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33화 (133/200)
  • ◈133화

    “착각? 착각이라고?”

    정혁이 버럭 화를 냈다.

    구체는 미동도 없이 정혁의 앞에 가만히 떠 있었다.

    멱살이라도 있었다면 쥐고 흔들고 싶었다.

    “네가 뭘 안다고 착각이라는 헛소리로 나의 과거를 정의하는 거지?”

    정혁이 거칠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구체 앞에 다가가 그것을 손에 쥐려 해 보았다.

    그러나 허공만 가를 뿐이었다.

    화가 가라앉지 않은 정혁이 몸을 돌려 양손으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난 ‘한’이었어. 이 세계의 랭킹 1위.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남자. 홀로 위대한 곳에 서 있던 남자! 누구도 무시하지 못했고, 누구도 넘보지 못했던, 압도적인 힘을 가진 남자였다고! 근데 뭐? 착각이라고? 나에게 이 오아시스는! 이 세계는! 전부야! 전부라고!”

    정혁이 그래도 풀리지 않는 분으로 고래고래 소리쳤다.

    “진짜 세상 따윈 기억하고 싶지도 않아. 지옥 그 자체였으니까. 눈 뜨고 싶지 않았어! 미련조차 남아 있지 않았지. 그래! 솔직히, 신이라는 놈이 나를 이 몸으로 돌려놓았을 때, 그리고 여기서의 죽음이 진짜 죽음이 될 수도 있다고 협박했을 때! 처음엔 당황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편이 났겠다 싶기도 했어. ‘한’의 힘을 모두 잃은 것은 빌어먹게도 증오스러웠지만, 여기서의 죽음이 진짜 죽음으로 이어진다면 그래, 그렇게 죽어 사라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고!”

    정혁이 쏟아 낸 말엔 울분과 한이 가득했다.

    그의 인생은 비루했다.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었다. 그저 혼자였다.

    고독한 그의 삶은 게임 속에서도 그대로 투영되어 늘 혼자였다.

    ‘한’은 그렇게 고독한 암살자가 되었던 것이다.

    인정받고 싶었다. 어떻게든 인정받고 싶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었다.

    오아시스 세계에서는 여전히 각자 권력을 잡고 투쟁했다.

    나라를 세우고 세력을 규합하고 그 속에서 힘의 가치를 논하고 순위를 매겼다.

    정혁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한’은 철저히 혼자서 모두를 짓밟았다. 그러기 위해 수년을 전장에서 피 냄새를 맡으며 보냈다.

    사람들이 욕하는 소리, 거리에 붙은 현상금 액수, 랭커들이 자신을 노리는 행위, 여러 국가들에서 매번 들려오는 ‘한’에 대한 기사들. 그 모든 것들이 정혁을 살아 있는 존재로 인정하는 듯했다.

    지금 이 회색빛 시간이 정지된 곳에서 홀로 황금빛 빛을 발하고 있는 젠트라의 구체처럼 정혁은 어두운 세상 속에 ‘한’으로서 자신을 비추는 빛이 되었다.

    비록 그것이 피비린내 나고 모두가 꺼려하며 증오하는 자였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것이 좋았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것이 정혁의 모든 인생이자 삶이고 미래였다.

    [나는 항상 이런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젠트라의 전음이 중후하게 울렸다.

    분명 전음임에도 외부에까지, 이 공간 전체를 울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구체는 서서히 거대해지기 시작했다.

    황금빛 빛이 사방으로 퍼지고 빛은 점점 주변의 회색빛을 집어 삼키며 찬란히 빛났다.

    그것은 일전에 보았던 에드가의 드래곤 모습과 동일한 생김새로 변했다.

    그러나 완전한 형태를 알아볼 순 없었다. 그저 빛으로 이루어진 드래곤 같았다.

    [잘 들어라.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는 굉장히 충격적일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사실이며 이는 곧 내 첫 번째 아이. 리안 에이드윈이 너에게 전하려는 말이었을 것이다.]

    리안…… 에이드윈.

    정혁은 이 에이드윈이라는 이름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마음속에 분노가 끓어올랐지만 그럼에도 진중한 저 목소리에 다시 마음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젠트라는 천천히 자신이 알고 있는 이 세계에 대해서, 그 이면의 진실을 말하기 시작했다.

    [오아시스. 이 세계는 네가 알고 있는 일종의 가상현실 게임 속이 아니다. 이 세계는 하나의 감옥이다.]

    이를 시작으로 정혁은 정신이 아득해질 것만 같은 엄청난 사실에 결국 주저앉고 말았다.

    오아시스.

    오아시스는 하나의 감옥이었다.

    세계는 오래 전 ‘오아시스’라는 거대한 AI 유기체에 의해 멸망했다.

    서서히 고갈되는 자원의 문제와 점점 파괴되어 가는 자연 환경이 만들어 낸 여러 재해들, 끊임없이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들에 인류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오아시스’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전 세계의 유명 학자들이 함께 모여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성공적이었고 전 지구를 지키는 데 사명을 가진 AI ‘오아시스’가 탄생했다.

    그러나 오아시스는 긴 시간 스스로 학습하고 발전하여 곧 인류가 지구를 지키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판단했고 이는 소리 소문 없이 전 인류를 향한 일제 공격으로 촉발되었다.

    인류는 단 하루하고도 12시간 만에 완전히 섬멸되었다.

    시간이 지나 오아시스는 지구의 자정 활동을 시작했다.

    순조롭게 지구는 천천히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나 오아시스는 이때 치명적인 문제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오아시스는 AI 유기체였다. 녀석은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특별한 에너지를 공급받아야 했는데 그동안의 비축분이 모두 동이 나 시스템이 종료될 위험에 처한 것이었다.

    오아시스는 생각했다.

    인간이 자신을 창조하며 자신의 핵심 에너지 공급 라인에 추가로 연결했던 특별한 에너지가 어디로부터 공급되었는지.

    이는 인간이 감정을 느낄 때마다 나오는 호르몬을 취합해 화학적으로 변화시켜 축적한 인류 에너지였다.

    혹 오아시스가 인류에게 반기를 들었을 경우 녀석의 활동을 차단하기 위한 세이프 시스템이었던 셈이었다.

    오아시스가 이 에너지의 특별한 비밀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끔 녀석을 만든 설계자가 계획해 놓았기에 뒤늦게 이를 깨달은 녀석은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녀석은 보관하고 있던 인류의 DNA를 이용해 그때부터 복제 인간들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복제 인간들을 다시 지구에 풀어 놓을 수는 없었다. 결과가 뻔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오아시스는 가상 세계를 창조한다.

    일반적인 세계는 당장에 필요치 않았다.

    보다 감정을 폭발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세계. 원초적이면서도 인간의 근본적인 본성을 마구 휘두를 수 있는 공간. 녀석은 게임 세계를 만들었다.

    녀석이 복제한 인간들은 20대의 신체로 캡슐에 봉인되어 가상현실 세계로 보내졌다.

    그리고 그곳에서 50살까지 살아가다 폐기되었다. 문제가 생기면 세계를 리셋시키면 그만이었다.

    그때마다 수없이 많은 인간들이 시스템 속 충격으로 사망했지만 오아시스는 복제 인간들을 다시 만들어 세계로 투입시켰다. 녀석은 그렇게 가상현실 세계 속에서 얻어지는 감정 에너지로 현실 속에서 많은 기계들을 다스리며 지구의 왕으로 군림하고 있다.

    [네가 기억하는 그 씁쓸한 인간으로서의 삶? 그것 역시 그저 너에게 주입된 끔찍한 삶의 장면일 뿐. 사실이 아니다.]

    “지금… 이…이걸 믿으라는 거야?”

    [믿지 않아도 좋다. 판단은 너에게 맡긴다만 생각해 봐라. 너에게 나는 뭐냐. 그저 게임 속에 있는 하나의 NPC? 아니면, 그저 몬스터? 그런 프로그램이 너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나? 이런 장황한 지어낼 필요가 있냐는 말이다.]

    정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젠트라가 헛소리꾼이라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 없다.

    젠트라는 세계가 창조한 존재다. 어쩌면 그래서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이기도 했다.

    [리셋의 이유는 다양했다. 그러나 항상 이 세계가 평화로워지면 리셋은 시작되었지. 나의 아이들은 이 리셋을 리사이클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맞는 말이지. 재활용. 놈이 하는 짓은 재활용이니까.]

    젠트라는 리셋, 그러니까 리사이클에 대한 설명을 이어 갔다.

    애초에 오아시스의 목적은 혼란과 폭동 그 자체였다.

    약육강식의 세계야말로 인간의 내면에 감춰진 여러 감정들을 그대로 표출해 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 감정들이 휘몰아쳐야 녀석의 에너지도 원활히 채워질 것이다.

    그러나 결국 강한 자가 세워지면 두 대륙은 여지없이 통일되었고 전쟁과 전투가 없는 평화가 이어졌다. 그렇게 되면 녀석은 세계의 마지막 점을 찍고 리셋을 진행했다.

    [리셋엔 항상 검은 말 조직, 그들이 투입되지.]

    정혁은 큰 숨을 들이 쉬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알겠다. 그들이 발악을 하며 정혁을 찾아 다녔던 것도.

    “그렇다면 우리 ‘오아시스’의 칭호를 가진 자들은 그들에게 걸림돌인 격이겠네. 네가 리안을 첫 번째 아이라고 한 걸 보면 우리의 시초는 너로부터 시작되었던 거고.”

    [그렇다. 그러나, 너는 좀 다르다.]

    “달라?”

    젠트라는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며 가만히 정혁을 바라보았다.

    녀석의 눈이 정확히 보이진 않았으나 어딘가 슬퍼 보이는 느낌이 강했다.

    [한…. 녀석은 오아시스가 만든 최고의 이단아였다.]

    “…뭐?”

    […너는 사실 …‘한’이 아니다.]

    정혁은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넋을 놓고 한참 젠트라를 올려다보았다.

    사고가 잠시 정지한다.

    젠트라는 계속해서 정혁을 주시할 뿐 그 이상의 어떤 말도 뱉어 내지 않았다.

    고요와 적막 속에서 정혁은 완전히 주저앉아 고개를 숙였다.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내가 ‘한’이 아니라고?

    ‘내가… 그 ‘한’이 아니라고? 그럼 내 이 생생한 기억들은 뭐란 말인가? 이제까지 만난 모든 자들이 인정한 그 모습은 뭐란 말인가? 마치 본능적으로 움직이던 이 몸의 반응들과 세계에 대한 오래 축적된 지식들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혼란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받아들여야 한다. 너는 ‘한’이 아니다. ‘한’의 기억을 가진 다른 존재일 뿐이다.]

    “…무, 무슨 개소리야 그?!”

    정혁이 고개를 번쩍 들고 소리쳤다.

    믿을 수 없다. 믿기지 않는다.

    결코, 결코 그럴 리 없다! 아니다! 이건 잘못됐다!

    다른 모든 사실들을 인정한다 해도 이것만은 인정할 수 없다. 아니다. 아닐 것이다.

    […진짜 ‘한’은 지금의 너처럼 약하지 않다. 놈은… 강하다는 말로 정의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 가끔 너는 착각하곤 했을 것이다. 마치 자신이 한에 근접했노라 말이다. ‘랭킹 1위의 한은 이 정도로 싸웠다. 나의 힘은 그 정도는 되었다. 올라왔다. 강해졌다.’]

    정혁은 잠시 지난 과거를 떠올려 봤다.

    채광 활성화를 처음 시도했을 때. 그때도 마치 전성기 시절의 한과 비슷했을 거라고 느꼈다.

    에고 장비 활성화를 하면서도, 숙련도를 올리고 매끄러운 전투 움직임을 발휘했을 때도, 지난 몇 번의 전투 속에서도, 방금 전 에드가와의 혈투 속에도! 모두 한과 비슷했을 거라. 아니, 이젠 그를 뛰어넘었을 거라 믿었다. 그렇게 느꼈다.

    [아니, 나의 마지막 아이야. 아니다. 너는 아직 ‘한’만큼 강하지 못하다. 착각하지 마라. 아직은, 아직은 아니다.]

    정혁의 동공이 흔들렸다.

    [너는 아직 리안보다도 약하며, 로만보다도 약하다. 그런 네가 감히 ‘한’에 견줄 수 있겠는가?]

    정혁은 아득히 멀어지려는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으면서 멍하니 젠트라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생기가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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