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30화 (130/200)
  • ◈130화

    반석의 중앙엔 토큰과 동일한 모양의 홈이 패여있었다.

    토큰은 그대로 반석의 중앙 홈에 맞춰졌고 토큰에서 빛이 서서히 흘러나왔다.

    백호는 그 빛에 놀라 몸을 움츠렸다.

    마치 그 빛엔 복종해야 되는 것처럼 녀석은 더 이상 어떤 움직임도 취하지 않은 채 반석으로부터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정혁은 쿨럭거리면서 눈을 감았다.

    당장에 자신이 살아남으려면 금방이라도 전신을 찢고 터져 나오려고 하는 것만 같은 마나를 진정시켜야만 했다.

    그런 정혁에게 토큰에서 출발한 빛이 닿았다.

    그 빛은 정혁의 몸에 닿자마자 정혁을 공중으로 붕 떠오르게 했다.

    그러곤 정혁의 몸 안에서 황금빛 마나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빛이 황금빛 마나를 흡수할수록 굵고 짙어지기 시작했다.

    이 황금빛 마나는 정혁으로부터 다른 줄기로 새어 나와 이내 백호에게 다가갔다.

    “아냐! 안 돼! 제발! 제발, 이 빌어먹을 용 새끼야!”

    백호가 발버둥 치며 달아나려 했지만 웬일인지 녀석은 발버둥에도 그 자리에서 한 걸음조차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백호의 구슬픈 포효가 이어졌다.

    “네가 말한 대로 지켜 왔잖아! 지켰잖아! 저놈도 곧이었다고! 곧 끝날 거였다고! 에드가! 에드가! 도와줘, 도와줘! 제발!”

    ‘…에드가··?’

    정혁은 백호가 포효하며 발악하는 사이에 흘러나온 익숙한 이름에 고개를 갸웃했다.

    에드가라면 이 토큰을 자신에게 전달해 준 그 사이코패스 놈이 아니던가?

    젠트라를 만나 강해지면 다시 보자고 했던 인격 장애 자식.

    그 자식의 이름이 왜 갑자기 거론되는 거지?

    그때 갑자기 마나석 동굴의 한 공간에서 틈이 벌어지더니 말쑥한 차림의 어떤 남자가 걸어 나왔다.

    남자는 검은 정장에 하얀색 장갑을 끼고 있었다.

    그리곤 익숙한 듯 한 손으로 안경을 치켜 올리며 벌어진 이 상황을 둘러보았다.

    백호는 그 남자를 보며 화색이 돌아 더욱 격렬히 발버둥 쳤다.

    그러나 그에겐 백호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남자는 이내 공중에 떠 있는 정혁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오. 정혁 님.”

    흰색 장발의 머리카락, 작은 안경,

    도도한 모습조차 변함이 없는 남자.

    그는 에드가였다. 에드가는 정혁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곤 박수를 치면서 말했다.

    “강해지셨어요. 대단합니다. 결국 이렇게 젠트라의 네스트까지 찾아오셨군요!”

    “에드가! 왔구나, 에드가! 제발 도와다오! 젠트라가 깨어나겠어!”

    백호가 발버둥 치며 에드가에게 애걸했다.

    에드가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며 울부짖는 백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순식간에 백호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그리곤 싱긋 웃으면서 짧게 말했다.

    “결국 당신의 역할은 여기까지군요.”

    에드가의 다른 손이 백호의 목 한가운데를 찌르고 들어갔다.

    그리곤 그 손이 빠져나옴과 동시에 백호는 빛무리가 되어 흩어졌다.

    일반적인 몬스터라면 사체가 남아야 하는데 녀석은 그 상태로 빛이 되어 사라진 것이다.

    정혁은 그 장면에 의문을 가지면서도 다시 한번 에드가의 광기 어린 모습을 보며 한숨을 깊게 쉬었다.

    백호에게 닿아 있던 빛의 줄기가 빛이 되어 흩어진 백호의 남은 기운들을 모두 흡수했다.

    그리고 빠르게 거두어진다.

    정혁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황금빛 마나가 반석의 중앙에 차곡차곡 모여 가며 거대한 구체가 되어 가기 시작했다.

    에드가는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상대적으로 정혁은 편안해졌다.

    내면에서 폭발할 것만 같았던 마나가 완전히 빨려 나가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다행이었다.

    엘라는 가만히 에드가를 바라보았다.

    왜일까, 녀석에게서 젠트라와 비슷한 결의 느낌이 들었다.

    “고생… 많았습니다. 긴 여정이었겠지요.”

    에드가는 빛의 구체를 뒤로 하고 공중에 떠 있는 정혁을 보며 말했다.

    “감사를 전합니다, 정혁 님. 이제 우리의 약속을 지킬 수 있겠군요?”

    꾸벅 인사를 한 에드가는 고개를 들어 올리며 광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정혁은 그 미소에 소름이 돋아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잠시 에드가는 이내 구체 안으로 몸을 던졌고 구체는 곧 동굴 전체로 퍼져 나갔다.

    구체를 향해 동굴의 모든 마나석이 품은 힘이 빨려 들어갔다.

    정혁과 엘라도 구체의 빛에 흡수되어 갔다.

    ***

    넓고 밝은 공간에서 정혁은 눈을 떴다.

    엘라 역시 그의 곁에 있었다. 라테와 에트론도 함께였다.

    에트론과 라테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정혁의 곁에 서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라테는 정신을 차린 정혁에게 물었다.

    에트론은 왠지 정혁의 눈치를 살피는 것 같았다.

    정혁이라고 특이한 상황을 알아차리긴 어려웠다.

    그는 고개를 저으면서 뻐근한 몸을 일으켜 섰다.

    주변을 둘러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밟고 있는 것이 땅이고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이 있다는 것과 빛나는 하늘이 있다는 것뿐.

    마치 제한된 어떤 공간으로 소환된 것만 같았다.

    몸엔 여전히 황금빛 마나가 남아 있었다. 구체에게 전부 빼앗긴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다시 생각해 보면 구체는 마치 어떤 알과 같아 보였다.

    그리고 그 알이 깨지면서 에드가가 흡수되고 알 속의 빛이 사방을 집어삼켰던 것 같다.

    그때 엄청난 포효와 함께 빛 속에서 강한 바람이 지면을 내리쳤다.

    일순간 라테의 불꽃이 전부 사그라드는 것만 같았고 엘라는 저 멀리 날아가 버릴 뻔했다.

    에트론은 가까스로 정혁의 옷을 붙잡고 버틸 수 있었다.

    바람은 펄럭거리는 소리를 동반했는데 정혁은 직감적으로 이것이 젠트라의 날갯짓일 것이라 예상했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정확히 적중했다.

    빛 속에서 황금빛 드래곤이 천천히 땅을 향해 내려왔다.

    가늠할 수 없는 크기를 가진 드래곤은 전신이 반짝이고 있었다.

    거대한 날개와 긴 꼬리, 넓고 두툼한 턱에 매서운 눈매. 엄청난 하강풍과 함께 드래곤은 지상에 착륙했다.

    포효. 귀청이 떨어지다 못해 차라리 귀를 없애 버리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의 포효가 이어졌다.

    고대하던 순간이었지만 이 찝찝함은 무엇일까.

    정혁은 숨을 죽이며 녀석의 움직임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젠트라는 빛에 휩싸여 모습이 점점 축소되다가 사람의 형상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에드가였다.

    에드가는 싱긋 웃으면서 어리둥절한 정혁과 일행에게 다가왔다.

    “정식으로 인사할까요? 저는 젠트라의 마지막으로 남은 자아 ‘에드가’입니다.”

    “…마지막 남은 자아?”

    젠트라, 아니 에드가는 여전히 잔잔한 미소를 띠며 손가락을 딱 하고 쳤다.

    그러자 공간이 순식간에 따뜻한 응접실로 바뀌었다.

    익숙한 것이 이곳은 정혁의 대장간에 있는 응접실이었다.

    그리고 그곳엔 어리둥절해 있는 조가 서 있었다.

    조는 에드가를 보더니 반색하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리쳤다.

    “아니, 에드가!”

    “아, 조 패더럴 씨. 여기 계셨군요?”

    “여긴, 어떻게?”

    “뭐, 여러 일들이 있었습니다만, 이렇게 모습을 뵈니 좋네요. 신세 많이 졌었습니다.”

    “아니, 아닐세, 하지만 이게 무슨.”

    조가 정혁과 에드가를 번갈아 보면서 당황한 목소리로 재차 물었으나 정혁도 이에 대해 뭐라 대답해 줄 수가 없었다.

    자신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조까지 이곳에 있는 것을 보면 이곳은 정혁의 대장간.

    그 이공간 안이 맞다.

    에드가는 어떻게 이곳으로 순식간에 이동해 올 수 있었을까.

    라테가 응접실 한편의 화로 안으로 들어가 보더니 전음을 보냈다.

    [여기, 자네의 대장간이 맞네.]

    평소 그곳을 자신의 집처럼 사용했던 라테는 단박에 이곳이 가상의 만들어진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의심하지 마세요. 이곳은 정혁님의 대장간이 맞습니다.”

    에드가는 라테를 보며 웃었다.

    그러곤 푹신한 의자에 몸을 앉히곤 정혁에게도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마치 본인의 집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듯한 불쾌한 행동이었지만 정혁은 한수 물러 고분고분 그의 지시에 따랐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이 상황의 뿌리가 뻗어져 있었던 걸까.

    애초에?

    시작부터?

    정혁은 혼란스러웠다.

    강철망치에서 시작된 자신의 두 번째 캐릭터의 삶.

    그리고 곧이어 만나게 된 에드가와 젠트라의 초대장.

    험난한 여정들과 정혁의 성장.

    계속해서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던 누군가의 큰 그림 속에 자신의 모습은 역시나 맞았던 걸까?

    안나가 이야기해 주지 못했던, 리안만이 할 수 있다는 그 이야기를 오늘 들을 수 있을까?

    에드가의 두 눈이 살짝 빛났다.

    그러자 곧 공간 전체가 어떤 결계 속에 묶였다.

    엘라는 마나의 흐름조차 갇혀 버렸다는 것을 느끼곤 불쾌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에드가를 바라보았다.

    에드가는 여전히 싱긋 웃고 있을 뿐이었다.

    “뭐, 궁금해하시니. 본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애석하게도 정혁 님, 당신이 찾는 젠트라는 이미 죽었습니다.”

    “젠트라가 죽었다고?”

    “…예.”

    정혁을 비롯한 그 곳에 있던 모든 자의 안색이 바뀌었다.

    “말씀 드렸지만 저는 죽은 젠트라가 남긴 마지막 자아의 조각이자….”

    순간 에드가의 웃음에 살기가 가득 서렸다.

    “그가 제일 증오하던 조각이었죠.”

    에드가의 미소에서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았다.

    그래, 이 모습이 진짜 에드가다.

    광기에 사로잡힌 광전사. 대전쟁을 겪고 살아남아 피를 쫓던 자.

    자신의 본색을 숨기고 있었지만 결국은 피를 갈망하는 자.

    이런 자가 젠트라의 자아라고?

    “젠트라는 고귀한 용. 세계를 수호하고 지키고자 했던 모든 드래곤들의 시초이자 어머니이고 아버지였죠. 세계가 창조한 존재인 그는 세계의 의도를 따라 항상 뒤에서 세계를 지켜봤답니다. 그는 온화하고 성실하며 활기차고 도덕적인 자였죠. 그러나 감정이 있는 존재라면 반드시 어두운 이면도 존재하는 법.”

    에드가는 자신의 손 안에 어두운 구체 하나를 만들어 냈다.

    안에서부터 뭔가가 튀어나오려는 듯 불안정하게 떠 있던 구체는 계속해서 에드가의 손 안에서 점점 압축되다가 곧 어떤 사람의 형태로 변했는데 그것이 바로 에드가였다.

    “젠트라는 스스로의 마음속에 생기는 불편한 감정들을 배출해 낼 도구가 필요했습니다. 그는 오랜 시간 끊임없이 그것들을 배출해 내기 시작했고 그 안에는 자연스럽게 젠트라의 여러 힘들이 찌꺼기처럼 남아 쌓이기 시작했죠. 그 힘들이 모여 자아를 만들고 형상을 갖췄답니다. 그게 바로 저예요. 젠트라가 늘 숨기고 싶어 했던 그 자아.”

    어깨를 으쓱하며 에드가는 입맛을 다셨다.

    “차 없을까요?”

    에드가의 말에 에트론이 쪼르르 날아가 응접실 한편에 마련된 찻주전자를 달이기 시작했다.

    라테가 불길을 더하자 물은 금방 끓었고 향긋한 페퍼민트 향이 응접실에 퍼지기 시작했다.

    “젠트라는 저를 세상에 던져 놓았답니다. 그리고 제겐 계속해서 그런 불편한 감정들을 쏟아부었죠. 감정들이 쌓이면 쌓일수록 저는 강해졌어요. 그리고….”

    에드가의 눈빛이 다시 살벌해졌다.

    “보세요. 짜잔, 저는 결국 정혁 님 덕분에! 젠트라가 되었답니다!”

    에드가의 말에 정혁은 눈을 감고 한숨을 깊게 쉬었다. 그러곤 속으로 한마디 뱉었다.

    ‘X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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