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27화 (127/200)
  • ◈127화

    “그렇게 되도록 본인이 유도했다는 거예요?”

    “글쎄, 나는 그렇게 판단하고 있지만 내 판단은 그리 중요하지 않지. 안나, 자네가 나를 어떻게 판단하느냐가 결국 나의 존재 가치를 증명할 테니 말이야.”

    안나는 그의 이 괴랄한 화법에 머리가 지끈거림을 느꼈다.

    그래도 꾹 참아 보기로 했다.

    “녀석은 예상 밖의 나의 행동에 놀랐을 거야. 리안과 나라면, 게다가 독특한 능력을 가진 유르겐까지 합세한다면… 이 세계를 지금까지 끌고 오지 않아도 됐을 거라고 여겼겠지만 나는, 발을 뺐지. 다섯 번째의 리사이클을 겪으면서 녀석은 이제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고 여기고 무리했어. 시스템에 본인의 존재를 드러내고 오아시스의 메인 시스템에 공격을 받기 시작하면서까지 오류를 발생시켜 ‘한’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정혁을 생성한 거야.”

    “그 결과가 지금 정혁의 특별함을 증명한다고 보시나요?”

    “…그래.”

    안나는 로만의 이야기가 E와의 지난 대화들과 일맥상통하는 부분들이 분명 있다고 느꼈다.

    “정혁, 그 녀석의 힘은 과해. 시간의 주관자? 결국은 시스템 자체 아닌가? 그 힘을 다룰 수 있으면서도 대장장이라는 그리 보잘것없는 직업을 가짐으로 그 존재 가치를 과소평가하게 만들고 이를 연막 삼아 세계의 강한 존재들을 부리고 자신을 ‘한’보다 강하게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부여됐지. 이 모든 일들이 결국은 무엇을 대변하고 있을까? 어때? 무슨 생각이 들지?”

    “마지막…이군요.”

    “그래.”

    로만이 작게 대답하곤 손안에 자신의 마나를 집중시켰다가 작게 터트렸다.

    동그란 힘이 터져 오르며 버섯구름을 만들었다가 흩어졌다.

    “이번 리사이클에 녀석은 사활을 걸었어.”

    “그래서… 이 시기가 되어도 그는 우리에게 아무런 말이 없는 거구요.”

    “…어쩌면 이미 시스템에 의해 소멸되었을지도.”

    “그럴 수도 있겠군요.”

    로만은 고개를 끄덕이곤 몸을 뒤로 뉘여 양손을 모아 테이블 끝에 두었다.

    “이렇게 과한 무리를 하지 않고는, 녀석의 근본적인 희생이 있지 않고는, 우리는 시스템을 전복시킬 수 없어. 인간에겐 더 이상의 희망이 없다는 말이네.”

    “…하….”

    안나의 깊은 한숨이 길게 이어졌다.

    “E라는 자를 만났다고 알고 있는데 그자는 어떤 이야기를 했지?”

    “…어떻게 알고…?”

    “침묵은 이렇듯 늘 빈틈을 찌르고 날카로운 기회를 만들어 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네.”

    다시 한번 그의 말투에 이골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안나는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그에게 전달하기로 했다.

    “리안과의 전투로 상당수 전력을 잃은 그들이지만 어차피 시스템은 그들을 다시 재구성해서 세울 것이고 전력의 공백은 그렇게 메꿔질 거랍니다. 우리에게 희소식은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정혁의 존재에 대해서 그리 큰 걸림돌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점과 젠트라가 소멸됐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점 정도가 될 것 같아요. 한 가지 의문 인 건.”

    “의문?”

    “당신은 그가 이미 소멸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지만 어떻게 보면 우리에게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는 이 상황이 그가 뒤에서 이렇게 흘러가도록 여전히 힘을 쓰고 있을지 모른다는 추측을 E가 했어요. 어떤 것 같아요?”

    “…그런가….”

    로만은 잠시 입을 다물고 눈을 감았다.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고 다시 그의 대답이 돌아왔다.

    “기든 아니든 결과론적으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 녀석은 이 마지막 기회에 모든 것을 걸었다는 것. 녀석의 도움이 있든 없든 녀석이 던진 마지막 키로 마지막 전투를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전쟁에 우리 역시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는 모든 사실엔 변함이 없지 않은가.”

    “…예, 그러네요. 기대지 않고 모든 판단을 하는 쪽이 안전하겠죠.”

    “안전?”

    로만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우리에게 안전하다는 생각은 교만일세.”

    ***

    “사령관님!”

    이른 아침 김창수의 집무실을 벌컥 열고 들어온 것은 하늬안이었다.

    이미 기상해서 아침 운동을 마치고 나온 김창수는 호흡마저 거친 하늬안을 보면서 일단 그녀를 진정시켰다.

    하늬안은 헉헉거리며 어깨를 몇 번 들썩이다가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말했다.

    “욘마곤 접경지대에서 소규모 게릴라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피해는?”

    “비슷한 수준이긴 한데, 저희 쪽 플레이어들이 붙잡혀 갔습니다.”

    “비겁한 수를 쓰는군. 어느 쪽인가?”

    “안도리니였습니다.”

    하늬안의 말에 김창수는 한숨을 푹 쉬고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가겠습니다. 허락해 주세요.”

    “혼자 말인가?”

    “제 수비대 병력들을 데리고 가겠습니다. 다행히 붙잡혀간 플레이어 중 한 명의 위치가 지속적으로 추적되고 있어요. 빠르게 움직이고 있긴 하지만 쫓는다면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김창수는 하늬안의 표정과 넘치는 투지를 보며 한동안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하늬안.”

    “예!”

    “잘 듣게.”

    조금 달라진 김창수의 말투에 하늬안이 침을 꿀꺽 삼켰다.

    “여기는 이제 더 이상 카탈의 땅과 다르다네, 알고 있지? 우리가 악마 군단의 침공을 막기 위한 명분으로 이 땅에 들어와 지금 나름 안정적인 체계를 갖춰 낸 것과 같이 저들도 명분을 찾는 싸움을 하고 있는 거야. 정치란… 그런 것이지.”

    김창수가 창밖을 슬쩍 바라보고 눈을 깊게 감았다가 떴다.

    “그들이 나가 있던 전초기지는 포기한다. 내줘. 그쪽에 잡혀간 플레이어들도… 포기한다.”

    “예?!”

    하늬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김창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김창수는 단호했다. 그는 그의 판단을 번복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아니, 이건 납득이 되지 않는 판단이다.

    그녀가 알고 있는 김창수라면 당장에 특공대를 꾸리든 아니면 저들에게 들이받든 둘 중에 하나는 해서라도 어떻게든 연합의 구성원들을 다시 데려오려 할 텐데, 게다가 이번 일방적인 공격으로 인해 당한 자들에 대한 복수를 톡톡히 해 줬을 텐데. 그녀는 이 상황이 낯설고 어이없어서 그의 앞에서 발끈해 버렸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포기…하신다니요!”

    “하늬안!”

    김창수가 소리쳤다.

    그 소리가 어찌나 컸는지 임시 집무실의 목재 벽이 소리의 파동에 작은 진동을 일으킬 정도였다.

    그럼에도 하늬안은 기죽지 않고 똑똑히 김창수를 쳐다보았다.

    김창수 역시 그녀의 매서운 시선을 피하진 않았으나 곧 힘을 뺀 쪽은 김창수였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이마를 문질렀다.

    “…카탈과… 다르다고 했잖나.”

    “카탈은 오아시스가 아닌가요? 카탈의 제논은 타이런의 제논과 다른 겁니까?!”

    “아니… 아니지, 같아.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는 지금 한 보 물러서는 거야.”

    “예?”

    “생각해 보게 하늬안. 카탈이라는 강에서 우리는 거대한 물고기 두 마리를 안정적으로 사냥한 훌륭한 낚시꾼이었다네. 우리에겐 검증된 낚싯대가 있었어.”

    하늬안은 정혁과 아크 제국, 자유 연맹을 떠올렸다.

    “하지만 타이런은 거대한 바다와 같네. 우리는 강에서 쓰던 낚싯대 하나만 믿고 바다에 온 거야. 그저 그 낚싯대면 되겠거니 믿으며 말이야. 근데 웬걸. 바다 저 멀리 있는 고기들을 잡으려면 낚싯배도 필요하고 배를 몰아야 할 선장과 선원들도 필요했지. 강과는 다른 엄청난 날씨와 풍파에 맞설 준비도 되지 않았어. 그런데도 어쩌다 바다 위에 배를 띄웠지. 지금 우리 꼴이 그래. 저 커다란 고기가 언제 우리를 집어삼킬지 모르는데 우리는 망망대해에서 거대한 폭풍 속에 휘말려 있단 말이야. 그럼 우리는 지금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이 정답이겠나? 고기가 꼬리쳐서 물 몇 방울 맞았다고 물장구로 맞받아쳐야 할까? 그러다 놈의 화라도 돋워서 아예 거대한 파도를 몰고 우리 배를 전복시킨다면? 그게 옳겠나?”

    “…이해는 됩니다만!”

    “하늬안, 지금은 말일세.”

    김창수가 몸을 일으켜 하늬안에게 천천히 다가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지금은 우리 모두가 이 바다 위의 배 안에서 각자의 역할에 맞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 바다에 적응해 가는 시기라네. 부디 모두의 칼이 완벽히 갈릴 때까지 우리의 목표인 두 마리의 고기가 우리를 스쳐 지나가기만을 바라야 해.”

    하늬안의 이 가는 소리가 김창수의 귀에도 정확히 들렸지만 김창수는 애써 그 소리를 무시하며 문으로 걸어갔다.

    “제논은 여전히 제논일세. 그러나 이젠 우리도 칼을 빼들었고, 그 대가를 감수해야 하지. 드웨이크도, 그들도. 대가라면 대가일 거야.”

    문이 열렸다가 끼익 소리를 내며 닫혔다.

    집무실에 홀로 남은 하늬안은 한참을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뭔가를 결심한 얼굴로 거칠게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아무도 남지 않은 김창수의 임시 집무실엔 고요와 적막만이 낮게 깔리고 있었다.

    ***

    “…엘라아아아아아!!”

    “닥쳐어어어어어!!!!”

    엘라와 정혁의 비명이 동굴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엘라는 그녀에게 달라붙어 있는 정혁을 매단 채로 동굴 안을 향해 날아가는 중이었다.

    그들의 뒤로 마나석 수정뱀 한 마리가 혀를 날름거리며 빠르게 둘을 쫓았다.

    수정뱀 근처로 조금 커다란 크기의 파리 떼가 함께 그들의 뒤를 따르고 있었는데 이 마나 파리들은 조금이라도 그들에게 가까이 붙었다 싶으면 몸 전체를 터트리며 찐득하고 불쾌한 진액으로 사방을 산화시켰다.

    하지만 수정뱀은 이 공격도 아랑곳없이 정혁과 엘라만 쫓을 뿐이었다.

    수정뱀만 있다면 어떻게든 싸워 보겠는데 둘 다 징글징글한 것은 세상 싫어하는 데다가 파리 떼의 숫자도 도저히 감당할 수준이 아니어서 이들은 어쩔 수 없이 도망을 택한 것이었다.

    마나를 공명시켰다 해도 신체 능력의 제약은 여전히 존재해서 정혁은 자신이 달리는 속도로는 결코 놈들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해 미리 엘라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고 엘라 역시 욕이란 욕을 다 해 대면서 정혁을 매달고 사력을 다해 비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계속 이렇게 할 거냐고 멍청한 놈아!”

    엘라가 뒤를 힐끔 보다 파리 떼의 징그러운 눈동자와 눈이 마주쳐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리 질렀다. 정혁은 자신의 망치 하나를 소환해 동굴 전장을 향해 집어던졌다.

    망치는 동굴 벽 여기저기를 쳐 대면서 주변의 마나석들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그러나 영민한 파리 떼는 이 모든 공격을 피해냈다.

    “쟤들 닿으면 터진다고!”

    울상이 된 정혁이 고개를 저으며 소리쳤다.

    “알 바냐고!”

    “너! 스태프로 만들어서 그걸로 후린다!”

    “미쳤냐! 이 새끼야!”

    순간 엘라가 몸을 틀어 정혁을 걷어찼고 정혁은 그대로 뒤로 나가떨어졌다.

    정혁이 떨어져 나갔지만 엘라는 아랑곳 않고 계속해서 동굴 안으로 달아났다.

    결국 그곳엔 정혁 혼자 남았다. 정혁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저 멀리 사라져 가는 엘라의 뒷모습만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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