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36화 (136/200)
  • ◈136화

    고통으로 나뒹굴고 있으면서도 에드가의 두 눈에는 증오와 분노가 가득했다.

    잘려 나간 부위로 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지만 정혁의 눈에는 그저 디지털 쪼가리로 여겨질 뿐 어떤 불쾌한 마음도 들지 않았다.

    이제까지 수도 없이 봐 왔던 전쟁과 전투 속의 시체와 잔인한 장면들 모두 어차피 프로그래밍된 결과일 뿐이라는 것을, 자신도 결국 그 프로그램의 한 조각이었다는 것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보니 정말 별것 아니라고 느껴진다.

    “젠트라는 너를 왜 이 땅에 두고 떠났을까?”

    정혁을 노려보면서도 뒷걸음질로 도망치던 에드가는 결국 공간의 어떤 벽에 부딪쳤다.

    그런 그에게 계속해서 다가가며 정혁이 중얼거렸다.

    “생각해 봤어. 물론 너에겐 고통이었겠지. 그의 감정 쓰레기통이었을 테니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말이야.”

    에드가는 가만히 정혁을 쳐다보았다.

    입술을 깊게 깨물어서인지 입가에 피가 계속해서 배어났다.

    “젠트라는 자신의 마음 안에 담긴 이 증오의 덩어리가 세계에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몰라. 그는, 객관적인 선이고자 했으니까. 그러나… 세상에 영원한 선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거든."

    정혁은 그의 앞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너를 둔 거야. 자신의 마음에 일어나는 분노와 역한 감정들을 계속해서 불어넣으며 너를 둔 거야. 언젠가 필요한 순간에 네가 뒤틀린 세계의 굴레에 어긋난 조각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걸… 네가 어떻게 정의하지?”

    “정지된 시간 속에서 그를 에고 장비로 받아들이며 젠트라는 너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어. 네게… 진심을 다해 미안해하고 있다는 것도.”

    “하! 이제 와서?”

    에드가가 핏물이 가득 담긴 가래침을 바닥에 뱉었다.

    백색의 머리카락은 어느새 양팔에서 터져 나온 핏덩이로 얼룩졌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지만 광기 어린 표정만큼은 그대로였다.

    “내 존재 자체가 부정이다! 내 존재 자체는 불필요했고 목적이 없었으며 그저 거대한 위용에 가린 그늘이었을 뿐! 그 사실을 억겁의 시간동안 곱씹고 곱씹던 나였다! 전장을 떠돌며 피를 마시고 시체의 썩은 내를 안주 삼아 독한 술을 마시던 나날이었다! 나의 모든 시간이 위선 덩어리의 사과 한 번으로 해소될 것 같은가!”

    “…안 되겠지. 너는 그것이 삶이었으니까.”

    에드가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는 정혁을 보며 인상을 잔뜩 구겼다.

    조롱이라도 하는 것인가. 갑작스레 젠트라와 만난 뒤로 분위기도 그의 힘도 많이 바뀌었다.

    이제는 더 이상 에드가도, 아니 이 세계의 누구도 그를 막을 순 없을 것 같다.

    더 냉정해지고 차분해졌다.

    감정의 동요도 느껴지지 않고 또 그 감정이 드러나지도 않는다.

    ‘한’과 필적하는 힘을 가졌다.

    거기에 ‘한’과 동일한 분위기와 언행을 갖추었다.

    이제 그는 정혁이자 완벽히 ‘한’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에드가는 그를 이길 수 없는 것이다.

    그의… 마지막, 삶의 목적이 결국 여기서 끝이 나는 것이다.

    에드가는 고개를 떨구었다.

    분했다.

    세상에 창조되고 나서 젠트라의 힘의 일부를 부여받았지만 젠트라의 통제 아래 제대로 그 힘을 사용하지도 못했다.

    불쾌한 기운들은 계속 내면을 가득 채웠고 그때마다 에드가는 괴로운 밤을 보내야만 했다.

    젠트라는 강하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에드가는 비루하고 비참하며 고통스럽고 외로웠다. 불편한 감정의 소용돌이, 그 중심에 있어야만 했다.

    그런 그와 극한의 전투를 벌였던 ‘한’.

    당시에는 엄청나게 강한 수준까진 아니었지만 그와 결판을 내지 못한 전투 이후 시간이 지나 그는 세계의 정점에 섰다.

    목표.

    그것이 생겼다.

    기회가 되어 그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를 꺾어 보고 싶었다.

    에드가는 ‘한’이 젠트라만큼 강할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를 이긴다면 마치 젠트라는 이기는 것과 같은 느낌일거라 믿었다.

    외로운 밤, 고통 속에 흐느낄 때도 이빨을 깨물며 검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생에 존재 목표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것도 끝났다.

    결론이 났다. 그는 절대로 ‘한’도, 젠트라도 이길 수 없는, 비빌 수도 없었던 나약하고 불결한 떨거지였을 뿐.

    “이제 끝내라.”

    에드가가 작게 말했다.

    “제발… 이젠, 네가 젠트라이니 가능하겠지. 끝내라.”

    정혁은 가만히 그를 보았다.

    어쩌면

    그날, 일개 프로그램이었던,

    어쩌면

    황폐화된 난민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할 슬픈 생을 살아가야 했던,

    자신을 데려온 조 패더럴의 마음이 이랬을까.

    안타깝고, 슬프다.

    “에트론.”

    저 멀리서 싸움을 지켜보던 에트론이 날아왔다.

    “천계의 치유 마법은 세계 제일이지?”

    “…그, 그렇긴 하지만 아시다시피, 저는 마법을 잘 사용하는 편은 아니어서….”

    정혁이 피식 웃더니 에드가의 잘린 부위를 주워 왔다.

    그리곤 그를 눕힌 뒤에 잘린 부분들을 위치시키고 에트론에게 치유하라는 듯이 고개를 까딱했다.

    “아니, 정혁 님. 잘린 부위를 붙이는 것은 최상급 치유 마법에 해당합니다. 저는 그런 능력이.”

    에트론이 자신의 의견을 적극 개진해 봤지만 정혁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에트론은 한숨을 깊게 쉬더니 이내 양손을 들어 잘린 부위 위에 올리고 마법을 시전했다.

    그와 동시에 정혁의 마나가 에트론에게 주입되었다. 에트론의 눈동자가 황금빛으로 반짝인다.

    그리고 에드가의 절단면은 순식간에 붙어 회복되었다.

    에트론은 치유 마법이 끝나자마자 숨을 헐떡이면서 정혁을 쳐다보았다. 정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에드가.”

    “……?”

    잠깐 사이에 에드가의 두 눈에 담긴 광기가 가셨다는 것을 정혁은 깨달았다.

    아니, 그의 두 눈은 이제 총기를 잃었다. 의욕 자체가 없어진 모습 같았다.

    정혁은 다시 벽을 기대고 앉은 에드가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그의 마나가 에드가를 향해 흘러가기 시작했다.

    에드가는 눈을 감고 정혁의 마나를 흡수했다.

    흡수한 마나가 에드가의 전신을 타고 흐르더니 폭발할 듯 꿈틀거렸다.

    그러곤 그는 다시 황금빛 드래곤의 모습으로 변화했다.

    거대한 드래곤이 엄청난 포효를 뱉는다. 그는 그르렁거리면서 정혁을 쳐다보았다.

    “이제 젠트라의 그늘에서 벗어나, 너 스스로 황금빛 드래곤의 다음 세대를 이어 가. 어찌되었건 너는 드래곤이잖아. 드래곤 에드가로 말이야.”

    “…그런다고 내가 네게 협조할 것 같나?”

    퉁명스러운 에드가의 말에 정혁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안 그럼 어쩔 건데?”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협박이라고 라테와 엘라는 동시에 생각했다.

    “첫 만남도, 지금도 썩 네가 마음에 들진 않지만. 드래곤 한 마리는 필요해서 말이야.”

    “웃기지도 않는군.”

    정혁은 에드가가 투덜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에드가라는 드래곤의 앞으로의 여정엔 내가 함께할 생각인데 어때, 괜찮지 않아?”

    에드가는 가만히 정혁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의 곁에 있는 불의 정령왕 라테와 은행나무 엔트 엘라, 천계의 천사 에트론을 번갈아 보았다.

    ‘함께’라는 단어가 낯설다. 그러나 그 단어의 진정한 의미는 알 것 같았다.

    정혁이 이제까지 걸어왔던 길. 그 길엔 항상 진정으로 ‘함께’했던 많은 이들이 있었다.

    어쩌면 그가 이미 ‘한’과 비슷한 힘, 그리고 능력을 갖췄음에도, 또 그렇게 완벽히 ‘한’으로 보일지라도 그가 결코 ‘한’과 닮을 수 없는 부분이 있다면 그의 곁에 있는 ‘함께’하는 자들이리라.

    “꽤 괜찮을걸?”

    정혁이 에드가의 고결한 비늘을 쓰다듬으며 그의 날개 쪽을 향해 걸어갔다.

    “나 이제, 존나 세.”

    엘라는 여전히 그가 천박함 그 자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에트론이 가만히 다가와 ‘존나’라는 단어의 의미가 무슨 뜻이냐고 물어봤고 엘라는 스스로를 멍청한 사람이라고 돌려 말하는 표현이라고 풀어주며 피식댔다.

    에트로는 고개를 갸웃 할 뿐이었다.

    “이렇게 강한 내가 하늘에서 폼 좀 내려면 황금빛 드래곤 정도는 타 줘야 하지 않을까?”

    정혁의 당당하고 어쩌면 도발적인 발언에 발끈 할 법도 하지만 에드가는 크게 대응하지 않았다.

    대신 빳빳이 서있던 몸을 조금 숙여 그가 날개 뼈를 타고 등 위로 오를 수 있게 했다.

    정혁은 빙긋 웃으며 그의 날개 뼈에 올랐다.

    “긴장해라. 언제든 네놈의 목은 내가 취할 수 있으니.”

    “얼씨구.”

    정혁이 그의 효과 없는 협박에 아무렇지도 않게 대응하곤 목덜미 위로 올라앉았다.

    “조에게 안장을 만들어 달라고 해야겠어.”

    “얼씨구.”

    이제는 에드가가 그의 말을 받아쳤다. 에드가는 정혁을 태우고 허공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그러자 이공간이 사라지며 다시 마나석 동굴의 거대한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라테, 박살내 버려.”

    정혁의 말에 라테는 양손에 검붉은 화염 덩어리를 응축시켰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그 힘에 정혁의 마나까지 부여되었고 덩어리는 더욱 커졌다.

    라테는 거침없이 동굴 천장을 향해 화염구를 던져 올렸고 화염구는 동굴 천장을 관통하고 박살 내며 그대로 지면을 뚫고 하늘까지 솟아올랐다.

    라테도 자신의 힘에 놀란 눈치였다.

    동굴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에고 장비들은 모두 각자의 형태로 정혁에게 안착했고 황금빛 드래곤이 포효하며 열린 공간을 통해 비상하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한 번도 허락되지 않았던 드래곤 형태로의 비행. 그 첫 번째 날갯짓이 이제 시작된 것이다.

    에드가는 짜릿한 기분과 처음 느껴보는 묘한 안정감에 동화되어 벅찬 마음으로 오아시스의 하늘에 자신의 마나를 흩뿌렸다.

    안젤리나는 땅이 요동치는 느낌에 놀라 몸을 바짝 바닥에 붙였다가 엄청난 포효와 함께 솟구쳐 오르는 황금빛 드래곤을 목격하곤 숨이 턱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겨우 몸을 일으켜 다리를 떨며 어디론가로 걸음을 재촉했다.

    ***

    “때가, 됐네.”

    답답한 마음에 산책을 다녀온 안나를 기다렸다는 듯 문을 열고 들어가자 로만이 기다렸다는 듯 한마디 던졌다.

    그의 표정은 진지했고 또 무거웠다. 안나는 그의 말이 이해되지 않아 되물었다.

    “무슨 때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정혁, 그 친구가 네 번째 에고 장비를 얻었을 것이네.

    세계의 파동, 불쾌한 진동이 더해져 전해지기 시작했어.”

    안나는 그가 정말로 그런 느낌을 받고 저런 말을 하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동시에 정혁이 과연 어떤 장비를 얻었는지 궁금했다.

    때가 됐다면 이제 곧 리안도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마지막 결전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아직 타이런 대륙을 정벌하려면 두 거대한 국가를 상대해야 하지만 그들이 최종 목적은 아니기에 어떻게든 빠르게 정리하는 방법을 택해야 한다.

    그때였다.

    바깥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무슨 일이라도 벌어진 건지, 갑옷들이 부딪치는 소리와 여러 소음들이 번져 왔다.

    안나는 불길한 느낌이 들어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제논의 본성 거대한 첨탑 상부에 첨탑의 크기만 한 황금빛 드래곤이 앉아 있다.

    안나는 한동안 사고가 정지된 것마냥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남자가 아래를 향해 뛰어내렸다.

    일반적인 플레이어라면 낙사 데미지를 받거나 죽을 수도 있을 만한 높이였다.

    하지만 그 플레이어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면에 착지했다.

    그리곤 안나를 향해 한 손을 들어 올려 흔들며 인사했다.

    정혁이었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의 정혁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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