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29화 (129/200)
  • ◈129화

    다시 한번 마나를 전신에 퍼트리고 정혁은 가볍게 백호의 날카로운 공격을 피해냈다.

    그는 한참 뒤로 밀려나야 했지만 그럼에도 움직임에 군더더기란 찾아보기 힘들었다.

    마치 동굴 안의 부정적인 영향력을 받지 않는 상태와 같아 보였다.

    마나는 계속해서 엘라를 통해서 정혁의 전신을 돌았다.

    [자, 잘 들어! 이건 어떻게 보면 네가 나를 일종의 필터로 쓰고 있는 거나 다름없는 거야!]

    엘라의 말에 정혁은 정면의 백호를 주시하며 전음으로 물었다.

    [무슨 말이야?]

    [물론 이렇게라도 네가 마나를 쓰는 법을 익혔으면 좋겠어서 내가 이곳으로 온 거긴 하지만 어쨌든 너는 나 덕분에 네 마나를 정상적으로 컨트롤할 수 있는 거라구!]

    [아, 그러니까 네가 없으면 나는 다시 쓰레기 같은 몸 상태가 된다는 거야?]

    [비슷해.]

    정혁은 깊이 호흡하면서 마나의 흐름을 느꼈다.

    엘라의 말대로 자신의 몸에서 자연스럽게 스태프를 통해 외부의 마나와 공명하고 있다.

    혼자 할 때보다 더 부드럽고 더 매끄럽게 외부와 하나가 되어 가고 있다.

    하지만 이건… 정혁이 원하는 결과는 아니었다.

    리안과 처음 만났던 날을 기억한다.

    엘라는 리안을 끔찍이도 아꼈다. 정혁이 알던 은행나무 고대 엔트 엘라가 아니라 리안을 존재 이상으로 사랑하는 여자의 마음이 그녀의 행동에서 느껴졌다.

    유르겐의 말을 떠올려 보면 리안은 썩 엘라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지만 어쨌든 그녀와 리안 사이에 어떤 일들이 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엘라를 처음 에고 장비로 계약하게 되었을 때, 엘라가 그녀에게 어울리는 자에게 주어지게 된다면 더 큰 힘을 발휘할 수도 있다는 뉘앙스의 말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엘라는 결국 마지막 전투에서 자신보다는 리안을 위해 사용될 가능성이 높다.

    지금 그녀와 정혁은 어떻게 보면 남매지간과 다름없을 만큼 투닥거리고 있지만 리안과는 더 깊은 관계를 가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오아시스의 마법사’ 애초에 스태프는 그런 자에게 어울리는 무기다.

    엘라를 리안에게 줘야만 한다면 정혁은 엘라를 통해 마나를 다루는 수동적인 방법으로 마나를 터득해서는 안 된다.

    스스로 엘라를 거치지 않고도 이것보다 더 자연스럽게 마나를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잠시 고민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정혁이 번쩍 정신을 차리고 앞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백호의 낌새가 아까와는 달랐다.

    녀석은 마치 정혁을 더욱 세밀하게 관찰하는 듯이 몸을 낮게 내리깔고 으르렁거리면서도 찬찬히 정혁을 주시하고 있었다.

    녀석의 뒤로 거대한 방 중앙에는 네모난 반석 같은 것이 놓여있었다.

    동굴의 넓은 방 사방으로 푸르게 빛나는 마나석이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빛이 결국 농도 깊은 마나이기 때문에 까딱 흐름을 놓쳤다간 신체가 무너질지도 모를 만큼의 엄청난 마나의 무게에 짓눌릴지도 모른다.

    이곳이 동굴의 끝.

    그리고 저 녀석이 안젤리나가 이야기했던 베일에 싸인 어떤 강력한 존재.

    말을 할 수 있는 백호라.

    “어째서지?”

    백호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혁은 가만히 녀석을 바라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백호는 몸을 한 번 부르르 떨고는 보다 여유로워진 움직임으로 두세 걸음 정혁의 앞으로 다가왔다.

    아직 거리는 꽤 벌어져 있기에 정혁은 불필요한 위협이 될지도 모를 동작을 취하진 않았다.

    긴장의 유지. 전투에서 신경 써야 할 치명적인 요건이다.

    “어째서 네가 젠트라의 마나를 가지고 있는 거지?”

    “…!”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정혁의 전신은 살짝 떨렸다.

    소름이 돋아 올랐다고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백호는 어슬렁거리면서 정혁의 근처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저런 녀석 알거나 본 적 있어?]

    [있으면 내가 도망쳤겠니?]

    하긴, 엘라가 그 상황에서 미친 듯이 자신에게 달려왔다는 건 저 녀석이 적어도 엘라보다 강하다는 뜻이다.

    상대가 안 된다는 판단과 더불어 자신도 자연의 존재들 중에 저만큼 강한 자를 쉽게 만나 보진 못했을 것이기에 스스로 경악해서 나온 돌발적인 행동일 가능성이 높다.

    스태프의 잔진동을 통해 정혁은 엘라 역시 이 상황이 편안하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젠트라를 아나?”

    백호가 되려 정혁에게 물었다.

    이 질문엔 대답해야 했다.

    도발적으로 말이다.

    “젠트라를 만나고 싶어서 너를 찾아온 거다.”

    정혁의 말에 백호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백호는 정확히 그 날카로운 눈으로 정혁의 두 눈을 쳐다보다가 껄껄껄 웃으면서 소리쳤다.

    “하하하하하! 그 녀석을 만나고 싶어서 나를 찾아왔다고?! 거짓말! 나를 이곳에 처박은 놈이 그놈인데? 스스로 내 밥이 되겠다고 선언하구나!”

    그리곤 곧바로 녀석의 공격이 시작됐다.

    정혁은 자신의 수가 틀려먹었다고 생각하곤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전력의 망치와 화염의 망치가 동시에 힘을 발산했다.

    정혁의 마나에 반응하여 더욱 큰 범위의 공격들이 산발적으로 펼쳐졌다.

    그러나 마나를 몇 겹으로 두르고 있는 백호에겐 조금도 유효적인 타격을 입히지 못하고 있었다.

    정혁은 엘라를 동굴 저편으로 던졌다.

    엘라는 전음으로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동굴 한쪽으로 날아가 박혔다.

    그녀가 정혁에게만 들리는 욕설을 마구 뱉어 댔지만 정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가 날아간 곳과 정혁 사이에 정혁의 마나로 이루어진 긴 고리가 보였다.

    정혁은 그것에 집중하면서 백호의 매서운 공격을 빠르게 피해 갔다.

    엘라가 정혁의 등 뒤에 고정되어 있을 때보다 마나를 컨트롤하는 것이 더 어려워졌다.

    중간중간 현저히 느려지는 움직임 때문에 몇 번을 죽을 뻔했다.

    백호는 여전히 쟁쟁한 움직임으로 단 한 번의 타격도 받지 않은 채 여유롭게 정혁을 ‘사냥’ 중이었다. 이가 갈렸다.

    바깥이었다면 호각 이상으로 싸울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알고 있다.

    이런 불평 따위 하등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버티고 이겨 내야 결국 엘라를 통해서가 아닌 자신으로부터의 완전한 마나의 흐름을 정복해 낼 수 있다.

    ‘조금 더 극한으로 끌어내 보자.’

    정혁은 마치 자신의 모든 능력들이 모두 자신의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에만 효과적으로 발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자신에게 일종의 리미트를 정해 놓은 것처럼 말이다.

    단계적으로 성장해 나가야만 하는, 어쩌면 거대한 그림 안에 정혁의 로드맵이 작성되어 있지 않을까 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매번 그렇게 딱딱 맞는 순간에 딱딱 맞는 일들이 벌어질 수가 없다.

    우연이라기엔 너무 반복적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지금도 익숙지 않은 이 마나에 완전히 적응하려거든 죽기 직전까지 가야 한다.

    ‘억지로가 아니라 최선을 다하되 마지막 순간이라면 의연해져 보자.’

    이곳의 죽음이 진짜 죽음이 될지라도 이제껏 모든 순간에서 결코 정혁은 죽지 않았었다.

    예상대로 정혁은 빠르게 지쳐 갔다.

    엘라와 연결된 마나의 흐름을 계속해서 연결하기 위해 신경의 한쪽은 온전히 엘라에게 집중되어 있어야 했고 그와 동시에 백호와의 셀 수 없는 전투의 합을 나눠야 했으며 동시에 에고 장비 활성화 단계의 고위 패시브 스킬을 지속적으로 유지해야만 했다.

    지금까지 이렇게나 긴 동굴을 수도 없이 많은 몬스터를 헤쳐 가며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정혁의 체력은 넝마 수준이었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정혁은 망치를 쥔 두 손에 힘을 더하며 고함을 내질렀다.

    그러나 공중에서 빠른 속도로 내리쳐진 백호의 앞발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는 마나석 동굴 한쪽으로 처박혔다.

    그와 동시에 엘라와 연결되어 있던 마나 고리가 끊어졌다.

    정혁은 순간 호흡이 턱끝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전신을 감싸던 평온한 마나가 갑작스럽게 뒤틀리며 온몸 여기저기를 내부에서부터 뒤집어 놓았다.

    끔찍한 고통이 머리를 아찔하게 만들었다.

    정혁의 두 손에 망치는 사라졌고 엘라는 스태프 상태에서 다시 본연의 정령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엘라도 섣불리 정혁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이미 백호가 입맛을 다시며 정혁의 가까이로 접근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엘라의 눈엔 정혁의 내면에 정리되지 못한 마나가 곧 터질 것만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외부와 공명하고 있는 마나의 흐름을 본인이 잘 정리해서 끊어 내지 않으면 흐름이 끊기고 마나는 축적된다.

    평소의 미미한 마나라면 상관없지만 마나석 동굴 제일 깊은 곳에서 백호와 미친 듯이 싸우던 정혁은 이미 엄청난 양의 마나를 외부와 순환시키며 싸우고 있었다.

    폭발적인 마나의 흐름이 갑자기 끊어지자 엄청난 양의 마나가 갑작스레 막히게 되었고 정혁은 내면의 마나와 외부의 마나에 양면으로 짓눌리는 꼴이 된 것이다.

    “괴롭지?”

    백호가 이죽거리며 정혁을 조롱하듯 천천히 다가왔다.

    “이곳까지 온 인간도 몇 안 되지만 너만큼이나 나와 싸움을 이어 갔던 인간은 더욱 없었다. 그 점은 훌륭하다만 결국 어쩔 수 없는 인간. 게다가 젠트라 그놈의 기운을 가진 놈이라면 더욱이 사지 멀쩡하게 죽일 순 없는 노릇이야.”

    엘라는 어떻게 해야 정혁을 이 상황에서 구해 낼 수 있을지 머리를 굴려 봤다.

    하지만 도저히 답이 내려지지 않았다. 저 상대가 너무 강하다.

    “…젠트라는… 어디 있지?”

    정혁이 작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백호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정혁의 말에 대답했다.

    “하! 젠트라의 마나를 가진 자가 젠트라의 위치를 모른다라. 어처구니가 없구만. 게다가…….”

    백호가 정혁의 코앞까지 다가와 정혁의 몸에 냄새를 맡는 듯이 코를 들이 대고 깊게 숨을 들이 쉬었다.

    “역시. 너는 이미 놈을 만난 적이 있어.”

    “…므, 뭐?”

    정혁이 입에서 피를 왈칵 토해 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벽에 처박혀 있던 그의 몸은 바닥으로 떨어져 한 바퀴 뒹굴었다.

    그 와중에도 정혁은 백호가 자신에게 한 말을 가까스로 곱씹어 보았다.

    이미 만나 봤다니.

    “냄새가… 나. 빌어먹을, 그 냄새. 비릿하면서도 위선적인, 그 냄새 말이야.”

    백호가 크게 기침을 한 번 했다.

    그리곤 몸을 한 번 부르르 떨자 털들이 곤두섰다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녀석은 심호흡을 두어 번 하곤 입맛을 살짝 다시면서 정혁을 노려보았다.

    금방이라도 정혁을 집어 삼킬 기세였다.

    그때 엘라가 재빨리 정혁의 곁으로 날아왔다.

    백호는 그녀가 귀찮은 듯이 손짓을 몇 번 했지만 엘라는 빠르게 그 손짓을 피해 정혁의 품 안에 있던 나무 토큰을 찾아냈다.

    애초에 자신의 나무 재질로 되어 있었기에 그녀는 그것을 순식간에 꺼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토큰을 들고 방 중앙에 있는 반석을 향해 날아갔다.

    순간 백호가 어떤 불길한 예감을 느꼈는지 몸을 돌려 날아가는 엘라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엄청난 포효를 내뱉으며 빠르게 엘라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미 엘라는 반석의 중앙에 서 있었다.

    그녀는 달려드는 백호를 보며 양손의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보이고는 싱긋 웃으면서 토큰을 반석 중앙에 떨어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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