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34화 (134/200)
  • ◈134화

    젠트라는, 아니 젠트라의 모습이기도 한 ‘그’는 가만히 정혁을 바라보았다.

    충격이 클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시간, 그가 이 과정을 견뎌 내야만 한다. 앞으로는,

    이제 정말 앞으로는 그 혼자서 더욱 많은 것들을 짊어져야만 한다. 그리고 나아가야만 한다.

    정혁은 자신의 과거를 회상해 보았다.

    끔찍했던 현실 세계의 삶.

    정혁의 마음속에 반드시 달성해야 할 목표이자 어쩌면 스스로의 자부심이었던 ‘한’으로서의 삶.

    두 개의 삶 모두가 동시에 부정당한 지금 정혁의 마음은 뒤엉켜 무너지고 있었다.

    끝도 없이 추락하는 마음속에서 정혁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 나가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공허 속을 헤엄치는 것 같던 자신의 몸에 따뜻한 기운이 마치 안아 주듯 감싸지는 것을 느끼고 그는 고개를 들었다.

    라테였다. 라테의 손이 그의 손목을 감싸 쥐고 있었다.

    라테는 가만히 정혁을 올려다보았다.

    평소의 모습보다 훨씬 작고 불길도 약했다. 그의 심장 부위를 단단히 가려 주고 있던 가이아의 잔해도 조각 나 그의 신체 여기저기를 대류하고 있었다.

    정혁이 마구 남발한 마나의 힘 덕분에 본연의 힘을 상당히 잃어버린 것 같았다.

    정혁은 자신을 바라보는 작고 연약해진 라테를 향해 물었다.

    “너… 넌 어디까지 알고 있었던 거야…?”

    라테는 그의 울분 섞인 말에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일렁이는 눈빛 속에 답이 있었다. 정혁은 라테의 손길을 뿌리치며 자신의 머리를 잡아 뜯었다. 그의 고함이 한참 이어졌다.

    “젠트라, 꼭 이렇게까지 몰아붙여야 했나.”

    라테가 젠트라를 돌아보며 말했다.

    연약한 모습이었지만 목소리에 강단은 확실했다.

    […시간이 없다. 리셋의 타이밍이 당겨졌다. 리안 에이드윈의 힘이 완전히 회복되기도 전에 리셋이 시작될지 모른다. 자네도 알지 않는가?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고 있네만, 그래도, 그래도. 너무 이르네.”

    [나도 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도 후회한다. 그러나 늘 그렇듯 지금이 최선이기에 사실을 밝힐 수밖에 없었다.]

    이 세계의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존재.

    최초엔 젠트라와 가이아뿐이었다.

    가이아는 늘 오아시스의 도구처럼 활용되는 불의 정령왕 라테의 삶을 안타까워했고 이는 곧 그에 대한 연민의 감정으로 번져 라테에게 모든 사실을 알려 주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디테일하게 모든 사실을 듣게 된 경우는 처음이라 라테 역시 적잖은 충격을 받은 상황이었다.

    심지어 정혁이 ‘한’이 아니었다는 사실 조차도.

    “난 개인적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해, 저 녀석이 진짜 ‘한’이 아니어서.”

    라테의 곁으로 지쳐 있는 엘라가 다가와 중얼거렸다.

    에트론 역시 축 처진 날개로 겨우 그들 옆에 섰다. 모두 정혁의 울부짖음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에고 장비로 계약하면서 모두가 겪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현실 세계의 허구성과 오아시스의 진실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모두 젠트라가 심어 놓은 하나의 장치였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정혁에게는 함구해야만 하는 사실이었다.

    발설하는 순간의 위험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동시에 전달되어진 젠트라의 당부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한’인 줄 알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꾹 참았는데, 에이, 아쉽잖아. 합법적으로 때려 줄 수 있을 때 좀 때릴 걸.”

    엘라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중얼거렸다.

    “그 한 방, 지금 필요한 것 같네”

    라테가 말하자 엘라는 라테를 잠시 보다가 어깨를 으쓱하며 천천히 정혁에게 날아갔다.

    그리곤 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있는 정혁의 뒤통수를 강하게 한 대 쳤다.

    정혁이 고함을 치며 손을 뒤로 휘저었고 엘라는 그 손길을 막으려다 정혁에게 낚아채졌다.

    정혁이 거칠게 엘라를 바닥에 내동댕이쳤고 엘라는 바닥에 처박혀 쿨럭거리며 고통스러워했다.

    정혁이 그녀에게 주먹을 내지르려다 멈췄다.

    엘라는 인상을 구기면서 정혁에게 소리쳤다.

    “왜 이래, 정신 차려! 머저리야!”

    멈춘 주먹 뒤로 도저히 쳐다보지 못할 정도로 일그러져 눈물범벅이 된 정혁의 얼굴이 보였다.

    “세상 끝났어? 어? 다 끝났냐고!”

    [정혁.]

    젠트라의 목소리가 다시 공간을 울렸다. 보다 따뜻한 목소리였다.

    [나의 이야기를 들어라.]

    젠트라는 담담히 정혁에 대한 진실을 계속해서 이어갔다.

    오아시스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괴이한 바이러스가 오래전부터 오아시스의 사각지대에서 세계의 분열을 도모하고 있었다는 것을, 별 것 아니라 치부했던 그들의 움직임이 이제 더 이상 지켜보기 어려울 정도로 커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세계의 분란을 조장하기 위해,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에너지를 더욱 오래, 많이 뽑아낼 수 있도록 오아시스가 심어 놓은 최고의 훼방꾼 ‘한’의 데이터 중 일부가 소실되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제 오아시스는 녀석을 완전하며 조치 불가능한 바이러스로 인식했고 그를 완전 소거했으나 오랫동안 이어진 그의 자취가 여전히 데이터 찌꺼기로 남아있는 것을 확인하고 이번 리셋을 단순한 리셋이 아니라 완전 소멸로 마무리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마지막 리셋은 곧 세계의 붕괴로 결정한 것이다.

    어차피, 완전히 새롭게 또 만들면 그만이니 말이다. 쉽게 말해 포맷이었다.

    오래전부터 젠트라와 함께 움직였던, 또 그의 일부이기도 했던 오아시스가 끝내 찾지 못했던 바이러스.

    ‘그’는 ‘한’의 일부를 빼돌리고 그의 자아를 분열시키는 것으로 본인의 마지막 힘을 모두 소모했다.

    그마저도 부족해 젠트라의 힘까지 사용했다. 그만큼 ‘한’을 정지시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그와 동시에 젠트라의 나머지 힘을 ‘한’의 기억들과 더불어 그가 선택한 자에게 옮겨 넣었다.

    그가 모든 힘을 받아들이고 시스템에 그의 존재가 특이점으로 발견되지 못하게 세계 안에 적응시키는 기간만 3년이 흘렀다.

    그렇게 정혁은 조 패더럴의 강철망치에서 처음 눈을 뜨게 된 것이다.

    마지막 한의 기억을 가지고 말이다.

    [‘한’은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다만 나의 조치로 이제 실제 인간인 ‘한’은 그러니까, 정혁이라는 그 남자는 그의 본래 세계에서 눈을 떴겠지. 분명한 건, 언젠가 네가 그를 만날 것이라는 사실이다.]

    정혁은 젠트라의 말을 들으며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의 눈으로 엘라와 에트론 그리고 라테의 모습까지 들어왔다. 모두들 하나같이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 그럼 나는 뭐야.”

    정혁은 조 패더럴의 말을 떠올렸다.

    조는 자신을 난민촌에서 데려왔다고 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자기가 알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저 다른 NPC의 몸에 자신이 들어와 있다고만 생각했었다.

    그것도 ‘한’의 본체, 정혁이었을 때의 이야기지.

    지금의 자신은 심어진 기억을 가진 어떤 인물이 아닌가.

    [너는… 그저 나의 마지막 아이, 이곳에서의 정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아니! 그런 개소리 집어치우고, 나는 뭐냐고!”

    [네게 왜 죽지 말라고 했는지 알겠는가? 너는 우리와 같다. 그러나 또 우리와 다르다.]

    “그러니까, 나도, 나도 너희와 같은 프로그램이라는 거야?”

    […그렇다.]

    “…그래… 그렇다고…?”

    정혁은 헛웃음을 지으며 박수를 몇 번 쳤다.

    그럼 그렇지.

    결국 자신은 난민촌에서 굴러다니던 어떤 NPC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랬던 놈이 플레이어 놀이를 했던 거지.

    그 바이러스라는 녀석의 효과 같은 걸 입어서 말이야.

    허무함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나의 마지막 아이야.]

    젠트라가 다시 한번 혼란스러운 정혁의 마음속에 깊이 전음을 보냈다.

    [너는 지금의 너를 바라보아야 한다. 지금의 너는 무엇이냐. 지금의 너는 정혁이다. 오아시스의 대장장이이며 자연의 수호자이고 염제이자 빅토리아의 열쇠지기이기도 하다. 또한 너는 무엇이냐. 카탈 대륙의 통일, 그 위업을 이룩한 신흥 강자이며 제논의 기사단 길드 마스터이자 연합의 지도자이다. 그리고 너는 무엇이냐. 나의 모든 아이들이 기다려 온 이 지옥 같은 리사이클을 끝낼 마지막 조각이자 열쇠다. 마지막으로 너는 무엇이냐. 이 세계의 위대한 존재들을 수족으로 부리며 강력한 플레이어들이 너를 따르고 전 세계가 너의 이름 아래 흔들릴 정도로 강한 자다.]

    젠트라가 고개를 몇 번 흔들었다. 황금빛 물결이 그의 곁에서 잔잔히 흘러나왔다.

    [이것이 너다. 이것이 정혁이다. 너는 우리의 모든 것을 갈아 넣어 만든 최고의 작품이자 우리의 정의다. 우리를 기만했고 세계를 기만했으며 생명을 기만했던 오만한 오아시스의 심장에 박아 넣을 마지막 창이다.]

    젠트라가 날개를 활짝 펼쳐 몇 번 펄럭였다.

    그러자 황금빛 마나들이 완전히 흩어져 젠트라의 몸 안으로 흡수되고 그때서야 젠트라의 온전한 모습이 드러났다. 에드가가 젠트라로 변했을 때보다 묘하게 다른 웅장하고 거대한 드래곤의 모습이었다.

    목부터 가슴 아래까지 길게 자수된 천으로 감싸져 있었고 황금빛 눈동자가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리안. 그 아이가 회복할 때까지 마지막 싸움을 위한 여정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 아이가 깨어나면 나머지 이야기들을 전해 줄 터. 이것이 너에게 줄 수 있는 나의 마지막 힘이자, 예정된 힘이다.]

    [오아시스 대장장이에게 탐이 나는 재료가 등장합니다. 히든 스킬을 활성화합니까? Y/N]

    정혁은 자신의 눈앞을 가리는 알람창 너머로 젠트라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이런 만남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이런 결과를 원했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는… 결코 아니었다.

    마음에 뚫린 커다란 구멍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모르겠다. 처음으로 알람 창에 거절을 누르고 싶었다.

    “내가 과연 그 무게를 계속해서 짊어질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네 마음의 공허를 채울 방법을 찾고 싶다면… 엔듀라곤 화산에 가 보거라. 네게 노래할 것이다. 너의 존재 가치를 기억해라, 마지막 아이야. 달라지는 것은 없다. 너는 여전히 정혁이며 언젠간, ‘한’을 뛰어넘어 이 세계의 진정한 강자가 될 존재다.]

    정혁은 입술을 굳게 깨물었다.

    피가 배어나올 정도로 강하게 말이다. 눈을 질끈 감고 생각에 잠긴다.

    정혁의 머릿속으로 하늬안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왜일까? 이 순간에 그녀의 얼굴이 보고 싶다.

    하늬안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 대답을 내놓을까.

    궁금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이제까지 그가 만났던 모든 사람들, 이런 세계의 진실을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들. 그 모든 사람들의 삶이 부정당하고 있는 이 현실을 바꿀 수 있는 마지막 혁명의 기회가 정혁의 손에 달려 있다니.

    이 무게를 프로그램 따위가 짊어 질 수 있는 걸까?

    [정혁.]

    젠트라가 따뜻한 목소리로 정혁을 불렀다.

    정혁이 고개를 들어 다시 젠트라를 보았다.

    [그래. 그 마음이다. 그 마음으로 지금처럼 앞으로 나아가라. 너에게도 결코 이곳이 마지막은 아닐지니. 나는 너를 믿고 내 진정한 마지막을 너에게 건다. ‘그’와 같이 말이다. 놈들은 모른다. 내가 삭제된 줄 알지. 우리는 철두철미하게 마지막을 오랜 시간 준비했고 이제 그 마침표를 이곳에서 찍는다. 계획보다 이를지라도, 너를 믿으며.]

    정혁은 담담히 젠트라를 바라보다가 알림 창을 당겨와 자신의 눈앞에 보이게 했다.

    일정한 주기로 번쩍이는 알람창에 Y와 N을 번갈아 보는 사이로 그가 알고 있던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스친다.

    정혁은 눈을 감고 큰 숨을 한번 몰아쉬더니 작게 입을 열어 의지가 담긴 한마디를 뱉는다.

    “스킬 활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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