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호오.”
아룬이 흥미롭다는 듯이 반응했다.
데릭과 잭슨은 조용히 고개를 숙여 랭커들에게 예의를 표했다.
말을 먼저 꺼낸 것은 데릭이었다.
“카탈에서 자유 연맹의 균형을 조율했던 의장 데릭이라고 합니다. 랭커들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무엇보다 이런 자리를 마련하신 롬 국왕님께 깊은 존경을 표합니다.”
“형식적인 말은 집어치워.”
린이 불편을 표했다.
데릭은 당황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다가 모두 자신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곤 황급히 말을 이어 갔다.
“저, 저희 자유 연맹은 카탈에서 완벽히 무너졌습니다. 제논에… 의해서 말입니다.”
“제논에 의해서? 확실해? 내가 알고 있는 정보와는 조금 다른데?”
데릭은 아룬의 반문에 잠시 숨을 골랐다.
그래, 정확히는 그놈들 때문에 몰락한 것은 아니지.
그러나 놈들의 영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 모든 일이 정혁이라는 놈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대외적으로는 의문의 세력에 의해 자유 연맹이 몰락하고 제논이 우리를 도와주려 했다고 전파되었지만 실상은 아닙니다. 저희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집단은 모두 정혁이라는 제논의 지도자를 좇고 있었음을 추후에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잠깐만, 우리가 원하는 건 자유 연맹이 어떻게 몰락했는지가 아니야. 어디든, 누구든 쇠퇴하고 파멸하고 다시 일어서고 세력을 키우는 법이니까.”
린은 본론으로 넘어가고 싶어 했다.
그녀의 재촉에 데릭은 고개를 한 번 꾸벅 숙이곤 말을 이어 갔다.
“예, 그렇다면 저희가 알고 있는 정혁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일단 그는 대장장이 입니다. 어떤 부가적인 단어가 붙지 않은 그저 칭호 그대로 ‘대장장이’이죠.”
장내가 싸늘해졌다.
흘러가는 이야기로, 헛소문으로 치부했던 일이 사실이라고 공표되자 다들 어안이 벙벙해진 것이다.
칭호라는 것을 스스로 정할 수 없기에 플레이어가 성장하면서 어떤 방향으로의 칭호를 얻느냐가 앞으로의 길을 결정한다.
그러나 단순히 대장장이라는 칭호를 가진 플레이어라면 군말 없이 대장장이의 길을 걸어야 할 터.
그런 그가 어떻게 연합의 지도자가 될 수 있으며 지금과 같은 명성을 떨칠 수 있을까?
엄청나게 위대한 제작자이거나, 수리를 환상적으로 잘한다거나 이런 방향으로의 유명세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명성은 이런 부분보다도 전투력과 강함에 있었다.
그가 강하다는 말은 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모든 음유시인들은 그의 강함을 찬양했다.
대장장이라니, 모두 웃어 넘겼었다.
헌데 사실이라고?
“하지만 단순한 대장장이는 아닌 듯 보입니다. 그는 에고 장비를 제작할 수 있어 보입니다.”
“에고 장비라니요?”
앤의 눈이 동그랗게 변해서 물었다.
롬이 조금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앤을 살짝 쳐다보았다.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의견을 마구 토해 냈던 그였지만 한 가지 생각하고 있으나 꺼내지 않은 말이 있었다.
랭커 안젤리나처럼 만약 이들이 제논의 편에 붙는다면 그것 역시 에도라에게, 지금의 그들의 유대에 큰 균열을 야기할 것이다.
물론 에도라에서 그들이 각각 다스리고 있는 무리들의 안전을 보장하고 있기에 쉽지 않겠지만 앤이라면, 지금 이 이야기에 가장 크게 동요할 것이다.
그녀는 에고 장비가 있었고, 에고 장비를 잃었다.
“그게 사실입니까?”
앤의 재촉에 데릭은 침을 꿀꺽 삼키고 말을 이어 갔다.
“예 맞습니다. 잭슨이 상세히 말해 줄 겁니다.”
“총사령관이었던 잭슨입니다. 저는 정혁이라는 인물과 함께 당시 카탈의 골칫거리였던 불의 정령왕 라테를 정벌하러 갔었습니다. 단둘이 말입니다. 사실은 저 역시도 그를 테스트하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소문이 사실인지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타이런까지는 모르겠지만 카탈에선 김창수가 이끄는 제논의 기사단이라는 길드의 위상을 크게 쳐주고 있었습니다. 김창수라는 인물 역시 지난 몇 번의 대전쟁에서 나름대로 이름을 알린 인물이지 않습니까? 그런 자가 자신이 그렇게나 아끼던 제논의 기사단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에게 양도했다?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잭슨은 정혁을 처음 만났던 때를 회상했다.
한없이 그를 얕봤던 그 때 말이다. 칭호에는 그저 ‘대장장이’라고밖에 되어 있지 않은, 스탯도 별다를 것이 없었던 자.
소문은 항상 거품이 많았다.
와전이라는 것이 다 그러하듯 뒤집어 까 보면 전부 거짓투성이였다.
이 남자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게다가 아직 200레벨도 달성하지 못한 채였지 않은가.
“그러나 그는 물의 정령왕인 녹턴과도 이미 안면이 있었던 듯 보였고 오히려 녹턴은 그가 라테를 해결해 줄 거라 믿는 눈치였습니다.”
“…녹턴이?”
롬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말이 되지 않습니다. 소문으로는 정혁이라는 플레이어가 이 세계에 발을 들인 시간이 그리 오래되진 않았다고 했습니다. 강철망치 대장간 견습생으로 오아시스력 3년을 보냈다고 하지 않았었습니까?”
앤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말투로 말하자 잭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습니다. 저희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긴 하나 그는 분명 녹턴과 안면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비록 쇠약한 상태였긴 했지만 결국 불의 정령왕 라테를 무너트렸습니다. 그리고 그를 쟁취했습니다.”
“쟁취했다?”
아룬이 잭슨이 사용한 비상식적인 단어에 의문을 가지며 물었다.
잭슨은 표정에 변화 없이 그의 말에 대답했다.
“맞습니다. 쟁취. 그는 그곳에서 불의 정령왕 라테를 에고 장비로 쟁취했습니다. 쉽게 말해 획득했다고 봐야겠습니다. 그의 에고 장비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에게 장착되어 무기로 활용되기도 하지만 그 자체의 모습으로 유지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그들을 소환수로 부리고 있다고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그들은 에고 장비로서 본연의 모습으로 정혁의 곁에서 함께하는 것입니다.”
“미쳤구만.”
아룬이 헛기침을 뱉으며 한마디 했다.
잭슨, 저 남자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상식선을 한참 넘었다.
에고 장비가 무엇인가.
세계의 선택을 받은 몇몇의 고등 인격체가 장비에 녹아든 형태의 색다른 무기로 주인을 선택하고 주인과 함께 성장하는 성장형 무기다.
장비에 녹아든 인격체는 기존의 형태가 없다.
장비 그 자체로서 존재하며 생명체라고 보기 어려운 모습을 유지한다.
오직 주인과 교감할 뿐이다.
이 교감의 깊이로 무기의 성능이 결정되고 형태와 방향이 결정된다.
장비와 주인의 유대는 그만큼 깊어진다.
지금 앤이 반색하며 조금 격앙된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자신의 소실된 에고 장비를 그를 통해 수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헛된 바람이 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미 소실된 에고 장비는 돌아올 수 없다.
에고가 사라진 장비다.
어디서도 무형의 에고를 되돌아오게 할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애초에 정혁이라는 남자가 접근하는 에고 장비의 방식은 기존의 틀과는 확연히 다르지 않은가.
아룬은 입맛을 다시며 앤을 흘깃 보곤 다시 잭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린은 섬뜩함을 느꼈다.
드래곤을 보았다는 보고.
용의 가호를 느낀 우리가 동시에 감지하고 있는 이 색다른 고동.
드래곤을 소환한 것이 아니라 드래곤을 에고 장비로 만들었다면?
린은 자신의 생각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다가 잭슨과 눈이 마주쳤다.
잭슨의 두 눈동자 속에는 린이 생각하고 있는 자체가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제가 아는 바, 정혁이라는 대장장이는 은행나무 왕국의 신성한 고대 엔트 엘라와 불의 정령왕 라테 그리고 베일에 싸인 천계의 천사와… 드래곤을 에고 장비로 만든 것으로 추측됩니다. 확실한 부분은 엘라와 라테입니다. 나머지 부분은 저희도 직접 보진 못했지만 제 휘하의 훌륭한 인원들이 알아낸 일이니 신빙성 있는 정보입니다.”
모두가 일제히 술렁거렸다.
다른 어떤 정보들보다도 드래곤을 에고 장비로 뒀다는 말에 황당함을 감출 수 없어 보였다.
롬은 이빨을 깨물었다.
김창수, 그놈이 정혁에게 붙어먹을 이유를 알겠다.
게다가 안젤리나 역시 그에게 무릎을 꿇은 이유도 알겠다.
우리는 용의 가호를 받은 자.
그 힘으로 세계의 정점에 선 자들.
그러나 그런 용을 부리는 남자라니.
드러나는 모습 속에서 이미 격 차이가 나지 않는가?
아니, 그렇다고 해도 놈은 혼자다.
아니, 혼자인가?
그에겐 고대 엔트와 불의 정령왕, 천계의 천사까지 함께 있다.
게다가 그들이 장비의 형태가 아니라 본래의 형태로 곁에 있다.
이건 완벽한 밸런스 붕괴다.
이건 오류다.
말도 안 된다.
특히나 당황해 보이는 롬을 눈치채고 린이 눈을 질끈 감은 채 데릭에게 물었다.
“더 이상의 정보는 듣지 않겠어. 더 들어 봐야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아. 여기까지 우리를 찾아온 이유가 뭐야.”
데릭은 그때서야 숨을 죽인 채 조용히 본인의 목적을 말했다.
“들어서 아시겠지만 여기 계신 랭커분들은 아마도….”
그가 잠시 말끝을 흐렸다가 결심이 선 듯 당당히 말했다.
“정혁에게 상대조차 되지 않으실 겁니다.”
정곡.
모두가 발끈할 만한 말이었지만 그럼에도 누구도 이 불경한 소리에 대응하지 않았다.
데릭은 자신이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이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자칫 선을 넘게 되면 잭슨과 자신은 몸 성히 다시 자유 연맹의 잔여 세력들의 곁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에고 장비들 때문에 잊으셨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칭호는 대장장이. 제논의 병력들은 정혁이 직접 제작한 엄청난 등급의 장비들을 하급 전사들까지 착용하고 있습니다. 기초 전투력이 타 국가 병력들에 비해 배로 높으며 이는 자신의 힘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되어 사기 진작에 큰 도움이 되고 있죠. 또한 팀장 직급의 인물들에게는 전설 등급에 준하는 염구가 각인된 화속성의 무기들이 지급되어 있습니다. 그중엔 맹독염화의 힘을 가진 무기도 있죠.”
분위기는 점점 참담해져 가고 있다.
“제논의 병력들의 힘 역시 무시할 수 없습니다. 제논은 사실 가장 유력한 전 대륙 통일 연합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안도리니? 에도라?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만약.”
“…만약?”
롬이 인상을 구기며 살의를 담아 작게 대응했다.
데릭은 안경을 올리고 롬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안도리니가 그들이 컨택하고 있는 괴조직과 연합하고 에도라가 마계와 계약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뭐?”
“뭐라구요?”
“데릭 아저씨?”
린과 앤, 그리고 유라가 동시에 불쾌한 듯 반응했다.
그러나 되레 롬의 반응은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롬은 팔짱을 끼고 데릭에게 물었다.
“안도리니의 소식까지 알고 있나?”
롬의 물음에 데릭은 이때다 싶어 입을 열었다.
“제이크, 그 미친놈의 곁은 수시로 물갈이가 되죠. 우연히 제 측근이 수뇌부까지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목숨이나 겨우 건져 다시 연맹으로 돌아왔지만 그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더군요.”
“계속 해 봐.”
롬이 말하자 데릭이 마른 입술을 살짝 핥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검은 말 조직이 그들과 함께 움직이고 있다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