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42화 (142/200)
  • ◈142화

    “비상사태임을 감안하고 있는 거지?”

    초록빛 물결들 사이로 제각기 높이로 솟은 돌덩이들 위에 각각의 사람들이 서 있다.

    넓은 평아, 얕은 꽃 내음이 코끝을 간지럽히고 상쾌한 온도가 적당히 좋은 기분을 달구지만 모여 있는 사람들에겐 큰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가장 우람한 덩치에 무겁고 화려한 중갑으로 전신을 둘러싼 남자의 목소리가 먼저 울렸다.

    그들이 딛고 있는 발아래의 돌덩이에는 작은 각인들이 있었는데 마치 그 자리 주인의 이름이 새겨진 것 같았다.

    금발의 단발머리가 인상적인 여성의 돌 아래에는 ‘린’이라는 이름이

    중갑의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의 돌 아래에는 ‘롬’이라는 이름이

    파란색 천 재질의 드레스를 입고 푸른빛으로 빛나는 지팡이를 쥐고 있는 가녀리고 냉정해 보이는 여성의 돌 아래에는

    ‘앤’이라는 이름이

    이 중에 가장 어려 보이는, 작은 곰 인형을 손에 쥐고 있는 소녀의 돌 아래에는 ‘유라’라는 이름이

    마지막으로 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질끈 틀어 묶어 껌을 씹으며 돌에 걸터앉아 있는 가죽 옷의 남자 아래엔 ‘아룬’이라는 이름이 각각 보였다.

    나머지 돌들도 있었지만 그곳엔 주인이 없었다.

    아룬이 풍선을 불었다가 딱 소리를 내며 터트리곤 질겅이며 물었다.

    “국왕 나리, 구태여 우리가 이런 불편한 곳에 소집돼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롬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비상사태라니까? 알고 있잖아?”

    “각자 도생하면 되는 거지.”

    린이 차갑게 대답했다. 그럼에도 롬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각자 도생하려다 욘마곤의 6위가 죽었잖아.”

    입가에 걸린 미소에 비해 불편한 단어들이었다.

    린은 그를 노려보았고 롬은 그녀의 시선을 반갑게 맞아들였다.

    “롬 아저씨, 나 배고픈데 빨리 끝내면 안 될까요?”

    유라가 작은 목소리로 부탁하자 롬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말하기 시작했다.

    “에도라의 국왕 롬이 아니라, 용의 가호를 받은 오아시스의 상위 랭커로서 동지들에게 부탁합니다. 에도라는 지금부터 국가 비상사태에 돌입합니다. 하이 엘프 왕국과 나이트 엘프 왕국에도 원조 요청을 보냈습니다. 안도리니의 공격 시그널이 포착됐고 7위와 9위의 전투 사인이 도착했습니다. 묵인할 수 없는 수준임을 공표하는 바입니다.”

    “너는 꼭 그렇게 표면적인 부분을 말할 때만 존대를 쓰더라.”

    린의 톡 쏘는 말투가 분위기를 다운시켰다.

    롬은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다물었다.

    잠시의 정적을 깨고 린이 한숨을 쉬며 말을 이어 갔다.

    “잘 들어, 나도 마찬가지고 각자 개인적인 시간들을 방해 받아 불쾌하겠지만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은 이미 인지하고 있을 거야. ‘한’ 그 빌어먹을 자식이 사라지고 처음으로 고위 랭커가 사망했어. 중요한 건 죽은 녀석의 목숨이 아니야. 3년간 유지되고 있던 균형이 깨졌다는 거지. 랭커의 자리가 비었고, 그 자리에 대한 탐욕스러운 움직임이 이어질 거야. 당장 6위 아래에 있는 랭커들도 치고 올라오려고 하겠지. 그럼 이게 단순히 개인 대 개인의 일로 벌어질 것이냐, 아니. 이 싸움이 국가 대 국가의 싸움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게 문제라는 거야.”

    “안도리니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앤이 물었다.

    눈을 감고 있던 그녀가 눈을 뜨자, 그 눈동자마저도 시원하도록 파랬다.

    “안도리니의 그 또라이 새끼 하나만이면 괜찮게?”

    모두들 수긍하는 듯 고개를 동시에 한 번 끄덕였다.

    린은 계속해서 말했다.

    “알다시피 지금 욘마곤은 거의 제논에게 먹혔다고 봐야 해. 도대체 빌어먹을 두 정령왕을 어떻게 구워/삶았( 삼켰)/는지는 모르겠지만 놈들이 적극적으로 제논을 돕고 있는 것 같아. /그(삽입)/뿐만 아니라 제논에는 김창수도 있잖아.”

    “김…창수.”

    롬이 희미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린은 그를 힐끔 보고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 말했다.

    “우리와 등지고 제논의 길드 마스터로 찌그러져 있던 그 아저씨랑, 욘마곤의 안젤리나까지 아마 그쪽에 합류했겠지. 그리고 이건…… 확실치 않은 정보이긴 한데, 롤란의 불칼이 공격받아 제논에게 수복되었고, 그곳에서 황금빛 드래곤을 봤다는 목격담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고 하더라고.”

    또 한 번 딱 소리가 났다.

    “황금빛 드래곤?”

    아룬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린의 말에 대꾸했다. 린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정혁이라고, 알지? 제논 연합의 지도자. 김창수가 제논의 기사단, 집착을 넘어서서 품고 안았던 그 길드의 마스터 자리를 내어 준 남자. 그 남자의 소환수라고 하더군.”

    “드래곤을 소환한다구요?”

    앤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갸웃 했다.

    “글쎄, 가능한 이야긴지 모르겠어. 드래곤은 알다시피 우리를 끝으로 모습을 감췄잖아. 게다가 황금빛 드래곤은… 젠트라라고.”

    “미친 소리.”

    롬이 피식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그치만, 다들 조금씩은 알고 있잖아요? 젠트라 님, 그분의 향기가 갑자기 바람 속에서 느껴진다는 걸.”

    유라가 작게 한마디 했다.

    어린 소녀의 말에 아무도 반론을 꺼내지 못했다.

    그래, 모두 알고 있다.

    어느 시점부터였는지는 명확히 이야기할 수 없지만 과거 드래곤에게 용의 가호를 받은 이후 드래곤 특유의 마나, 그 느낌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 바람을 타고 문득, 그 느낌이 강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심장에 박힌 용의 가호, 그 마나가 공명했다.

    그러나 이 공명은 자신보다 월등히 강한 자를 향한 동경의 공명이었다.

    “빌어먹을, 그러니까 롬.”

    갑자기 린이 롬에게 버럭 성질을 냈다. 롬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린을 바라보았다.

    “악마들이 타이런을 침공했을 때, 욘마곤이 사지로 내몰리고 있을 때! 우리가 도움을 줬다면 상황이 이 꼴로 돌아가진 않았을 거 아냐!”

    그녀는 금방이라도 롬에게 달려들 것처럼 소리쳤다. 롬은 그런 그녀를 사랑스럽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나라고 이렇게 될 줄 알았겠어?”

    “거-짓말.”

    아룬이 능글맞은 어투로 롬의 말에 대꾸했다.

    롬은 아룬을 매섭게 노려보곤 검지손가락을 들어 입에 댄 채 정색했다. 그러나 아룬은 개의치 않는 듯 입을 열었다.

    “너같이 영악한 국왕이 다음 수를 생각하지 않았을 리 없지, 안 그래? 롬, 이제 네가 알고 있는 정보를 내놔 봐. 우리가 이렇게 다시 모이는 순간을 고대하며 차려 놓은 계획이 있을 거 아냐?”

    롬은 가만히 아룬을 쳐다보았다.

    여러 복잡한 감정이 그의 표정에서 느껴졌다.

    그러나 아룬은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껌을 질겅질겅 씹을 뿐이었다.

    “우리는….”

    롬이 입을 열었다.

    “너무 오래, 지루한 시간을 보냈어. 그렇지 않아?”

    “…무슨?”

    린이 즉각 반문했지만 롬은 그녀의 반응을 무시한 채 말을 이어 갔다.

    “이 거대한 힘을 받았지만 목적을 잃었지. 목숨을 걸고 싸워 보지도 못하고 ‘한’을 잃어버렸잖아. 결국 이 힘으로 요동치는 세계에 대전쟁을 마무리하고 각자 랭커의 자리를 차지했지. 그러나 그게 다야. 우리는 결국 이 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고.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그 짜릿함을 경험해 보지 못했어. 대전쟁도 시시했지, 안도리니의 성장을 기대했지만 제이크, 그 멍청한 자식은 살과 피가 부딪치는 전투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의 도구를 이용한 전투만을 원하고 있잖아. 재미없어, 다 재미없다고.”

    “국왕의 광기에 함께하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요?”

    앤이 살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롬을 향해 비꼬듯이 말했다.

    롬은 즉각 앤을 쳐다보았지만 미소는 여전히 입에 걸려 있었다.

    “앤, 아니지, 앤. 싸움이라는 건 결국 강자를 찾게 되어 있어. 우리는 이 싸움에서 누구도 도망칠 수 없을거야. 정혁? 그 남자의 힘의 목적은 무엇일까? 이 타이런도 카탈처럼 전부 집어삼키고 싶은 거야. 전투에서 제일 우선적으로 없애야 할 핵심 목표가 누굴까? 강자! 가장 강한 사람! 지도자, 무리의 우두머리! 그 사람들이라고! 왜 없애야 할까? 후환, 그것을 물리치기 위함이지. 그럼 우리는? 세계의 정점 열 손가락, 그 안에 있는 우리는 정혁이라고 하는 제논의 지도자에게 무엇일까? 없애야 하는 가장 우선적인 타깃이라고.”

    “또 지랄이네, 정신 안 차려?”

    린이 한숨을 쉬며 롬에게 날카롭게 경고했다.

    그러나 롬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피할 수 없어. 우리 모두! 이 싸움에 안도리니 역시 불을 지폈고 타이런엔 여전히 마계의 손아귀가 닿아 있지. 완벽한 진흙탕 싸움이 펼쳐질 거야. 저들에게 붙을 거야? 그럴 수 있어? 각자가 짊어진 무리들의 안전을 그들이 보장해 줄까? 과연? 그런 불편들을 감수할까? 너희들은, 그리고 나는, 그들에겐 시한폭탄 같은 존재야. 품고 있지만 불편하지. 언제 터질지, 언제 반기를 들지 전혀 모르니까!”

    그 순간 린이 롬의 앞으로 다가가 그의 목에 잘 벼려진 검날을 댔다.

    롬은 코웃음을 치며 린을 내려다보았다.

    린의 검은 손잡이가 중앙에 달려 있고 양 옆으로 날카롭게 뻗은 특이한 형태였다.

    그러나 한 번에 목을 베어 떨어트리기엔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선… 넘지마.”

    “…웃겨 린, 웃기다고.”

    “뭐?”

    “우리의 랭크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변함없었지만 과연 지금도 그 랭크가 정확할까?”

    “…해 보자는 거야?”

    그녀의 차가운 대답에 롬이 빙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니, 나는 너를 절대 못 이길 거야. 너는 아름다우니까.”

    린이 이빨을 드러내고 그의 목을 당장이라도 그어 버릴 듯이 위협했다가 한숨을 쉬며 검을 거두었다.

    그러곤 다시 그녀의 자리로 돌아갔다.

    “네놈의 광기에 함께 반응할 가치도, 이유도 없지만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해. 다들 공감하지?”

    린의 말에 롬을 제외한 나머지 플레이어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우리에겐 정보가 필요해. 악마들에 대해서는 그래도 어느 정도 알고 있잖아. 아크, 그 녀석이 마계에서 정비를 마치면 다시 뛰쳐나오겠지. 이번엔 아크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놈들도 함께일 수 있어. 안도리니? 제이크, 그 쓰레기 새끼는 여기 있는 롬만큼이나 빌어 처먹을 놈이라는 것을 잘 알지. 욘마곤이야 이미 정리되었고 우리와 함께하지 않는 랭커들의 힘이나 칭호도 다 알고 있어. 문제는 제논이야. 정혁, 그 사람의 진짜 힘, 능력, 제논의 전투력, 지도부, 그들이 진짜 노리고 있는 것들. 전부 부족해. 더 많이 알아야 하건만 우리가 그동안 너무 안일했지. 저 롬의 의도대로 움직이던 통에 말이야.”

    린은 여전히 롬에게 살의를 드러내며 말했다.

    롬은 자신의 목에서 베어나오는 피를 문지르면서도 그녀를 향한 소름 돋는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한편 잠잠히 앉아 있던 유라가 작은 손을 들어 올렸다.

    모두들 그녀를 쳐다보았다.

    “정혁이라는 사람에 대한 정보라면 도움이 될진 모르지만, 그를 직접 만나 본 사람이 저희 마을에 있어요.”

    “누구?”

    아룬이 그녀에게 묻자 유라가 눈을 감고 손을 허공에 손가락을 몇 번 까닥였다.

    그러자 작은 차원 문이 그들의 아래 푸른 초원 위로 생겼다.

    그리고 그곳에서 두 명의 사람이 조심스럽게 걸어 나왔다.

    모두들 시선을 아래로 내려 차원 문에서 걸어 나오는 두 사람을 주목했다.

    그들은 데릭과 잭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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