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소모전이 이어지고 있었다.
산발적인 게릴라성 전투가 계속해서 벌어진다.
전초기지를 세웠지만 그렇다고 욘마곤 지역 전체를 두른 거대한 철책을 세운 건 아니었기 때문에 전초기지와 전초기지 사이의 경계를 소홀히 할 수 없었던 제논의 병력들은 종종 사이 공간을 치고 들어오는 다른 국가 특수 병력들의 습격을 받아야 했다.
잘 훈련된 제논의 병력들이었지만 습격 앞에는 장사가 없었다.
그렇기에 병력들의 사기도 점점 위축되기 시작했고 전초기지의 파견 기간이 길어지자 병력들의 푸념들도 많아졌다.
이런 장기전엔 명분이 필요하다.
플레이어들에겐 그저 게임일 뿐, 서로 간의 신의로 뭉쳐 있다고는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갈대와 같아서 결국은 언젠가 흩어지고 만다.
정혁의 강함에 압도되어 많은 플레이어들이 제논으로 밀려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에게 보급받은 훌륭한 무기들에 매료되어 전장에 나갔고 이제까지는 거대한 악과 싸워 낸다는 사실에 가슴 벅찬 마음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결국 정치 싸움에 매여 있기 때문에 플레이어들에겐 지금의 싸움의 당위성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각자에겐 각자의 목표와 원하는 바가 있다.
그것을 하나로 일치단결시키는 것이 지도자의 몫.
하지만 지도자가 부재인 지금 모든 플레이어들의 목표를 일치시켜 주기란 참 어려웠다.
김창수도, 왈로도 이 사실을 뼛속 깊이 알고 있기에 돌아가는 상황이 좋지 않음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드웨이크 님은요?”
왈로가 묻자 김창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테이블 중앙의 거대한 타이런 대륙의 지도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제논의 전초기지 구역이 욘마곤의 경계를 타고 중간중간 세워져 있다. 그리고 대륙 중심부 아무도 가지 않는 땅에 한가운데에는 노래하는 화산이 웅장히 서 있다. 여전히 험악한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말이다.
그리고 북동쪽 넓은 땅에 에도라 왕국이 자리하고 있다.
수도에 웅장한 성채가 세워져 있고 그 주변으로 크고 작은 도시들이 즐비하다.
서쪽의 에도라보다 조금 더 넓은 영토에 안도리니 제국이 세워져 있다. 뿌연 공기가 가득한 이 땅엔 마치 현실 세계와 비슷하게 기차와 비행기가 날아다닌다.
오아시스엔 마나가 있다.
마나라는 것이 현실 세계의 어떤 무기들보다 월등히 강할 뿐 아니라, 플레이어들의 칭호 능력들로 인해 훨씬 유용하고 효과적인 전투를 펼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도리니 제국은 왠지 모르게 자기들끼리 현실 세계와 비슷한 모양으로 제국을 이루어 살아가고 있다.
김창수는 그들이 사이코 집단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아니, 그곳의 삶은 게임 속인 여기서도 여전히 해내고자 하는 불편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 말이다. 왈로가 손으로 안도리니 제국의 심장부, 수도 ‘요동치는 엔진’을 가리켰다.
“이들이 제일 문제입니다.”
김창수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알고 있다. 저번의 불쾌한 경고성 편지를 보낸 자들도 바로 이자들이다.
물론 에도라 왕국도 경고를 보내긴 했지만 안도리니 제국만큼 호전적이진 않았다.
당장 꺼지라는 식의 말을 듣고 마음이 편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김창수는 가만히 숨을 고르며 생각에 잠겼다.
안나가 조금만 기다려 보자고 했었다.
정혁이 사라지고 상황이 나쁘게 돌아가고 있기에 몇 번 그의 책사인 안나에게 여러 정황들을 설명하며 조언을 구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조금만 더 기다리자는 거였다.
김창수는 안나의 판단력이 많이 흐려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마치… 무언가에 쫒기는 사람처럼 보였다.
드웨이크의 처분 역시 마찬가지였다
.
그저 로그아웃시켜 조금 쉬게 했다가 다시 만나면 되는 것을 안나는 기어코 반대해 드웨이크의 코마 상태를 유지시켰다.
어차피 현실 세계의 6개월, 이곳 시간으로 1년이면 제논이 타이런을 정복하든 혹은 무너지든 둘 중의 하나의 상태로 결론이 나있을 텐데 무엇이 그리 걱정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과거엔 자신이 모든 상황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여러모로 답답하고 응어리진 무언가가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것만 같다.
김창수는 가만히 자신의 왼쪽 가슴에 손을 올리고 지그시 눌렀다.
왈로가 그 모습을 흘깃 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명분을 만들 때가 왔군.”
김창수는 조용히 한마디 던지곤 눈을 깊게 감았다가 떴다.
“움직여야겠어.”
“어떻게 말입니까?”
“우리가 안도리니의 옆구리를 긁어 줘야겠네.”
“…예?”
왈로가 당황해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곤 버벅거리며 말을 이어 갔다.
“아, 아니 사령관님! 지금은 저, 저희가 저들을 어떻게 할, 할 수 없는 상황이잖습니까?”
김창수는 여전히 지도를 내려다보고 있다.
“마스터께서도 자신을 기다리라 하셨고… 게다가 아직 악마들의 잔당이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잖습니까! 저번에 보셨잖아요, 그 엄청난 힘을 가진 대악마 아크라는 놈 말입니다!”
“…왈로.”
김창수가 양팔을 지도가 놓인 테이블 위에 올려놓아 몸을 지지한 채 고개만 살짝 들어 왈로를 쳐다보았다.
김창수의 매서운 눈동자에 왈로는 침을 꿀꺽 삼키며 입을 다물었다.
안다. 알고 있다. 김창수의 지금의 말이 결국 현재 제논의 병력들에겐 반드시 필요한 행동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그 이후의 리스크를 과연 욘마곤의 제논이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할 수만 있다면 진작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할 수 없었다. 너무 위험한 처사다.
“마음에 드네요.”
그때 왈로의 방, 가려진 어둠 속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의 목소리였다.
김창수는 순식간에 품에서 붉은 날의 단도를 꺼내 그 방향으로 던졌다.
붉은 날의 단도는 벽에 박혔지만 단도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빛이 그 아래 앉아 있는 어두운 여성의 모습을 비추었다.
“…나이트…엘프?”
왈로가 그녀를 조금이라도 자세히 보려고 하는 듯 눈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여자는 벽에 박힌 단도를 뽑아내 김창수에게 받으라는 듯이 던져 주었고 그와 함께 걸음을 옮겨 빛 속으로 걸어 나왔다.
어두운 피부와 맑은 눈. 뾰족 솟은 귀. 그러나 복장은 너무도 현대적인 큰 키의 여자.
“반갑습니다. 신생 연합 제논의 수뇌부들. 당신네보단 정혁이라는 사람에게 관심이 있었는데 썩 유쾌한 만남은 아니었고, 그래서 일단 여기로 왔어.”
말투로 보나 느낌으로 보나, 그녀는 영락없는 이프였다.
김창수는 그녀를 알고 있었다.
과거 안도리니와의 마찰이 있었던 때, 그들이 ‘기르고’ 있던 어린 나이트 엘프를 스쳐 가듯 본 적이 있다.
안도리니 놈들의 악취미는 유명하니,
그들의 훌륭한 싸움 말이 되어갈 것이라, 그녀를 보며 예측했었다.
안도리니의 나이트엘프라면 지금의 제논에겐 적. 김창수는 단박에 기세를 올리고 그녀를 밀어붙일 준비를 갖췄다.
왈로 역시 김창수의 기운을 느껴 곧바로 전투 준비에 돌입했다.
“아. 아아, 노노, 그러지 말고. 아니에요, 아니라니까.”
그러자 이프 역시 위협을 느낀 듯 양 손바닥을 보이며 손사래를 쳤다.
긴장을 늦출 순 없지만 김창수는 숨을 고르고 이프를 주시했다.
“당신네들은 하나같이 급하네. 정혁이라는 양반도 뭣도 없이 마나석 동굴로 들어가더만. 왜 그래요?”
이프는 천천히 몸을 움직여 테이블 가까이의 의자로 향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뒷 춤의 두 군용 나이프와 허벅지에 달린 권총 두 자루,
그리고 마지막으로 발목에 넣어 놓은 작은 단도까지 꺼내 테이블 위에 멋대로 올려놓았다.
자신에겐 더 이상 무기가 없다는 표시로 다시 양손을 흔든 이프는 의자를 뒤로 기대 양다리를 위에 올려 조금 건방진 자세를 취했다.
김창수는 왈로에게 눈짓을 했고 왈로는 알겠다는 듯이 살기를 거두었다.
김창수는 쯧 하는 소리를 내며 테이블을 당겼다.
그러자 이프의 두 발이 테이블 아래로 내려갔다.
이프는 입술을 비죽이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여긴 적진이네. 아닌가?”
“…아닌데요?”
이프는 조금 뻔뻔한 표정으로 대답하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증거는 있나? 자네가 우리와 우호적이라는 증거.”
이프가 김창수의 말을 듣고 소매를 뒤적이다가 어떤 동그란 동전 같은 것을 꺼내 테이블 위로 던졌다.
김창수는 그것을 들어 자세히 살펴보았다.
은행나무 엘프 왕국의 국왕 아린의 직인이 각인된 일종의 왕국민 증명서 같은 것이었다.
미묘한 아린의 마나가 느껴졌다. 김창수는 큰 숨을 들이쉬었다가 뱉으며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어떻게 아린 국왕에게까지 닿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증표엔 거짓은 없군.
그러나 애석하게도 자네의 말처럼 우리는 불필요한 대화를 오래 나누는 것을 즐겨하지 않는다네,
말보다는 행동이 먼저지. 무슨 일로 이 불편한 만남을 주선하고자 왔는가?”
김창수가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이프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필요한 거 아니었어요? 저들의 정보?”
이프가 손가락으로 한곳을 가리켰다. ‘요동치는 엔진’. 안도리니의 수도였다.
“우리를 돕겠다는 의사인가?”
“아니, 그럼 아린 국왕께서 저를 이곳으로 보낸 이유가 뭐겠습니까? 물론 당신네 마스터와 나눌 이야기이긴 하다만 그쪽은 영 바빠 보이니 어쩔 수 없고. 꿩 대신 닭 아니겠어?”
왈로가 불쾌한 티를 냈지만 김창수는 그에게 약간의 눈치를 주었다.
이프는 피식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안도리니는 게릴라 공격에 능통해. 아마 조금씩 전초기지 주변에 허점들을 파악해 나갔을 테고 지금부터는 그 허점들을 중심으로 산발적 타격을 이어 갈 겁니다. 김창수 사령관이나 왈로 팀장만큼 이 사상.”
이프가 자신의 머리를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이 사상 무장을 완벽히 한 사람들이 있으면 모를까, 그게 아닌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금방 무너질 테죠?”
김창수는 그녀의 말이 불편했지만 그럼에도 틀리진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무너지기 전에 다시 기틀을 세우려면 아까 당신들이 말한 것처럼 무모하더라도 우리가 먼저 치고 들어가야 할 겁니다. 나는 알지. 어디가 취약한지. 어때? 필요해요? 정보?”
이프가 손가락을 까딱하며 자신의 우월감을 과시했다. 왈로도 김창수도 어이는 없었지만 앞으로의 전투에 그녀의 정보가 유용한 역할을 할 것임은 분명했다.
“…알겠네. 도움은 기꺼이 받기로 하지.”
김창수의 동의와 함께 이프가 손바닥을 비비며 빙긋 웃었다.
그러곤 지도 앞으로 성큼 몸을 가까이 한 뒤 욘마곤의 경계와 안도리니의 경계 사이의 표시된 여러 방어 성채들을 돌아보았다.
그때였다.
“사령관님!”
방 문이 열리고 벌컥 한 플레이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휘장을 보아 수비대 소속이었다.
그는 급히 달려온 듯 거친 숨을 몰아쉬며 김창수를 바라보고 소리쳤다.
“저희와 가장 가까운 위치의 안도리니 방어 성채 하나가 공격받고 있습니다!”
김창수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사실인가?”
이프가 재빨리 현재 전초기지와 가장 가까운 방어 성채를 찾아 확인했다.
“롤란의 불칼이잖아…? 여긴 가장 견고한 방어 성채인데다 유명한 방어 전사 롤란이 있는 곳인데… 누가?”
플레이어는 나이트엘프의 존재에 조금 놀란 듯하다가 재차 말을 이었다.
“보고로는 황금빛 드래곤이 하늘을 날아다니고 거대한 불길이 계속해서 성채 곳곳을 휘몰아치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정혁!”
왈로와 이프 그리고 김창수가 동시에 하나의 이름을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