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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간의 랭킹 1위-132화 (132/200)
  • ◈132화

    치열한 격돌이 1시간가량 이어졌다.

    그 시간은 정혁에게 어떤 변화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에드가에게 상대적으로 밀릴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정혁은 상당히 선전하고 있었다.

    그저 황금빛 용으로 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에드가를 만난 것과 다름없는 느낌이었다.

    왜일까? 지금 정혁의 몸에 흐르는 마나는 훨씬 더 정교해졌다.

    외부와 완전히 융화되어서 자신의 모든 에고 장비에 마나를 온전히 흘려보낼 수 있었다.

    에트론과 라테, 그리고 엘라와는 여전히 어떤 반응도 주고받을 수 없게 되었지만 도리어 외로운 곳에 홀로 떨어진 듯한 이 느낌이 정혁의 전투감각을 한층 높이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광기 어린 공격들이 계속되었지만 버틸 만했다.

    그러나 정혁은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어떤 요동치는 감정에 스스로를 점점 맡기게 되고 있었다.

    이는 꽤 오랫동안 숨겨 왔던, 아니 숨겨져 있었던 것이었다.

    ‘한’

    서로의 사지와 심장을 노리고 싸우고 있는 이 시점.

    그의 두 망치가 엄청난 마나의 파동을 지니고 전기와 불꽃이 되어 사방을 파괴시키며 대상의 목덜미 정중앙을 노린다.

    움직임은 번개와 같고 공격은 한 번, 한 번이 모두 치명적이다.

    그러나 둘 다 결코 단 한 번의 기회를 주지 않고 있다. 모든 에고 장비가 활성화 되어 있는 시점에서, 마나에 의해 모든 공격들이 상당히 정교해지고 강해진 이 시점에서 정혁의 공격을 전부 받아치고 또 허점을 찾아 검기와 날카로운 검날을 내리꽂는 에드가의 실력도 대단하다고 하겠다.

    이 미친 전투가 이어질수록 정혁의 입가에 미소가 올라왔다.

    마치, 에드가처럼 말이다.

    “너, 너 즐겁지, 그치?”

    에드가가 환히 웃으며 정혁의 등 뒤로 이동한다.

    정혁이 몸을 돌려 망치를 휘두르자 날아드는 검이 부딪쳐 떨어진다.

    그 힘이 워낙 강해 정혁이 망치를 놓쳤고 그 틈으로 에드가의 오른발이 치고 들어온다.

    정혁은 그 오른발을 빈손으로 잡아챘지만 정혁의 뜻대로 힘이 전해지지 못해 오히려 정혁이 뒤로 밀려났다.

    두 번째 검기가 틈을 주지 않고 밀려 들어왔고 정혁은 남은 망치로 검기를 튕겨 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은행잎 창을 다시 날려 보냈다.

    거친 숨이 폐를 뚫고 튀어나올 것 같다.

    그러나 짜릿하다. 놓친 망치가 손으로 되돌아온다.

    이 느낌, 악몽의 비수에 견줄 바는 못 되나 장시간 정혁과 함께 하면서 거의 모든 전투감각을 극대화할 수 있을 만큼의 온전한 무기가 되었다.

    이 두 무기가 자신의 신체 반응과 합을 이루어 펼치는 극한의 움직임은 오늘 이 순간 최고로 만족스러웠다.

    갈증.

    그것이 끓어오른다.

    이제까지 지도자라는 그늘에 가라앉아 있던 내면의 폭력성.

    파괴적인 사상과 잔혹성. ‘한’이라는 자아 안에 묻어 둔 진짜 자신의 모습.

    그 모든 것들이 요동치는 것 같다.

    에드가, 저 녀석은 지금 정혁의 본심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극도의 쾌락을 느끼고 있는 것 같은 에드가의 모습이 자칫 정혁은 스스로의 모습이 될까 봐 갑자기 두려웠다.

    그러나 그 순간.

    “안 돼요, 안 됩니다. 여기서 정신 차리면 내가 재미없죠?”

    에드가의 공격이 다시 휘몰아쳤다.

    녀석의 땀과 정혁의 땀이 공중에서 맞부딪치는 순간조차 눈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열기과 광기가 어우러져 하모니를 이룬다.

    에드가는 드래곤의 모습으로 변화했다가 다시 인간으로 변화하면서 더욱 변칙적이고 광범위한 공격을 퍼부어 댔다.

    이 정도 규모의 싸움이 이어진다면 지쳐야 정상인데 에드가도, 정혁도 오히려 텐션이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멈출 수 없었다. 이대론, 서로 끝을 봐야만 했다.

    [……그……정……정신……!]

    뭔가, 어떤 목소리가 마음속에서 울리는 것 같다.

    전음일까? 모르겠다. 정혁은 그저 마음껏 이 흐름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이제까지 있었던 모든 전투들 중에서 가장 최고의 순간이다.

    비루한 몸뚱이로는 느낄 수 없었던 최고의 감정이다.

    이 순간에 흐르는 대지의 떨림, 공기의 흐름, 그 속에서 부딪치는 작고 미세한 수분 알갱이들 하나 하나,

    심장에서 미친듯이 공급되는 혈류,

    귀 속에서 요동치는 심장 박동,

    무기가 부딪치면서 맡아지는 미묘한 화약의 냄새와 스파크,

    공중에서 떨어지는 낙뢰 속에 흐르는 번쩍이는 빛의 움직임과 그 곁을 스치며 공기를 뚫고 에드가의 심장을 향해 날아가는 수십 발의 은행잎 창.

    모든 시간이 느려지는 것만 같은 순간.

    전투로 인해 살아 있다는 것이 입증되는 순간.

    이 순간의 쾌락을 ‘한’이었을 때는 늘 느꼈었는데.

    이 맛을 위해 그동안 모든 일들을 해 왔던 건 아닐까? 아니, 이 시간을 위해 지금까지 달려온 건 아닐까. 그래, 그렇지 않을까?

    대의?

    지금 대의가 중요한가?

    게임이 게임다워야 한다는 것.

    얄궂은 의미를 두어서 근본적인 욕구를 가리려는 것은 위선이 아닌가?

    지금 이렇게나 즐거운데?

    이 즐거움을 포기하라고?

    하! 그럴 수 없지!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싸우겠다.

    몇 년이고 이곳에서,

    이 쾌락의 짜릿함을 누리며 저 가증스러운 녀석의 목에서 폭포수와 같은 피의 향연이 터져 오를 때까지 싸우겠다.

    넝마가 되고 근육이 찢어져 비명을 지를 지라도 싸울 거야. 그럴 수 있어.

    […제발!]

    다시 정혁의 마음에서 강한 울림이 들렸다.

    마치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을 것 같은, 이성의 끈이 끊어지는 듯한 느낌이 계속해서 이어질 때, 결국 그 선을 넘거나 혹은 끈을 끊어 버리려던 정혁의 마음이 그 울림을 통해 크게 진동했다.

    그 때문일까.

    정혁의 움직임이 아주 살짝 느려졌다.

    그 찰나에 에드가의 검기가 정혁의 오른쪽 목에 닿았다. 당연히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혁은 움직일 수 없었다. 이유를 고민할 수 없었다.

    그저 검이 당연히 정혁의 목을 가를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

    다시 한번 시간이 멈췄다.

    주변의 모든 것들이 회색빛으로 변하고 정혁은 허공에서 헉헉거리는 호흡을 뱉으며 충혈된 눈과 피가 뚝뚝 흐르는 두 손으로 사방을 경계하며 둘러보았다.

    말을 하고 싶었으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극도의 흥분 상태 때문에 괴성만 내지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피에 굶주린 짐승 같았다.

    마치 그가 이해하지 못했던 에드가의 모습과 같았다.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던 정혁이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앞으로 숙였다가 활처럼 뒤로 꺾었다.

    그러자 가슴 한가운데서 황금빛 구체가 마치 좁은 곳에서 비집고 나오는 것 마냥 비틀면서 튀어나왔다.

    구체가 가슴에서 온전히 빠져나오자 정혁은 큰 숨을 깊게 들이마시면서 몸을 다시 앞으로 구부렸다.

    여전히 호흡은 거칠었지만 뭐랄까 그는 이성을 찾아가는 것 같았다. 충혈된 눈의 색이 돌아오고 시간이 지날수록 호흡이 천천히 되돌아온다.

    정혁은 고개를 저으면서 눈을 깊게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자신의 눈앞에 떠 있는 황금빛 구체를 바라보았다. 정혁의 머리만 한 구체는 가만히 같은 자리에서 정혁을 바라보는 것처럼 떠 있었다. 정혁이 진정되기를 바라는 것만 같았다.

    그때가 되서야 정혁은 상황을 이성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1시간이라는 긴 전투 시간 동안 그가 폭발하듯 뿜어낸 엄청난 농도의 마나는 엘라와 라테 그리고 에트론에게 치명적으로 쏟아부어졌다.

    가이아의 심장 자리에 각인된 에트론의 마법구는 갈라져 그 사이로 천계의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건틀릿은 이미 많은 부분에 손상을 입어 너덜너덜했다.

    망치 자루는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았고 망치의 상태도 반 이상은 파괴되었다.

    저 멀리 서 있는 엘라의 스태프는 겨우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정혁은 벌어진 이 끔찍한 상황에 뭐라 말을 이어 가지 못하고 있었다.

    에고 장비들, 그러니까 엘라와 라테, 에트론은 정혁의 마나가 조금 강하게 주입될 때면 종종 괴로움을 호소했었다.

    정혁이 제대로 그의 마나를 컨트롤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들 역시 기본적으로 본인의 마나를 다량 보유하고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조화롭게 마나를 공급하지 못하는 정혁이 마나를 부어 버리게 되면 이미 가득 찬 잔을 억지로 비우고 다른 것으로 채우려는 불쾌한 시도를 하는 꼴과 같았다.

    일반적인 물이라면 넘치기만 하겠지만 정혁의 마나는 그 그릇까지 깨지게 만들만큼 농도 깊고 무거운 마나였다.

    이를 정혁만 모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대가로 이성을 잃고 쏟아낸 그의 마나 때문에 라테와 에트론, 엘라는 지금 거의 빈사 상태에 이른 것이다.

    만약 시간이 멈추지 않았다면 정혁이 죽는 것은 물론 이 세 존재들도 모두 소멸되었을지 모른다. 아니, 아마 그랬을 것이다.

    “…젠장.”

    정혁이 작게 중얼거리며 머리를 쓸어 올리고 자신의 눈앞의 구체를 보았다.

    [일렀던 것일까.]

    구체에게서 전음이 다가왔다. 정혁은 가만히 그 구체를 보다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진짜 젠트라구나.”

    구체에게서 다음 전음은 이어지지 않았다.

    다만 구체에게 일종의 시선이 느껴졌다.

    마치 정확히 정혁을 보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정혁은 침을 꿀꺽 삼키곤 정지되어 있는 이 회색빛 세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시스템 창 같은 것을 보이지도 않고 이렇게 오랫동안 정지되어 있다니. 이래도 되는 건가?”

    그때 구체에게서 전음이 닿았다.

    [걱정 마라. 이 시간은 충분히 안전하다.]

    “……그래?”

    정혁은 깊게 한숨을 쉬며 양 손에서 건틀릿을 거칠게 벗었다.

    여기저기 충격으로 형태가 변형되어 손을 빼내는 게 쉽진 않았다. 그는 건틀릿을 벗어 아래에 고이 내려놓고 저 멀리서 고고하게 떠있는 엘라를 데려와 건틀릿 옆에 눕혀 놓았다.

    자신의 세 무기를 천천히 살핀 정혁은 씁쓸하게 웃었다.

    마음속에 답답함은 결국 이 감정들을 폭발시키지 못했기 때문이었을까?

    ‘한’이었을 때가 그리웠음을 떳떳하게 밝히지 못해서? 그때의 전투, 그 순간의 감정을 다시 느껴 보지 못해서?

    이런 미치광이였으면서 잘도 제논의 지도자 행세를 했었구나.

    정혁은 자신을 자책하면서 무기들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땀범벅인 옷에서 찝찝한 느낌이 잔뜩 느껴졌지만 그럼에도 정혁은 벌러덩 뒤로 드러누웠다.

    아까까지만 해도 에드가와 광란의 싸움을 벌였던 사람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혁은 싸늘하게 식은 자신의 모습 앞에 이성적으로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왜 이랬는가?]

    전음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혁은 누워서 한쪽 팔로 눈을 가렸다.

    왜 그랬냐고? 왜 이렇게 미친놈처럼 싸웠냐고? 왜?

    랭킹 1위의 위용을 빼앗겼잖아. 내가 쌓아 놓은 업적을 모두 잃었잖아.

    목숨으로 협박당하고 제 마음대로 나를 이곳에 이따위 스펙을 가진 쓰레기로 밀어 넣었잖아.

    기회라고 자위하게 만들었잖아. 상대적인 박탈감을 계속 느끼게 만들었잖아.

    최강의 존재이자 최악의 존재로 게임을 정말 게임답게 플레이했던 나를 이렇게 나락으로 보냈잖아.

    대장장이? 오아시스의 칭호? 시스템의 혜택? 젠트라? 에고장비?

    사실 내가 ‘한’으로 계속 있었다면 다 필요 없는 것들이었어.

    더 강한 놈들이 남아 있었다고? 그게 과연 중요해? 나에게?

    그랬다면, 리안이나 그런 놈들이 숨어 있었다면 언젠간 만났을 거고 그들 역시 내 발아래 무릎을 꿇어야 했을 거야.

    깊은 밤이면 정혁의 마음을 어지럽혔던 마음들.

    이런 마음들이 결국 자신과 비슷한 모습이었던 에드가와 마치 ‘한’으로 돌아간 듯 싸웠던 순간들 때문에 결국 폭발했던 것이다.

    [아니, 아니다.]

    “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정혁은 마치 자신의 마음을 읽은 것과 같이 대꾸한 구체를 곁눈질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것은 모두 너의 착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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