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26화 (126/200)
  • ◈126화

    정확히 골렘의 주먹질이 정혁의 정수리로 쏟아지는 순간 정혁은 마음속을 무겁게 억누르고 있는 답답함의 중심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곳에 살고 싶다는 자신의 의지를 응축시켰다.

    그러자 이 답답함이 안에서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이 반응은 곧 정혁이 가진 이 황금빛 마나, 그 진가가 발휘되기 시작했다.

    이 찰나의 순간이 정지된 것이다.

    정혁은 자신의 머리 꼭대기에서 닿을 듯 말 듯 멈춰선 골렘의 주먹을 피한 뒤 주변을 둘러보았다.

    엘라의 당황한 표정과 동시에 그녀의 손에서 그녀의 마나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녀석, 걱정되긴 한 모양이지?’

    정혁은 이 놀라운 순간을 머릿속에 기억하고자 노력했다.

    이 느낌과 이 순간의 기분을 말이다.

    그리고 동시에 엘라가 말했던 그 마나의 빈 공간이 멈춘 시간 속에 적나라하게 보이는 것을 느꼈다.

    정혁은 자신의 마나를 그 멈춘 외부 마나의 빈 공간에 연결시켰다.

    황금빛 마나가 외부의 마나와 연결되자 연결 부위가 빛을 발했다.

    [system error : 당신은#4! 잘&$못163입력83수행]

    그때 불길한 상태 창이 눈앞을 가렸다.

    [back up count 5…4…]

    5초간 짧은 카운트가 세어진 뒤 곧 정지된 시간이 풀리고 정혁이 방금까지 있던 자리에 엄청난 공격이 쏟아부어졌다. 엘라가 그곳에 은행나무 잎으로 보호막을 펼쳤지만 보호막은 금세 깨지고 골렘들의 공격이 그대로 지면에 내리쳐졌다. 엘라의 인상이 구겨졌다.

    “…야, 야!”

    엘라가 소리치자 정혁이 그녀의 옆에서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대답했다.

    “왜?”

    “꺄악-!”

    엘라가 깜짝 놀라 팔을 휘둘렀고 정혁은 재빨리 그것을 피해 내며 그녀의 입에서 터져 나온 괴상한 비명 소리에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엘라 역시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정혀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가 정혁이 능글맞은 미소로 엘라를 보며 웃고 있자 민망해졌는지 입을 틀어막았다.

    “꺄아아악!”

    정혁이 엘라는 놀리 듯 그녀의 비명 소리를 흉내 냈다.

    그러자 엘라가 그를 골렘 쪽으로 걷어차 버렸다. 평소라면 피했겠지만 동굴 안에서만큼은 쉽게 그러지 못했다.

    정혁은 그대로 밀려났고 골렘의 등에 부딪쳐 바닥으로 떨어졌다.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으나 틈을 주지 않던 골렘들은 다시 정혁에게 달려들었다.

    쾅- 쿠쾅- 콰쾅!-

    동굴 여기저기가 울렸다. 하지만 골렘들의 일방적인 공격에 의한 소리는 아니었다.

    정혁의 손에는 그의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는 두 제련 망치가 들려있었다.

    평소보다 현저히 느린 속도이긴 했지만 골렘들도 큰 덩치 때문에 날랜 속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정혁은 어렵지 않게 그들의 공격을 피하며 자신의 망치로 그들을 두드릴 수 있었다.

    게다가 웃기게도 골렘들은 광물이다.

    “마나석 파밍이랑 뭐가 다르냐!”

    정혁이 유쾌하게 소리치며 골렘들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엘라는 그 광경에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트렸다.

    웃기지 않은가? 물리 공격을 무시한다지만 정혁이 하는 행위는 공격이라기보단 채광에 가깝다.

    골렘들은 골렘인 채로 그들의 몸을 구성하는 마나석을 채굴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 아이러니한 광경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정혁의 신나는 채굴은 이내 끝이 났다.

    두둑해진 인벤토리 무게와 함께 말이다.

    동굴 전체가 마나석이었지만 행여 잘못 건드려 무너질까 봐 채광할 생각도 하지 못했던 정혁에게 예상치 못한 마나석의 수확은 재정적 기쁨을 선사해 주었고 동시에 정혁 특유의 우쭐거림을 안겨주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엘라에게 따귀나 맞으면서 자신의 멍청한 머리를 질책하던 자신이었는데 이렇게 성공하고 나니 어깨가 한없이 치솟았다. 엘라는 흥얼거리는 그를 보며 어이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어떤 꼼수를 쓴 건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마나가 정상적으로 흐르고 있긴 하네.”

    엘라가 정혁을 보며 말했다.

    완벽히 분리되어 정혁의 몸으로 흡수되지 못했던 마나석 동굴의 농도 깊은 마나는 정혁의 전신을 자유롭게 통과하고 있었다. 정혁도 한결 가벼운 몸으로 편안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집중이 흐트러지면 마나의 흐름이 끊어지거나 흩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엘라는 거듭 강조했고 정혁은 아까의 느낌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괴랄한 상태 창과 경고 알림을 생각해 봤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경험은 이미 해 봤다.

    대장간에서의 시간은 외부와 다르게 흐르기 때문이다. 그땐 별다른 시스템의 경고 문구가 없었다.

    일전 유르겐이 자신의 마나를 강탈해 사용 했을 때도 특이점은 없었다.

    어쩌면 자신의 마나를 대신 사용한 유르겐에게 이런 경고 메시지 따위가 활성화되었을까?

    모르겠다.

    어쩌면 이 시간의 정지 효과가 풀리는 시간을 늘릴 수 있을까?

    마치 에트론과의 친밀도 향상을 통해 무기고의 무기 대여 시간을 늘리는 것처럼 말이다.

    유르겐은 훨씬 긴 시간을 정지시켰었으니 정혁도 가능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방법이 무엇일까?

    한편으론 찝찝했다.

    시스템의 오류를 일으키는 능력이니 말이다. 자주 사용하면 어떤 심각한 데미지나 제약을 입게 되지 않을까?

    모르겠다.

    당장에는 이 흐름을 유지시키는 것을 연습하고 시간을 정지시키는 것이 껄끄럽다면 마나를 자신의 어느 부분에 효율적으로 덧입혀 사용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봐야 한다. 더 깊이, 더 깊이 들어가면 알 수 있을까?

    “…듣고 있냐?”

    엘라가 정혁의 어깨를 툭 치자 그때서야 심각한 고민 속에 있던 정혁이 정신을 차렸다.

    엘라는 한숨을 푹 쉬고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무슨 말을 해 줘 봐야… 결국 너는 태생적으로 얻어맞으면서 죽을 고비를 넘겨야 뭔가를 깨닫는 타입인가 봐.”

    엘라의 말에 뭐라 대꾸해 보지도 못하고 정혁은 동굴 깊숙이 점점 자신의 몸을 억누르는 마나의 무게를 느끼며 걸음을 옮겨 갔다.

    ***

    “안…나라고 했었나?”

    제논의 본성 지하의 어딘가.

    안나가 비밀리에 마련해 둔 사방이 최고급 차단 마법으로 이루어진 넓지 않은 방에 두 명의 남자와 안나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다.

    한 명은 테이블 위에 두 다리를 올려놓고 의자에 앉아 포도 한 송이를 통째로 든 채 한 알갱이씩 입안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이 남자의 불편하고 건방진 태도는 신경도 쓰지 않고서 안나와 또 다른 남자는 긴장을 유지하며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요. 저는 성함조차 모르는데 저를 알고 계시는 군요?”

    “내가 알려줬지, 바보야.”

    “유르겐.”

    안나가 유르겐을 흘깃 보자 유르겐은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포도를 먹는 데 다시 열중했다.

    “리안에게 어느 정도 듣긴 했다만 확실히 저 녀석보다는 생각이 있어 보여 다행이네.”

    남자는 유르겐에게 시선을 거두면서 말했다. 유르겐은 흥 하는 소리를 한번 내곤 포도를 든 채 의자에서 사라졌다.

    “금방 돌아올 겁니다.”

    “그래, 그런 녀석이니까.”

    안나의 말에 남자는 담담한 목소리로 동의하고는 조금 더 의자를 당겨 앉았다.

    남자는 회색 비니를 쓰고 있었다.

    양손에는 낡고 해진 붕대가 촘촘히 감겨있었고 회색 두터운 가디건 같은 것을 몸에 걸치고 있었다.

    가디건 안으로 그의 상처투성이 상체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무슨 체육복 같은 하의를 입고 있었다.

    남자의 얼굴은 별다른 특별한 점 없이 깔끔했다.

    몸에 비해서는 말이다.

    갈색 눈동자에 오밀조밀 자리 잡은 눈코입 그것이 다였다.

    다만 짙은 눈썹이 인상적이긴 했다.

    “로만이라고 하네. 오아시스의 침묵이지.”

    독특한 칭호였다. 오아시스의 침묵이라니.

    오아시스의 마법사 리안

    오아시스의 강탈자 유르겐

    오아시스의 지략가 안나

    오아시스의 대장장이 정혁

    어느 정도는 자신의 능력을 유추할 수 있었던 그들이었는데 오아시스의 침묵은 도대체 무슨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예측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까지 그의 행보를 돌이켜 보면 침묵이라는 단어가 기가 막히게 잘 들어맞는다고 안나는 생각했다.

    이로써 여섯 번째 리사이클을 막을 수 있는 핵심 키가 다 모이게 되었다.

    정작 가장 큰 힘을 가진 리안이 저 모양이긴 하지만 E와의 대화를 통해 걱정을 다소 덜 수 있게 되었다.

    지금부터가 시작인 것이다.

    지금부터 이 지루하고 길었던 전투의 화려한 마지막 장을 열 수 있는 것이다.

    “적절한 타이밍에 정혁을 도와줬다고 들었습니다.”

    “한, 그 망나니 말이지?”

    “…예, 알고 계시군요?”

    “아무도 모르는 곳에 아무도 모르게 숨어 있었지만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과 누구도 알지 못할 사실까지 단 하나도 놓치지 않았던 시간들이었네.”

    로만의 화법은 상당히 특이했다.

    로만의 두 손에서 회색빛 마나가 일렁였다. 안나는 가만히 그 마나를 바라보았다.

    무겁고 짙으며 어두운 힘이 느껴졌다.

    “침묵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마치 모든 것을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 그러다가 모든 것에 빈틈이 생기고 그 빈틈에 가능성이 더해지는 순간이 생긴다면 긴 침묵 동안 쌓인 모든 것들을 쏟아붓게 되는 거야.”

    그의 마나가 양 손 사이에서 모였다가 푸르륵 하며 소멸했다.

    “그때가 지금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안나의 물음에 로만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르겐이 찾아오길 기다리고 있었어. 올 때가 됐다고 생각했지. 한, 그가 세계에서 사라졌을 때 한 번, 그리고 정혁이 다시 세계에 등장했을 때 또 한 번, 오아시스의 시스템이 큰 파동을 일으켰다네. 자네도 느꼈을 거야. 이유를 몰랐겠지만.”

    안나는 어렴풋이 그때를 떠올렸다.

    그래, 마치 지진처럼 전체의 시스템이 진동하던 때가 두 번 있었다.

    “이제까지의 모든 흐름은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있었다네. 그 규칙은 이 세계를 유지시키는 데 매우 엄격하고 완고하게 적용되어 왔지. 바이러스를 잡는 자들, 검은 말 조직. 그들의 힘으로 이 규칙은 완벽히 유지되고 있었고 이 규칙에 오류가 생기면 그들에 의해 세계는 초기화되었어. 시간이라는 것은 대개 모든 것들을 무뎌지게 하니까 말이야.”

    “리사이클, 그들 말론 리셋 말이죠?”

    “그래. 리안, 나, 유르겐, 너까지 경험한 리사이클의 순간이 얼마나 지랄 같은지 알기에 우리는 그것을 막아 보려 했다만, 어땠지?”

    “…실패…했죠.”

    안나가 모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짧게 대답했다. 그리곤 고개를 들어 로만을 노려보며 말했다.

    “다섯 번째엔 당신이 돕지도 않았구요.”

    그녀의 말에 가시가 돋아 있음을 로만은 느꼈음에도 그는 짧게 고개를 저었다.

    “정확히는 세 번째부터야. 그때부터 나는 내 칭호가 가진 ‘침묵’의 의미를 알았고 리사이클을 막기 위한 우리의 사명에 동참하지 않았네.”

    “…그게 무슨! 비겁한 자기 합리화 아닌가요?”

    안나가 발끈했다.

    하지만 로만은 참착하게 대답했다.

    “내가 빠졌기 때문에… ‘녀석’은 결국 무리하면서까지 정혁을 불러낼 수 있었잖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