 크기의 드론들이 계속해서 날아다니고 있었다.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사람들에게 드론들은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눈을 뜬 사람들에게는 드론들이 다가가 일정한 주기를 가지고 어떤 약물들을 주입했다.

    그것은 줄기로 주입되어 팩 안에 갇힌 사람들의 신체로 주입되었고 그들은 이 의문의 약물이 주입될 때마다 눈동자를 뒤집으며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고통의 비명이 그때마다 터져 나왔다.

    정혁은 재빨리 몸을 움직여 드론 하나를 낚아채 보려고 했다.

    그러나 드론은 그의 손에 닿지 않았다.

    분명 닿았지만 마치 실재하지 않는 것처럼 통과했다.

    그러나 드론은 그 자리에서 멈춰 서서 뭔가 인식한 듯 좌우로 흔들거리며 사방을 스캔했다.

    조금은 위험한 걸까.

    정혁은 어둠 속에 다시 숨어 붉은 빛이 번쩍일 때 최대한 자신의 몸을 비춰 볼 수 있는 곳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우연히 발견한 어둡게 코팅된 얇은 막에서 비춰진 자신을 바라보았다.

    자신은 흐릿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영혼 같은 형태로 이곳에 있는 것 같았다.

    그럼 이곳은 뭘까

    던전? 아니지, 절대 아니다.

    안도리니의 수도 요동치는 엔진에 가면 이런 장면을 볼 수 있을까? 아니, 글쎄. 이 정도 수준은 아닐 것이다.

    이런 괴이한 던전은 본 적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을 것 같다.

    그렇다면 이곳은 어쩌면, 어쩌면.

    “…현실 세계…?”

    정혁은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맞다. 이곳이다.

    이곳이 진짜 플레이어들의 몸이 있는 현실이다.

    젠트라가 말한 대로, 오아시스에 정복된, 인간이 자원인 세계 말이다.

    그렇다면 저렇게 눈을 떠 비명을 지르고 있는 자들은 무엇이고 눈을 감고 있는 자들은 무엇일까?

    정혁은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드론들은 정혁이 그들과 직접적으로 접촉하지 않는 한 그의 움직임 따위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그때 정혁은 조금 특이한 사람을 발견했다.

    드론이 접근해 줄기에 약물을 주입했지만 그 사람은 입술을 깨물고 눈을 감은 채 어떤 비명도 지르지 않고 있었다.

    전신이 미묘하게 떨렸지만 그럼에도 묵묵히 모든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드론은 줄기를 톡톡 건드리곤 어딘가로 날아갔다.

    입술을 얼마나 강하게 깨물었는지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미 그의 몸은 흘러 굳어진 핏덩이들로 지저분했다.

    아마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견디고 있는 것 같았다.

    정혁은 그 사람의 곁으로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사람들은 마치 옷걸이처럼 3개의 층을 이루고 굵은 프레임에 연결되어 매달려 있었는데 그 사람은 두 번째 층에 위치해 있었다.

    정혁은 옆에 난 계단을 통해서 드론들의 움직임을 파악해 가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남자였다.

    그는 결코 눈을 뜨지 않았고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고통을 씹어 삼키는 것만 같았다.

    어딘가 익숙했다.

    정혁이 반드시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

    그를 이곳으로 불러 낸 사람.

    정혁은 머뭇거리다가 작게 입을 열었다.

    “드웨이크?”

    정혁의 한마디에 남자가 눈을 번쩍 떴다.

    피폐한 얼굴에 퀭한 눈동자가 좌우 사방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그의 눈엔 정혁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이내 남자의 눈동자에 초점이 흐려지고 있었다.

    “드웨이크, 접니다.”

    다시 한번 정혁의 목소리가 울리자 남자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정혁을 분명히 바라보며 동공이 한번에 확장되었다. 그는 정혁이 보이는 것 같았다.

    드웨이크의 두 눈에 가득 눈물이 고였다.

    “뭐, 뭡니까. 어, 어떻게 된 겁니까.”

    드웨이크가 힘겨운 말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드론들이 들을 법했지만 그들은 그들의 할 일을 할 뿐 관심조차 갖지 않았다.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된건지.”

    “정혁 님… 저, 절대… 죽지 마십시오….”

    드웨이크는 눈을 깊게 한 번 감았다 뜨며 말했다.

    그는 숨을 몇 번 고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눈을 뜨니 기억납니다. 얼마나 긴 시간, 이곳에 있었는지 말입니다.

    어떨 때는 너무도 긴 시간을 고통 받았고,

    어떨 때는 하나의 주기, 그 마지막에 눈을 떴었습니다. 무려 다섯 번이나 우리는 이들의 손에 놀아났습니다.”

    “무슨 소립니까?”

    “오아시스, 그들은 일정 사이클에 따라 세계를 폐기하고 재구성했던 겁니다. 죽으면 되살아난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모두 왜곡된 기억입니다. 죽으면 다시 세계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여기서, 이렇게 실질적인 고통으로 자극적인 호르몬을 발생시키면서 이들의 먹이가 되어야 합니다. 그 시기에 빨리 죽으면 더 오래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세계에 투입되면 모든 기억은 사라지고 저들에 의해 주입된 기억만 남게 됩니다….”

    “…허….”

    정혁이 고개를 푹 숙였다.

    젠트라에 의해 세계의 진실을 미리 들어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는 그였지만 이렇게 끔찍한 곳에 플레이어들이 붙잡혀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리고 그들의 고통이 이정도일 줄은 몰랐다.

    안나, 그녀가 한참을 울었던 적이 있었다.

    리사이클, 그 이야기를 하면서 말이다.

    리사이클이 반복될 때마다의 끔찍한 기억들 때문에 오열했었다.

    도대체 얼마나 힘든 기억이기에 그렇게나 울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는데 이렇게 목도하고 보니 위로조차 건넬 수 없었다.

    불과 며칠 전 자신이 프로그램이라는 사실에 좌절했던 정혁이었다.

    그러나 실제 인간들이 현실 속에서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

    그 현장에 있으니 오히려 프로그램인 자신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오아시스가 리사이클될 때까지 이들은 죽었다는 이유로정신을 차린 채 강렬한 호르몬을 생산할 수 있도록 제작된 특수 약물을 주입받아 다시 에너지를 생산하는 자들로 활용돼야 한다니.

    그렇다는 건 이제까지의 전쟁으로 사망한 자들, 그 모든 플레이어들 역시… 이곳에 드웨이크와 같은….

    “저…저는 아직 죽지는 않았지요.”

    드웨이크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럼, 그럼 이제 그만 보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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