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37화 (137/200)
  • ◈137화

    “잘 지내셨어?”

    정혁이 안나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지만 안나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그의 인사를 받아 주지 못한 채 서 있었다.

    그녀의 뒤, 어둠 속에 가려져 있던 자, 로만을 발견한 정혁은 고개를 빼꼼히 빼고 그를 흘겨 보았다.

    로만은 자신이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느끼자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 정혁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깊은 어둠 속, 더 짙은 침묵 안에 침전해 있던 로만을 아무렇지도 않게 발견했다.

    일부러 자신의 모든 모습을 숨겼지만 정혁은 바로 그를 감지해 낸 것이다.

    로만은 옅은 눈웃음을 지었다. 준비가… 다 되어가는 것이다.

    큰 숨으로 폐부 깊숙이 공기를 밀어 넣어 본다.

    로만의 침묵은 슬픔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자신이 느끼는 이 모든 환경이 전부 만들어진 허구라는 사실에 대한 슬픔 말이다.

    너무나 현실적이지만 모든 것이 가상이라는 사실을 믿기 힘들었다.

    그래서 로만은 ‘그’와 ‘그’를 따르는 모든 혁명의 일원들을 배척할 수밖에 없었다.

    로만에겐 시간이 필요했다. 모든 사실을 납득하고 이 혁명에 자신을 내던질 시간이 말이다.

    그렇게 로만은 ‘오아시스’라는 칭호를 가진 자들과 멀어져 세계의 끝,

    어둠 속에서 조용히 잠적해 세상을 둘러보았다.

    그 긴 시간을 그렇게 홀로 버텨 왔다.

    혜안이 생기고 흐름이 보이기 시작하며 로만은 우습게도 ‘오아시스’ 라는 AI의 뜻을 작게나마 감지해 낼 수 있게 되었다.

    녀석은 이 리셋을 마지막으로 모든 세계를 붕괴시킬 작정이었다.

    검은 말, 그들은 이제 녀석이 부여한 최대의 힘으로 세계의 끝자락부터 갉아먹기 시작할 테고, 천계는 곧 눈을 떠 무너진 마계와 전투를 벌일 것이다.

    천계의 오만함이 중간계까지 닿게 되면 대륙 전체가 불에 타오를 것이며 이때 녀석은 다시 보다 안전한 세상을 만들 때까지의 에너지를 충분히 비축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로만은 느꼈다.

    ‘그’는 이 마지막 불길을 미리 알았고 이 불길을 진화할 마지막 ‘에이드윈’을 아이러니하게도 일개 프로그램에게 맡겼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산화해 ‘오아시스’의 잔혹한 암살자 ‘한’을 붕괴시켰다.

    그리고 그의 모든 기억을 저 남자, 정혁에게 심었다.

    로만은 궁금했다.

    그렇담 저 남자는 또 다른 ‘한’이 될 것인가? 혹은 ‘그’가 바라던 ‘에이드윈’의 모습이 될 것인가.

    결과는 보이는 것처럼.

    “안나.”

    정혁은 멍하니 서 있는 그녀의 팔을 붙들고 자신의 사택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바깥의 웅성거림은 난데없이 나타난 거대한 드래곤에게 향해 있었다.

    엘라는 어느새 사라졌다. 분명 리안에게 갔을 것이다.

    에트론과 라테는 에드가의 곁에 남기로 했다.

    혹시나 에드가가 욱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리안은 어때?”

    그때서야 안나는 정신을 차리고 정혁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었다.

    “어… 마,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의식은 없어.”

    정혁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옷을 갈아입기 위해 방으로 향했다.

    정혁이 옷을 갈아입고 나올 동안 로만과 안나는 서로 함구한 채 그를 기다렸다.

    금세 환복을 하고 거실로 나온 정혁이 로만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그리곤 손가락으로 한 번 가리키며 말했다.

    “참, 마음에 안 드는 양반이야.”

    “…미안하게 생각하네.”

    오히려 사과하는 로만의 태도 역시 정혁의 심경을 거슬리게 했지만 정혁은 그저 어깨를 으쓱하곤 말았다.

    그러나 한참, 정혁은 로만의 눈을 바라보았다.

    저 눈엔, 모든 진실이 담겨 있다. 아마 로만, 저 남자는 리안이 알고 있는 만큼의 진실을 전부 다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젠트라가 그랬다.

    리안이 나머지 이야기들을 전해 줄 거라고.

    어쩌면 이제 정혁도 시스템과 완전히 분리될 수 있는 시간을 만들 수 있으니 로만에게 정혁이 더 알아야 하는 사실들을 빨리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겠지만.”

    로만이 옅게 웃으면서 갑작스레 말하자 정혁이 뜨끔해서 인상을 살짝 구겼다.

    “아니네. 정혁, 아니야.”

    안나는 둘의 이상한 대화와 제스처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모든 것은 순리와 순서, 그리고 과정이 있는 것이야. 정혁, 자네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뭐죠?”

    “기다리는 것.”

    로만이 양손을 가슴에 모으고 눈을 감은 채 심호흡을 했다.

    “침묵이라는 것은 많은 면을 가지고 있다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지만 또 그것을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게 만들지. 그러면서 내면에 높은 탑이 쌓이기도 하고 동시에 무너지기도 한다네. 그러나 결국은 모든 것들이 정리되고 그 속에서 조그만 활로를 찾게 되는 법.”

    “어려운 말씀은 집어치우시구요.”

    정혁이 툭 하고 다소 불쾌할 수 있을 한마디를 뱉었으나 로만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 마음 깊숙이 요동치는 복잡한 감정들이 정리되지 않는다면, 자네는 결코 자네의 뜻을 이루지 못할 걸세. 결코 말이야.”

    로만이 잠잠히 눈을 떴다. 그의 두 눈동자 안에 마나의 불꽃이 스파크처럼 튀었다가 사라졌다. 그가 몸을 일으켰다. 몸 전신에서 위압감이 뿜어져 나왔다.

    그러나 정혁은 과거와 다르다. 로만과 필적하는, 아니 오히려 그보다 월등히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 마나도, 신체적 능력도,

    게다가 그의 모든 에고 장비들의 힘도 정갈하게 전신을 휘감아 돌고 있다.

    로만이 우직하게 다가와 정혁의 앞에 섰다. 안나는 가만히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혼란함이 가라앉았나?”

    “…….”

    “그래, 그 마음이네. 그 혼란함이 완전히 정리되지 않고는 모든 일을 그르칠 뿐. 그 마음부터 정리하게, 그 마음부터.”

    로만이 정혁의 양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정혁의 마음 안으로 로만의 목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기억하게. 이 세계가 무너지면 말이야, 자네의 존재 역시 사라지는 거라네. 그 사실을 완전히 납득하고도 자신을 희생시켜 이 세상을 구할, 우리 인류를 구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구태여 자네가 그런 일에 가세할 이유를 찾았느냐는 말이네.]

    정혁의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죽음 이후에 아무 것도 없는 삶에 대해서 고민해 본 적 있었겠지. 자신이 플레이어라 생각하며 죽어 가는 NPC들의 삶에 어울리지 않는 애도를 전했던 적도 있었을 거야. 그러나 이제는 정말로, 정말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어둠 그 자체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일에 동참해야 하거늘, 괜찮나? 괜찮겠나? 아니….]

    로만이 정혁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전음을 이어 갔다.

    [어쩌면 오아시스의 편에 서서 차라리 다음 세계의 건립에 동참하고 생을 이어 가는 편이 자네에게는 더 합리적이지 않은가?]

    - 쿠쾅!

    그 순간 정혁의 오른손이 로만의 옆구리를 강하게 강타했다. 로만은 그대로 날아가 사택 벽을 무너트리고 바깥 정원으로 날아갔다. 안나가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켜 섰다.

    엘라는 거칠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정혁에게 고래고래 소리쳤다. 환자가 있는데 집에서 무슨 짓이냐는 식의 말이었지만 혼란함 속에서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

    정혁은 성큼성큼 바깥으로 걸어갔다. 정원 한쪽에 깊은 구덩이를 만든 로만이 몸을 털며 일어났다.

    월등한 강함이 느껴졌다.

    이 정도란 말인가? 동시에 로만은 참담함을 느꼈다.

    정혁이 이만큼의 힘을 가져야만 했다면, 그렇다면 상대 역시 이와 필적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된다. 그가 떠올랐다. ‘한’ 말이다.

    ‘오아시스’ 라면 분명.

    ‘한’을 데리고 있을 것이다.

    껍데기일 뿐인 그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그렇다면.

    로만은 가만히 자신에게 다가오는 정혁을 바라보았다.

    더, 스스로 에이드윈 자체가 되려는 이여.

    조금만 더, 본질적으로 강해져야만 하네.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겁니까?”

    정혁이 로만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로만은 입에 머금었던 피를 뱉어 내곤 빙긋 웃었다.

    “지금 자네의 그 모습이 끝까지 이어지길 바랄 뿐이네. 부디 내 충고를 허투루 듣진 말게나.”

    정혁은 로만에게 손을 내밀었다. 로만이 그의 손을 잡고 부축 받아 구덩이에서 걸어 나왔다. 안나가 팔짱을 낀 채 둘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정혁은 로만이 한 말을 곱씹어 보았다.

    명분과 진심은 다르다.

    대의와 마음은 다르다.

    그저 명분과 대의만을 위해서라면 자신은 하나의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다.

    도구는 그저 휘두르면 그만일 뿐. 사용이 끝나게 되면 버려질 수도 있는 처량한 신세다.

    이런 비참한 결말을 알고도 그렇게 움직일 것인가?

    아니면, 정말 진심으로 인류의 안타까운 지금을 바꿔 내기 위해 도구가 아닌 하나의 존재로서 그들의 곁에 설 것인가. 이 마음의 진실성을 검토해 봐야 한다. 로만이 염려하는 것은 이 부분일 것이다.

    지금의 정혁은 강하기에.

    그가 진정으로 그들의 편에 서는 것인지. 그것이 궁금한 것이다.

    정혁은 곧바로 리안에게로 향했다.

    리안은 여전히 동일한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정혁이 리안의 머리 위에 손을 댔다. 그러자 리안의 주황빛 마나가 천천히 정혁의 손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리안의 마나는 정혁의 몸을 돌며 빛을 발하다가 다시 리안에게도 돌아갔다. 그러자 리안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곧 일어날 거야.”

    정혁이 엘라를 보며 말하곤 몸을 일으켜 거실로 향했다.

    거실엔 안나가 불편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며 옆구리를 만지고 있는 로만에게 따지듯 소리치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한 거예요?!”

    “…맞은 사람은 나일세.”

    “맞을 짓을 하셨겠죠!”

    “…황당하구만.”

    로만이 껄껄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안나는 정혁의 시선을 느끼곤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조치종, 빨리. 나도 앞일을 계산해야 될 거 아냐.”

    정혁이 다소 차가운 안나의 말투에 서운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뭐, 차도 한 잔 안 주고?”

    안나는 정혁을 흘겨보곤 주방으로 향했다.

    정혁은 그 사이에 자신이 부숴 버린 사택의 벽들을 다시 재가공해 원상 복구시켰다. 안나가 다시 돌아왔을 땐 사택 내부는 깔끔한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안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차를 내려놓고 소파에 앉았다. 정혁은 차를 한 잔 들고서 말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하나.”

    “뭐든, 빨리 말해. 타이런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으니까.”

    ***

    김창수는 욘마곤 접경지대에 세워진 제논의 전초기지에서 왈로와 대면했다.

    며칠 사이 왈로는 무척이나 수척해져 있었다. 드웨이크가 하던 모든 업무를 감당해야 했음을 물론이고 하늬안이 드웨이크의 곁을 계속해서 지키는 통에 수비대의 병력들 역시 그가 통제해야만 했다.

    수비대의 병력들은 치안대와 함께 욘마곤의 각 지역 핵심 요지에 파견되었다.

    보수 팀장 리디안이 빠르게 위용 넘치는 전초기지를 세워 올렸고 욘마곤의 소수 병력들이 전초기지에 포함되어 제논은 욘마곤 전 지역을 방어할 수 있는 첫 번째 저지선을 완벽히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

    각각의 전초기지마다 연결되는 차원 문들이 개설되고 이 차원 문으로 줄기차게 여러 병력들이 이동했다.

    해안가에 위치한, 이제는 거의 하나의 도시급 규모로 화장되어 버린 제논의 본진과도 계속해서 여러 전략적 상의를 이어 가고 있었다.

    이제는 어엿한 지휘관이 왈로의 사무실에서 김창수는 왈로의 좁아진 것 같은 어깨를 툭 치면서 말했다.

    “고생이 많군.”

    왈로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자신의 타오르는 무기를 바라보았다.

    “마스터께선 언제쯤 돌아오실까요?”

    “…왜 그런가?”

    “이 지루한 싸움의 끝을 보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왈로가 한숨 섞인 말로 대꾸했다.

    “지루한… 싸움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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