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41화 (141/200)
  • ◈141화

    “롤란이 그렇게 허망하게…….”

    고층 빌딩이 즐비한 곳.

    그중에서도 가장 높게 솟은 빌딩의 최상층, 세련된 복장들을 갖춰 입은 사람들이 몇몇 모여 앉아 있고 모두 이마에 손을 짚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한 남자만을 바라보고 있다.

    남자 역시 말끔한 슈트 차림이었다.

    다만 행커치프가 들어가 있어야 할 곳엔 푸르스름한 빛을 내는 무엇인가가 꽂혀 있었다.

    금발의 단발을 반만 뒤로 묶었다.

    옆으로 비죽이 나온 머리카락들은 제멋대로이긴 하지만 나름대로 정렬되어 있다. 백색의 얼굴빛은 다소 창백해 보이기까지 했지만 그렇다고 유약해 보이는 수준까진 아니었다.

    남자는 이마를 한번 쓸어 올리며 고개를 다시 들어 좌중을 바라보았다.

    모두들의 얼굴에 미소는 없다.

    ‘한’이 사라지고 얼마나 됐다고, 빌어먹을 신생 연합 따위에게 이 정도로 밀어 붙여져야 한단 말인가.

    남자는 개탄스러웠다.

    롤란은 믿을 만한 사내였다.

    그의 우직함과 특출한 훈련 능력은 안도리니의 영토의 창끝이라고 불리던 일명 ‘롤란의 불칼’이라는 도시를 에도라나 욘마곤의 도발성 공격에도 꿈쩍 않는 철옹성으로 만들었다.

    그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상인들과 여러 거래상들로 북적이는 도시였다.

    그뿐만 아니라 드워프라는 캐릭터의 특성상 솜씨 좋은 장인들이 모이는 도시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주류를 이루고 있는 인간 종족들이 아니라 드워프 종족이 도시를 다스리고 있기 때문에 모종의 동질감이 일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상업적으로도, 생산적으로도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도시였기에 그만큼 도시의 방어적 측면에도 많은 투자가 지속되어 왔다.

    롤란은 더없이 훌륭한 안도리니의 정예 병력들과 플레이어들로 가득 가득 도시를 보충해 갔다.

    명성은 헛소문이 아니라 사실이 되어 갔다.

    불칼의 위용은 절대 꺼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런 도시였는데, 단 하루, 그것도 몇 시간 만에 롤란의 사망과 함께 무너져 버리다니.

    믿을 수가 없다.

    아니, 믿고 싶지 않다.

    그러나 지금 저 앞 박스 안에 든 것이 정말 롤란의 머리라면.

    “…치워”

    악취미다.

    플레이어의 머리를 전리품 삼아 담아서는 이곳까지 보내 오다니 말이다.

    보통의 플레이어들은 죽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시스템에 따라 자연히 사라진다.

    공포를 심어 주기 위해 이런 불필요한 행동까지 서슴지 않은 것이다.

    너무… 마음에 드는 행동 아닌가!

    “각하,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한 중년의 남자가 그에게 물었다.

    그는 질문을 던진 중년의 남자와 눈을 한 번 마주치고는 긴 한숨으로 자신의 답답한 심경을 대변했다.

    “제이크 각하. 이럴 때일수록 수를 빠르게 계산해 봐야 합니다.”

    중년의 남자가 재차 그를 불렀다.

    제이크라 불린 남자는 코웃음을 한 번 치더니 몸을 일으켰다.

    바퀴가 달린 사무용 의자는 매끄럽게 뒤로 밀려났고 남자는 목을 살짝 풀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뭐, 다들 아시다시피.”

    제이크의 무거운 목소리가 주변의 분위기를 더욱 침전시켰다.

    “안도리니의 마지막이 오고 있는 것 같죠?”

    의외의 한마디.

    좌중은 술렁거리지만 이내 잠잠해진다.

    제이크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빙긋 웃었다.

    “왜 이래, 꼰대들. 다 머릿속에서 이리 붙을까, 저리 붙을까. 고민 중이잖아?”

    “각하, 말씀이 좀.”

    타앙-

    순간 제이크의 뒤춤에서 검은 피스톨이 뽑아져 나와 중년의 남자 이마를 정확히 꿰뚫었다. 총알은 건물 외부 통유리에 동그랗게 구멍을 냈고 유리는 완전히 깨어지지 않은 채 주변으로 금을 퍼트렸다.

    중년 남자의 시체가 의자에서 밀려 내려와 바닥에 나뒹굴었지만 누구도 그를 보며 기겁하거나 떨지 않았다.

    그저 제이크의 행동과 얼굴에 집중할 뿐이었다.

    어쩌면, 익숙해 보이기도 했다.

    “세상엔 똑똑한 사람들이 많아. 그러나 똑똑한데 용감한 사람들은 드물지. 당신들은 그냥 똑똑해서 여기 있는 거야,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똑똑한 사람들은 많아서 한둘 죽어 봐야 나한텐 하등 의미가 없어. 노땅 주제에 주저리주저리, 그 검은 속이 다 보이는데 말이야.”

    안도리니 제국의 지도자.

    각하라 불리기를 원하고 좋아하는 남자 ‘제이크’.

    그의 강함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미스터리에 가깝다.

    사실 이 안도리니가 어떤 과정에 의해 타이런 제국의 삼파전 속 한 가닥을 붙잡을 수 있었는지는 아직도 제대로 연구되거나 밝혀지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작스럽게 빅뱅처럼 폭발적으로 성장한 안도리니는 현실 세계에서나 사용할 법한 여러 무기들에 마나를 심어 효과적이고 비도덕적인 살상력을 얻었다.

    그들은 이 무기들과 장비들을 바탕으로 점점 땅을 넓혀 갔다.

    이 모든 일을 벌인 사람, 그가 바로 제이크였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한’이 사라지고 나서 제이크, 그가 ‘한’의 자리를 이어 갈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한’만큼 강하진 않았지만, 그리고 그 강함이 인정되지도 못했지만 성격만큼은 ‘한’과 비슷하다는 평을 많이 들어 왔기 때문이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기복이 심하다는 평이 많다.

    게다가 잔혹하기 짝이 없는 성격 덕분에 참모진들은 매일매일 사람들이 바뀌어갔다고 했다.

    인재를 좋아하고 아끼지만 인재가 쓸모없어지면 그저 버려 버린다.

    야망이 있는 사람들을 품고 키워 주지만 질리면 그만둬 버린다.

    그 사람들은 물론 전부 죽게 된다.

    조금이라도 될성부른 싹이 보이면 대륙 어디서든 그를 납치한다.

    그리고 제이크가 개발한 세뇌 발명품을 통해 적당한 세뇌로 대상을 완전히 안도리니의 충실한 개로 만들어 버린다.

    롤란 역시 비슷한 부류였다.

    제이크는 치밀한 자였다.

    늘 모든 것을 자신의 손아래 두기를 원했고 자신이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불같이 화를 냈다.

    “우리가 가진 마나 미사일은 총 몇 발이지?”

    제이크의 물음에 젊은 여자가 손을 들고 간결히 대답했다.

    “총 1277발입니다.”

    “일제 발사가 가능한가?”

    “대략 3시간 45분 22초 정도면 가능합니다.”

    “좋아. 778특임대는?”

    까맣게 탄 얼굴에 하관을 마스크로 가리고 있는 다른 남자를 보며 제이크가 묻자 남자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동 준비하고 있어, 사령관?”

    “예, 각하.”

    가슴에 다섯 개의 별을 달고 있는 중년의 남자가 기합이 들어간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 부대 비상사태 발령하시고 24시간 내 완전 무장 및 출동 준비시키세요. 준비되면 보고하시고. 자, 잘 들어요.”

    제이크가 회의실 테이블을 강하게 내려치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이제 전면전에 돌입합니다. 제논 저 떨거지들의 공격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화력을 전부 쏟아 부을 겁니다. 이참에 에도라의 측면부도 같이 공격하겠습니다.”

    사령관이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듯이 입을 한 번 움찔했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며 함구했다.

    그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제이크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알게 뭐예요. 어차피 마지막인 것 같은데.”

    사령관의 반응에 대꾸라도 하듯 제이크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어차피 이번이 마지막이다.

    순간 제이크의 주머니에서 작게 진동이 울렸다.

    제이크는 손가락을 살짝 올려 모두에게 침묵을 지시한 뒤 진동이 울린 물체를 꺼냈다.

    동그랗고 검은 버튼이 달린 물건이었다.

    그는 버튼을 살짝 눌렀다.

    [제이크.]

    [알파. 이야기하시죠.]

    [준비됐나?]

    [하루면 될 것 같습니다.]

    […….]

    제이크는 다시 전음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조금, 초조했다.

    […좋다. 너의 구원이 달린 일이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모두를 산화시키더라도 반드시 성공하라.]

    [알겠습니다.]

    의미심장한 전음을 마무리 하고 제이크는 귀찮다는 듯이 손짓을 했다.

    그러자 회의장에 모였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회의장 바깥으로 나갔다.

    제이크는 자신이 쥐고 있는 버튼 달린 물체를 뒤집어 보았다.

    그곳엔 검은 말이 생동감 넘치게 일어서서 앞발을 치켜들고 포효하고 있었다.

    “이번만 마무리된다면….”

    제이크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지어졌다.

    ***

    “랭킹 1위 양반!”

    물안개가 가득히 찬 폭포수 근처에서 어떤 허름한 옷의 노인이 누군가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자 물안개 저쪽에서 어떤 기척이 나더니 한 여자가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물안개 속에서 옷을 챙겨 입는 듯이 행동하다가 이내 완전히 바깥으로 걸어 나왔다.

    축축한 머리카락이 아직 정리되어 있지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균형 잡힌 매끈한 몸에 잘 웃지 않을 것 같은 냉소적인 표정을 가진 아름다운 미모의 여성이었다.

    그녀의 앞에는 허리가 구부러진 노인에 가까운 남자가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말콤, 왜요?”

    여자는 낮은 목소리로 작게 그를 부르며 물었다.

    개인 시간을 방해받았다는 것에서부터 오는 불쾌함이 담긴 목소리였다.

    말콤이라는 노인이 한숨을 푹 쉬더니 말했다.

    “이 노인네가 자네를 찾아 매번 동해 번쩍, 서해 번쩍 해야겠나?”

    “무슨, 제가 홍길동이에요?”

    “홍, 뭐?”

    “아니, 아닙니다. 용건이 뭔데요.”

    여자는 머리를 긁적이며 퉁명스레 물었다.

    그러자 노인이 품을 뒤적이다가 작은 종이 하나를 꺼내 그녀의 손에 쥐어 주었다.

    여자는 손에 남아 있을지 모르는 물기를 슥슥 닦곤 종이를 펼쳐 들었다.

    “왕이 찾네요.”

    “아, 그 자네한테 다섯 번이나 프러포즈했다가 차인 놈?”

    “…예”

    여자는 눈을 감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가 작게 대답했다.

    “으휴, 그 못난 놈이 또 와?”

    “요즘 시끌시끌하던데 그거 때문이겠죠, 뭐.”

    “기야?”

    노인은 흘흘거리더니 지팡이를 짚으며 몸을 돌렸다.

    그러곤 나지막이 말했다.

    “하여간에, 몸 관리 잘햐, 다음에 또 봐야지.”

    “예, 어르신. 덕분에 이번에도 잘 쉬다 갑니다.”

    “가시게.”

    여자는 작게 웃으며 순식간에 그곳에서 사라졌다.

    노인은 힐끔 그녀가 사라진 곳을 살피곤 다시 걸음을 재촉해 갔다.

    여자는 며칠 전 안젤리나의 긴 편지를 받았었다.

    그 안에는 자신이 만났던 특이하고 살벌한 남자에 대해서 기술되어 있었다.

    대장장이지만 전투에 굉장히 특화되어 있으며 그뿐만 아니라 에고 장비까지 소유하고 있는 막강한 남자.

    ‘한’이 사라지고 용의 가호를 얻었다고 하여 운 좋게 최상위 랭커 자리를 붙들고 있는 자신들과는 격이 다르다는 남자.

    여자는 가만히 그 사실을 복기해 보았다.

    알고 있다.

    자신이 짊어진 이 무거운 옷 ‘랭킹 1위’라는 타이틀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물론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누구도 자신에게 함부로 덤비지 못하며 날고 긴다는 놈들을 단박에 입 다물게 해 줄 수 있지만, ‘한’보다는 결코 강하지 못하다.

    그의 곁에 견줄 자는 이 세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그가 짊어진 랭킹 1위와 지금의 랭킹 1위는 어떨까?

    전혀 다를 것이다.

    “여기서 뭐 해?”

    익숙하고도 불쾌한 목소리.

    여자는 고개를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어둠이 밝아지고 이내 그녀가 있던 곳이 넓은 서재 한 구석이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국왕 롬.”

    “오랜만이야 린.”

    입이 귀에 걸린 롬 국왕과 똥 씹은 표정으로 일관하고 있는 린은 서로 다른 의도를 가진 채 악수를 나눴다.

    “나머지 랭커도 모여 있어, 가자.”

    롬의 말에 린은 조용히 그의 곁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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