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40화 (140/200)
  • ◈140화

    일행을 두고 정혁과 김창수는 조금 걸었다. 일정 거리로 멀어질 때까지 정혁은 입을 열지 않았고 김창수 역시 특별히 말을 꺼내진 않았다. 안나에게 어느 정도 정황 보고를 들었다. 현재 제논의 상황은 그렇게 좋지 않다.

    두 국가의 경고를 무시했고 여전히 타이런에서 버티고 있다. 마계의 악마들과의 대립도 완전히 정리된 것이 아니다. 아크는 소멸된 것이 아니다. 위협을 느끼고 도망갔을 뿐. 두 국가와의 섣부른 전투가 자칫 제논의 허점을 노출하는 불리한 형국을 만들 수도 있다. 김창수는 골치가 아팠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정혁이 해답을 가져오기를 바라는 마음. 해답이랄 게 뭐 있겠는가. 그저 그가 더 강해져서 돌아오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정혁은 그럴 가능성이 높은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런 그의 앞에 나타난 정혁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김창수의 기대에 정혁은 뭔가 다른 방식으로 응답하고 있는 것 같았다.

    활기 넘치고 생기발랄하던 그의 모습은 사라지고 어딘가 어둡고 침전되어 있었다. 그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불안감이 가중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왠지, ‘한’의 기운이 감도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그 기운은 더 강렬해졌다. 이건 김창수가 바라는 모습이 아니었다. 그의 기대에 이런 면은 들어 있지 않았다.

    ‘한’이 어떤 자였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기에 그의 성격에 완전히 반대되는 정혁이 다시 ‘한’의 성격으로 돌아가길 바라지 않았다. ‘한’은 지독히도 독선적이고 개인적이며 무엇보다 잔혹했다.

    그런 그의 성품은 누군가를 이끌고 포용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곁에 있어 봤기에 충분히 알고 느꼈던 부분이었다.

    이미 정혁에게 많은 부분을 기대고 있는 제논이기에 이런 식의 전개는 달갑지 않다. 김창수는 지금이야말로 정혁에게 따끔하게 한마디 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강해지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정혁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와 함께 김창수도 걸음을 멈췄다. 스산한 바람이 그들을 스쳐 간다. 그때였다.

    정혁이 품에서 그의 네 번째 에고 장비 젠트라를 꺼내 들었다. 순간 엄청난 마나가 폭발하듯 근처로 퍼져 나가고 김창수는 당황하며 양날 도끼를 휘둘러 자신을 방어했다.

    도끼날에서부터 불길이 터져 오르며 강렬한 장막을 펼친다. 요동치는 두 힘이 막을 두고 부딪쳤다. 정혁은 여전히 웃고 있다. 김창수는 양날 도끼 자루를 바닥에 내리꽂으며 그를 노려보았다. 도끼 근처로 펼쳐진 장막의 테두리부터 천천히 깨져 간다.

    “정혁-!”

    김창수가 소리쳤다. 그러나 정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다 순식간에 주변의 마나가 온전히 정혁에게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곤 김창수의 눈앞에서 정혁이 사라졌다. 살기. 그것이 느껴질 때 김창수가 오른쪽으로 양날 도끼를 쳐 올렸다. 정혁의 두 단도의 날이 양날도끼의 날과 맞부딪쳐 비명을 질렀다.

    “이게 무슨!”

    김창수의 고함에도 불구하고 정혁은 다시 모습을 감추었다가 그의 왼편에서, 아래에서, 머리 위에서 정신없이 등장해 김창수의 목숨을 노렸다. 진심으로 말이다. 김창수는 사력을 다해 그의 공격을 막아 냈다. 하지만 한계에 다다라 한쪽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느꼈다.

    그의 압도적인 공격 앞에서 완벽한 ‘한’의 모습이 투영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미… 그 선을 넘은 것인가.’

    김창수의 무릎이 꿇어지자 정혁은 공격을 멈추고 다시 그의 앞에 평온히 나타났다.

    “당신이라면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하.”

    김창수가 헛웃음을 뱉었다. 그리곤 말을 이었다.

    “무슨 말을 해 주길 바라나. 자네가 결국 그가 되었다고 인정하길 원하는 건가?”

    “…어떤데?”

    정혁의 물음에 김창수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조용히 정혁을 노려보았다. 그의 전신에서 응축되었던 마나가 솟구쳤다. 결전의 투사가 작은 형태로 김창수의 등 뒤에 나타났다가 그와 융합되었다. 김창수는 그간의 전투로 인해 더욱 강해졌다.

    과거의 자신은 이제 없고 공격과 방어, 두 분야에 완전히 날이 선 투사 그 자체가 되었다. 한 손엔 그의 양날 도끼가, 그리고 다른 한 손엔 마나로 형상화 된 또 다른 양날 도끼가 쥐어졌다. 그는 곧바로 정혁에게 달려들었다.

    “아니.”

    정혁이 탄식하듯 한마디 뱉었다.

    두 개의 거대한 도끼가 정혁의 정수리에 꽂아졌다고 느꼈지만 이내 붕 떠오른 쪽은 김창수였다. 그는 그 순간을 찰나로 기억한다. 부딪치고 떠오르고 추락했다. 지면에 몸이 닿는 순간 심장이 조여지며 타오를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전신에 둘러졌던 고유 스킬은 전부 사라지고 남은 것은 손에서 떠나 어딘가에 처박힌 양날 도끼와 부서진 갑옷 부분들이었다.

    김창수는 입술을 깨물고 고통을 삼켰다.

    눈을 질끈 감아 호흡을 입안에 담았다. 심장의 고통이 잦아들길 기다렸다가 옅어지자 토하듯 숨을 뱉었다.

    “…완벽하군.”

    고통에 일그러진 목소리로 김창수가 말했다. 정혁은 조용히 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고 김창수는 그의 손을 잡아 몸을 일으켰다. 정혁의 양손에 그의 두 망치가 쥐어졌고 이내 김창수의 부서진 부분들과 날이 상한 망치를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수리했다.

    김창수는 가만히 그가 수리해 준 장비들을 다시 입었다. 전보다 더 성능이 좋아진 느낌이었다.

    “미안합니다. 갑자기 이렇게 공격해서.”

    어느 정도 김창수가 진정되고 회복된 듯 보이자 조심스럽게 정혁이 입을 열었다.

    김창수는 아무런 대꾸 없이 장비들을 마저 정비했다. 어깨끈을 조이고 양날 도끼의 도끼날을 비껴 보곤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작은 침묵. 정혁은 가만히 김창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자넨 지금 정혁인가, 한인가?”

    김창수의 말에 정혁이 곧바로 대답을 하려다 말았다.

    자신에게 반문해본다.

    ‘나는 한인가 정혁인가? 아니, 사실 질문부터가 틀렸다. 나는 정혁도, 한도 아니다. 그저, 그래. 그저 프로그램일 뿐.’

    김창수의 시선이 정혁에게 집중되어 있다. 그는 혼란스러워하는 정혁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럴 수 있다고 판단된다. 자신의 힘이 돌아올수록, 자신의 과거 능력에 취할 수 있겠지. 이 모든 일들이 자기 혼자서 마무리할 수 있을 거라고 여기겠지.

    한은, 이 세계에서 만큼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존재였으니.

    압도적인 힘과 압도적인 공포심을 줄 수 있는 존재였으니.

    그러나 지금 정혁은 그런 인물이 아님을 김창수는 알고 있다.

    “자네가 한이든, 정혁이든. 나는 상관없네.”

    정혁은 의외의 발언에 고개를 들어 김창수의 눈을 보았다. 동공은 온전히 정혁에게만 향해 있었다. 흔들리지 않고 거짓이 없다. 그의 억센 얼굴에 진솔함이 가득 담겨 있다.

    “자네가 무엇이든 나는 전혀 상관없네.”

    “무슨 말입니까.”

    정혁은 조금, 그의 말에 위로를 받았다.

    물론 그가 자신의 진짜 정체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겠지만 그 문장 자체가 그에게 위로가 됐다.

    “말 그대로일세. 나에게 자네는 그저 제논의 길드장이자, 연합의 지도자이면 그만이라는 말이지. 내가 자네에게 기대하는 것? 그것은 내가 과거 제논을 이끌 때 그러했듯, 강함을 근원으로 하는 책임과 희생이라네. 자네는, 우리의 미래를 짊어지고 있는 자일세.”

    김창수가 몇 걸음 정혁에게 다가왔다.

    “그간의 전투에서 보지 않았나?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자네에게 얼마나 많이 기대고 있는지. 자네의 힘을 보고 경악하면서도 그런 자네의 모습에 존경심을 표하며 자네가 걸어가는 길 앞에 함께한다는 사실에 얼마나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지 말이야. 그들의 꿈과 미래를 현실로 만들어 줄 사람이 자네이면 되네. 나는 그것이면 족해.”

    김창수는 정혁의 양 어깨를 쥐었다.

    그의 악력이 정혁의 양 어깨를 굳세게 쥔다. 정혁은 그 손길에서 신뢰를 느꼈다.

    오아시스의 칭호를 가진 자들과의 불편한 대화.

    젠트라와의 혼란스러운 이야기.

    모든 사실들이 부정되는 시간들 속에서 겨우 빠져나와 어쩌면 정혁은 진짜 자신의 현실 앞에 마주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 자신은 정혁도, 한도 아니요, 그저 이 연합의 지도자이자 이들의 미래를 짊어진 한 존재일 뿐이다. 이들이 그를 믿어 준다면 그 믿음에 응당 반응해 줘야 할 터.

    “…그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반대로 김창수가 정혁의 눈에서 진실된 모습을 발견한다.

    그래. 이 눈빛이다.

    김창수가 그를 한일지도 모른다고 착각했던 순간부터, 그럼에도 그는 결코 한이 될 수 없다고 확신했던 순간들까지. 함께 걷고 함께 피 흘리고 싸우고 쟁취할 수 있었던 나날 속에 정혁은 저 눈 안에 있었다.

    그라면,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압도적인 강함으로, 모두의 존경으로, 세계의 질서와 정의로 설 수 있는 자라고 믿을 수 있었던 이유는, 저 눈 안에 정혁의 본질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순수한 자.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 무게를 짊어질 수 있는 그릇을 가진 자라는 본질 말이다.

    “그렇다면 다시는 나 없이 전장에 나서지 말게.”

    “예?”

    “자존심이 좀 상해서 말이야. 어쩌면 이젠 나 따위야 필요조차 없어졌을 지라도.”

    김창수의 목소리에서 씁쓸함이 묻어났다. 실제인 것을 어쩌랴. 방금의 부딪침으로 김창수는 확실히 깨달았다. 아무리 노력한다 하더라도 저 끔찍한 재능와 능력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을.

    “그럴지라도 나와 함께 가세나. 내 작은 소망은 자네가 위업을 달성하는 순간마다 그 곁에 함께 있는 것이네.”

    김창수는 말을 마치고 양날 도끼를 등 뒤에 고쳐 맸다. 정혁은 피식 웃고는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나저나, 그 단도, 상당히 비범한 물건인 것 같구만.”

    정혁은 자신의 단도를 가리키는 김창수에게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이게 젠트라예요.”

    정혁이 아무렇지도 않게 꺼내진 젠트라라는 단어에 김창수가 고개를 홱 돌리고 뚫어져라 정혁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이내 너털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몇 번 손가락질을 한 뒤 말했다.

    “하여튼, 자네는 정말 특이한 사람일세.”

    고개를 돌려 다시 걸음을 옮겼다.

    김창수는 생각했다. 자신의 역할은 여기까지라고 말이다.

    그의 리더가 가끔 혼란에 빠지거나 갓길로 새는 것 같을 때 곁에 서서 옳은 길을 알려 주는 역할. 이제는 더 이상 그 누구도 그의 힘 앞에서 마땅히 그에 견줄 도움은 줄 수 없을 것이다.

    용의 가호?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이랴, 그는 이미 고대룡 젠트라를 에고 장비로 쥐고 세상에서 모습을 감춘 드래곤을, 그것도 태초의 드래곤과 견줄 만큼의 힘을 가진 드래곤을 타고 날아다닌다.

    그와 함께 하는 불의 정령왕은 나날이 강대해지고 고대 엔트의 힘은 다방면으로 그의 전투를 돕는다. 게다가 천계의 무기고를 언제든 열어 천사들이 사용하는 무기를 마음대로 활용한다.

    이런 미친 스펙을 가진 자를 이제 어떻게, 그 누가 꺾을 수 있겠나.

    한도 존재하지 않는 마당에 말이다. 그의 전투에서 그가 걸러낸 약한 적들을 베어 넘길지언정 그런 자존심 구겨지는 전투를 반복해야 할지언정 그럼에도 김창수는 그의 곁에 있고 싶다.

    모두의 바람처럼 그의 영웅적인 걸음의 곁에서 흐르는 바람에 담긴 호흡 한 결이 되고 싶다.

    둘은 또 한 번 조용히 병력들의 곁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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