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44화 (144/200)
  • ◈144화

    “검은 말 조직?”

    린이 물었다.

    그녀의 물음에 데릭의 눈썹이 다시 움찔했다.

    모른다, 그녀는, 아니 이곳의 모든 랭커들은 모른다.

    데릭 자신과 마찬가지로 검은 말 조직에 대해서 철저히 모르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이 귀한 정보를 공유해야 하는가?

    데릭은 잠시 고민해 봤다.

    그러나 달리 방도가 없다는 결과에 이르렀다.

    목적은 하나, 제논이 무너지는 것.

    지금의 위세로 성장하고 있는 제논의 덩치는 에도라 혼자서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다.

    미친놈, 제이크 총통이 이끌고 있는 안도리니의 힘과 에도라의 힘이 합쳐진다면, 그렇다면 제논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정혁, 그 녀석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말이다.

    “…저도 이들의 존재에 대해서 조사해 본 지 그리 오래되진 않아 자세한 정보를 알고 있진 못하지만 적어도 이들의 타깃이 제논의 지도자 정혁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잭슨이 이빨을 까득 했다.

    “과거 자유 연맹의 본진인 부유성을 습격한 이들도 조사해 보니 결국 이 조직의 조직원들이었습니다. 특수한 마스크를 착용하고 신체에 이니셜과 검은 색 말 문신을 하고 있는 자들이며 추측하기론 상당히 강합니다. 아마….”

    데릭이 주변의 눈치를 살짝 살피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곳에 계신 분들보다 월등히 강할 지도 모릅니다.”

    롬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곤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한마디 뱉었다.

    “이제는 개나 소나 아주 그냥. 랭킹이 휴지 조각이구만.”

    “어디서 굴러먹고 왔을지 모를 대장장이 따위가 비정상적으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부터 말이 안 되는 일인 거죠.”

    잭슨의 말에 가시가 잔뜩 서 있다.

    한때 웃는 살인마라는 괴이한 별칭까지 가질 정도로 항상 어떤 상황에서든 미소를 잃지 않는 그였지만 지금의 표정은 차갑고 냉소적이었다.

    “이 검은 말 조직이 안도리니의 뒤를 닦아 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표면적으로 제논의 행동을 적대 행위로 간주하고 전 영토에 비상령을 걸어 전쟁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으나 그 속내는 시커멓게 물들어 있습니다. 에도라를 집어삼키는 것 까지 염두에 두고 있죠. 물론 에도라의 입장에선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하겠지만요.”

    “거슬리는 표현들은 삼가세요.”

    앤이 정색하며 잭슨의 말투에 경고를 건넸지만 잭슨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만약 그런 착각을 하고 있다면 꿈에서 깨어나는 편이 후일에 좋을 겁니다. 저희가 마계와 계약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은 그만큼 사태가 심각하다고 판단하고 있는 거니까요.”

    “그래서 마계하고의 교두보는 누가 놔줄 수 있는 건데?”

    아룬이 비꼬듯이 말했다.

    데릭은 예상했다는 듯이 말이 끝나자마자 바로 대답했다.

    “그건 저희가 연결해 드릴 수 있습니다. 아크 제국의 마지막 흑마법사를 결박해 놓았죠. 그를 통해 아크와 연결이 되기만 한다면 아크의 힘과 마계의 힘을 받아 안도리니와도, 제논과도 밀리지 않는 싸움을 해 나갈 수 있을 겁니다.”

    “결국 네 계산식 안엔 우리 자력에 의한 승리라는 답은 아주 없는 거네?”

    린이 담담히 데릭에게 물었다.

    데릭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당한 판단이지 않나?

    용의 가호?

    무슨 헛소리, 우연히 얻어 걸린 넘사벽에 가까운 버프 스킬 때문에, 또 그로 인해 자멸하지 않으려 자기들끼리 정한 랭

    크를 이제까지 묵인하고 인정한 많은 플레이어들의 넓은 이해심을 봐서라도 꿈에서 깨야 한다.

    상대는 이미 드래곤을 보유하고 있다.

    그 잘난 평생 버프가 아니라 버프를 걸어 줬던 존재를 부리고 있단 말이다.

    최근 타이런의 중심부가 요동쳤던 날, 그 괴이한 진동에 사람들을 파견 보내 확인해 봤을 땐 어떤 증거도 찾아낼 수 없었다.

    세계가 진동했는데 아무런 증거가 없다?

    분명 엄청난 싸움이 벌어졌을 텐데 어떤 흔적도 없어?

    그만큼의 움직임을 단기에 벌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데릭이 조사한바 그자들밖에 없다.

    가능한 자들은 그들뿐이다.

    자유 연맹에서 경험한 그들의 힘은 일부일 뿐.

    이는 붙잡았던 흑마법사의 입에서도 들을 수 있었던 이야기였다.

    녀석은 계속해서 종말을 외쳤다.

    모든 것이 끝이 났다고 말이다.

    세상엔 검은 말들이 활개를 치고 대악마 아크가 악마왕으로 올라설 때 그때 세계는 비로소 끝이 날 거라고.

    데릭은 그의 외침이 마냥 헛소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벌어지고 있는 이 사태들이,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가고 있는 오아시스의 역사가 상식을 비상식으로 밀어내고 견고한 진실의 탑을 무너트릴 수도 있을 거라고 말이다.

    린은 단호한 표정으로 서 있는 데릭이라는 남자를 한참 바라보았다.

    꽤나 샤프한 사내다.

    사리분별을 명확하게 할 줄 알고 옳다고 믿는 바를 거침없이 개진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있다.

    린이 공감하고 있는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 주기까지 했다.

    롬이야 속이 부글부글할 수도 있겠지만 나머지 랭커들은 불편함만 드러낼 뿐 특별히 대응하진 않았다.

    “어때요? 납득할 수 없는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유라, 저 꼬맹이가 정곡을 찔렀다.

    어린 녀석이 저런 식으로 말한다면 ‘이해할 수 없다, 헛소리하지 말라’고 말해 봤자 본전도 찾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린이 롬을 흘깃 보았다.

    잘 참고 있지만 기괴하게도 어딘가 유쾌해 보이기도 하다.

    하긴, 녀석은 지금 갈망하고 있다.

    이런 식은 아니지만 격정적으로 싸울 수 있는 시간을 말이다.

    시시했겠지.

    힘을 제대로 발휘할 기회를 박탈당한 뒤로.

    어쩌면 롬은 지금의 랭크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는 나머지 랭커들도 마찬가지.

    주먹구구식으로 정해진 이 랭킹.

    한 번도 제대로 부딪쳐 본 적이 없이 합의하에 정해진 이 순위.

    ‘한’과 같은 압도적인 강함을 원하는 롬에게는 부정하고 싶은 과정과 결과였으리라.

    “데릭. 자네는 지금 바로 에도라의 수도로 가. 그곳에서 많은 인적 자원들을 활용해 더 많은 정보들을 캐. 유라.”

    롬이 유라에게 고개를 까딱하고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유라가 차원 문을 열어 수도 본성으로 향하는 길을 만들어 냈다.

    데릭이 예의를 갖춰 인사를 하고 차원 문을 넘어 들어갔다. 잭슨은 별다른 인사 없이 몸을 돌렸다가 걸음을 멈추고는 다섯 명의 랭커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곤 작게 고개를 저으며 한마디 했다.

    “그를 만나면 깨닫게 될 겁니다. 자신이 얼마나 우스운 존재였는지.”

    잭슨마저 차원 문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지자 차원 문이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롬은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눈을 몇 번 깜박이곤 박수를 두 번 쳤다.

    “자, 이제 우리 결정하자. 마계와 손을 잡을 거야?”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인가?”

    린이 잠자코 물었다.

    롬은 린을 보며 싱긋 웃더니 대답했다.

    “당연한 거 아니야?”

    “속 보인다, 속 보여.”

    아룬이 머리 뒤로 손을 넘겨 기지개를 켜더니 한숨과 함께 후 하고 한마디 뱉었다.

    롬은 그를 흘깃 보곤 어깨를 으쓱했다.

    “전…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앤이 작게 대답했다.

    롬은 앤을 보며 눈살을 작게 찌푸렸다.

    앤은 이번 싸움에서 배제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데릭이 떠들어 놓은 말들 때문에 마음이 우왕좌왕하고 있겠지.

    혹시라도 자신의 에고 장비를 다시 쥘 수 있을까.

    그런 헛된 희망 때문에 제논 쪽으로 언제든 넘어갈 수도 있을 터.

    그러나 린만큼은 절대로, 절대로 빼앗길 수 없다.

    롬은 린을 쳐다보았다.

    린이 그의 불쾌한 시선을 느끼곤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자신을 보지 말라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에도 그의 시선은 여전히 린에게 꽂혀 있었다.

    “누구도, 여기 있는 누구의 배신도 허락하지 않을 거야.”

    롬이 단호한 목소리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

    린은 그의 속내를 알겠다는 듯이 옅게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애니는 고개를 숙였고 유라는 곰 인형을 꽉 끌어안아 볼에 비볐다.

    아룬은 롬과 린을 번갈아 보며 웃기다는 듯이 허허 거렸다.

    “돌아가지, 이제 내 궁으로.”

    “잠시 시간을 주는 게 어때. 그래도 각자 지키고 있던 영역들이 있잖아.”

    린이 한마디 하자 애니가 고개를 살짝 들었다.

    롬은 팔짱을 끼고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하루의 시간을 줄 테니 에도라의 보호를 받던 너희의 사람들 중 싸울 수 있는 사람을 모두 데려와. 협조하는 편이 좋을 거야.”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린은 이미 모습을 감췄다.

    아룬과 앤 역시 차례로 돌 위에서 모습을 숨겼다.

    유라는 곰 인형의 손을 붙잡고 자신이 연 차원 문 안으로 사라졌다.

    롬은 그들이 사라진 자리를 잠시 둘러보곤 본인 역시 사라졌다.

    ***

    “어떻게 방법은 없는 거야?”

    하늬안이 정혁을 붙잡고 흔들며 물었다.

    눈을 감고 그저 숨만 쉬고 있는, 시체나 다름없는 드웨이크가 어두운 방에 홀로 누워 있었다.

    평안해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다.

    정혁은 하늬안의 울음 섞인 표정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드웨이크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곁에 있던 박달수가 하늬안의 무례한 행동을 저지하려고 했지만 정혁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드웨이크는 하늬안에게 특별한 사람이었다.

    왈가닥에 불같은 성격을 가진 그녀를 제논이라는 길드의 테두리 안에 정착하게 만들어 주고 함께 생활하는 즐거움을 알게 해 준 사람이다.

    지독한 경험을 겪었던 과거를 잊고 오아시스에서 나름의 목표를 갖게 해 준 사람이었다.

    그녀뿐 아니라 드웨이크가 이끌고 있던 레이드 팀의 모든 일원들은 다른 어떤 이유보다도 드웨이크라는 사람 때문에 그곳에서 험난한 과정들을 함께 견디고 위업을 세워 나갈 수 있었다.

    정혁 역시 처음 드웨이크를 만나고, 그의 부드럽고도 힘 있는 리더십에 감탄했었다.

    그는 무리를 이끄는 데 훌륭한 재능이 있는 자였다.

    그렇기에 김창수와도 형, 동생 사이로 불릴 만큼 막역할 수 있었으리라.

    그런 드웨이크가 이렇게 처참한 모습으로 누워 있다는 사실을 하늬안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이젠 정말로 로그아웃시켜야 합니다.”

    박달수가 정혁에게 조용히 조언했다.

    “이제 불과 며칠 남지 않았을 겁니다. 휴면 상태로 강제 로그아웃될 겁니다. 그때까지 기다린다면 드웨이크가 결국 오아시스로 다시 돌아오는 시간만 더 늘어날 뿐입니다. 제논에겐 오히려 독입니다. 우리에겐 그와 같은 리더가 필요합니다.”

    박달수의 말이 십분 이해된다.

    그러나 정혁은 알고 있다.

    드웨이크가 지금 로그아웃된다면 앞으로는 없을 것이다.

    이 남자의 현실 세계엔 암흑밖에 남아 있지 않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드웨이크는 어떻게든 오아시스 안에서 남아 있어야만 한다.

    다른 우수한 플레이어들도 이제까지의 전쟁으로 죽고 사라졌다.

    로그아웃되고 아마 이 세계로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보다도 드웨이크는 정혁에게 각별하기에 정혁 역시 그를 이렇게 보내고 싶지 않았다.

    세계의 가려진 진실을 보여 주고 싶고 이들에게 해방의 순간을 만끽하게 해 주고 싶다.

    그 시간에, 그 순간에 드웨이크가 꼭 있었으면 좋겠다.

    “어려우시면 제가 하겠습니다.”

    박달수가 품에서 날이 선 단도를 꺼냈다.

    하늬안은 그의 단도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도 알고 있는 것이다.

    방법은 이것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잠깐만.”

    정혁의 차분한 목소리가 결단을 내린 박달수의 움직임을 막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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