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25화 (125/200)
  • ◈125화

    하나는 거의 살해 협박에 가까운 뉘앙스의 짧은 편지였다.

    [더 이상의 개입은 그만둘 것. 상당히 불쾌한 제논의 적대적 행위는 곧 거대한 화를 불러일으킬 것.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면 우리가 손수 제논을 불바다로 만들겠음. -안도리니]

    국가의 성격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글이었다.

    욘마곤이 거의 악마들의 손에 집어삼켜질 때까지 뒷짐 지고 자국의 영토 수호에만 몰두하던 놈들이 이제 와서 이렇게 자신들의 권한과 힘을 적의를 가지고 드러내고나 있다니 말이다.

    김창수는 편지에 침을 한 번 뱉고 구겨서 버려 버렸다.

    다음은 그나마 정중한 뉘앙스의 무게 있는 경고였다.

    [욘마곤을 수호해 주신 제논 연합에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하지만 속히 다시 카탈 대륙으로 돌아가 주시기를 권고합니다. 잔여 악마 세력은 저희가 별동대를 꾸려 처리하고 욘마곤의 재건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일주일의 시간을 드릴 테니 저희의 선의에 긍정적으로 화답해 주시기를 부디 기대합니다. -에도라]

    김창수는 그 편지 역시 고이 접어서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그러곤 자신이 읽었던 내용들을 다시 정리해 안나에게 전송시켜 주고 삐걱이는 의자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걸어갔다.

    김창수가 쉬고 있는 이 임시 건축물은 ‘임시’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견고하며 3층으로 건축된 고풍스러운 나무 집이었다.

    그는 지금 제일 3층, 자신의 작은 집무실에서 골치 아픈 서류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정혁의 부재로 많은 일들이 자신의 책임으로 돌아왔다.

    지금 이 시국에 그의 부재가 다른 연합원들이 바라봤을 때 유쾌하지 않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김창수는 오히려 반대였다.

    그가 강해야만 우리가 살아남는다.

    이 명백한 사실은 이번 욘마곤 전투를 통해 여지없이 드러났다. 정혁은 강했다. 어쩌면 ‘한’만큼이나 강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겠다.

    다만 어떤 이유에 의해서 그는 대장장이로 재시작하게 되었고 이는 그에게 큰 페널티가 되고 있다.

    전투 계열과 비전투 계열의 힘의 차이는 심각하다.

    본래 직업으로부터의 자유도를 보장하는 오아시스이긴 하지만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개인의 직업을 선택하게 되고 이 선택을 통해 캐릭터는 점점 그 직업군에 맞게 초점이 맞춰져 간다.

    여기서 초점이라는 것은 결국 개인의 능력치를 이야기하는데 정혁은 이 당연한 흐름을 완전히 거스르고 있는 것이다.

    대장장이라는 직업을 얻고 그와 관련된 칭호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대장장이가 자꾸만 전투의 최전방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그의 여러 특성들이 이를 대변해 준다.

    그가 싸울 때 자주 사용하는 두 망치도 결국은 뭔가를 제련하고 채광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 망치가 아닌가.

    신체 능력을 상승시켜 주는 스킬 역시 광물을 채굴할 때나 필요한 스킬이다.

    이런 스킬들을 이용해서 전투를 나서는 그이기에 전성기 시절의 ‘한’보다 더 뛰어난 힘과 능력을 가지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외적으로 비슷하다 견줄 순 있어도 결코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어쩌면 그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을 터.

    자신의 한계를 이번 전투에서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기에 그는 자신의 부족함으로 인해 벌어진 여러 자존심 상하는 광경들을 보고 힘을 키우기 위해 사라졌을 것이다.

    김창수는 분주히 움직이는 바깥의 제논 병력들을 바라보며 깊은 숨을 들이 쉬었다.

    카탈과 타이런은 완전히 다른 국면이다.

    저들의 경고를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화는 나지만 어쩔 수 없다. 결국 압도적인 강함. 그것이 제일이다.

    이 과도기를 지나 욘마곤을 제논 연합의 땅으로 만들고 안도리니든, 에도라든,

    저들과 대립할 수 있도록 하려면 정혁의 안전한 복귀가 시급하다.

    부디 빈손으로 돌아오는 일은 없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

    “안 해! 안 한다고!”

    짝-!

    벌써 30번째.

    엘라에게 얻어맞은 뺨 마사지의 횟수다.

    처음엔 고분고분 그래도 자신의 선에서 예의를 지켜 가며 정혁에게 마나의 흐름에 대해 가르치던 엘라는 금세 한계를 느껴 버렸고 더 이상 내부로 계속해서 들어가는 것을 포기한 채 정혁을 붙잡고 다시 마나에 대해 교육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정혁이 마나에 대해 번뜩이는 깨달음을 얻을 리 만무했다.

    이때부터 엘라의 손찌검이 시작된 것이다.

    신체 능력이 70% 제한된 정혁은 엘라의 따귀를 맞을 때마다 바닥을 드러내는 HP에 대한 공포와 극한의 고통을 느끼면서도 이빨을 깨물고 다시, 다시 마나의 흐름을 동굴의 흐름과 맞추려는 노력을 다했다.

    그러다 결국 포기한 것이다.

    정혁은 엘라의 따귀를 맞고 동굴 벽에 처박혔다.

    한참, 그 울림이 동굴 벽을 타고 흘러갔다. 정혁은 벽에 박힌 채로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엘라는 팔짱을 끼고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러다 그에게 회복 마법을 걸어 주곤 천천히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찡찡거리지 말고 일어나.”

    정혁은 한숨을 쉬면서 그의 손을 외면했다.

    애초에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마나를 활용한 직업군들이 신체적인 힘을 쓰는 직업군들보다 월등히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정혁이 이런 부분에 소질이 있었다면 진즉 피로 전신을 떡칠해야 하는 암살자보단 고급진 마법사를 했을 것이다.

    손가락 까딱하면 넓은 범위의 공격을 퍼부을 수 있으니 말이야.

    하지만 정혁은 알고 있었다.

    그는 마나를 사용하고 마법을 연계해서 활용하는데 젬병이라는 것을 말이다.

    마나의 연계와 마법의 방정식은 꽤 어려운 흐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빈틈을 잘 찾아 메우고 또 그것을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것은 개인의 지적 능력에 달려 있다.

    정혁은 소위 말해 이런 부분이 많이 부족했다.

    복잡한 건 딱 질색이었고 뿐만 아니라 수학이니 물리니 따위의 골치 아픈 지식들은 무조건 꺼려했다.

    그런데 지금 이 꼴이라니.

    수십 번 얻어맞으며 시도해도 잘 되지 않는다.

    마나석 동굴 내부에 흐르는 이 마나의 흐름에 자신의 마나의 흐름을 맞춰야 시스템의 제약을 회복할 수 있고 더불어 자신의 마나를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아, 좀 쉬운 방법 없어?”

    정혁이 흙무더기의 흙을 쥐고 바닥에 거칠게 집어 던지며 투덜거렸다.

    엘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리쳤다.

    “아니, 이보다 더 어떻게 쉽게 가르쳐!”

    그녀는 아까의 진동으로 지면에서 솟구쳐 오른 마나 지렁이 두세 마리의 머리를 으깨 버렸다.

    분풀이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정혁은 으깨지는 마나 지렁이를 보며 온몸에 소름이 돋아 오름을 느꼈다. 그녀는 분명 저 마나 지렁이에 정혁을 대입했을 것이다.

    “느끼라니까? 네 몸에 있는 그 마나의 흐름과 지금 외부에서 온몸을 감싸고 도는 동굴의 마나를 느끼고 그 사이 빈 공간에 너의 마나를 주입해서 흐름이 전신을 타고 원활히 돌게 만들라고!”

    “아씨! 그게 안 된다고!”

    “하… 돌아 버리겠네.”

    엘라가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며 인상을 구겼다.

    그에 맞받아치듯 정혁도 소리쳤다.

    “나도다! 나도!”

    어느 정도 회복된 정혁이 볼을 만지며 몸을 일으켰다.

    엘라의 말만 들어 보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닌 것 같은데 몸 안에 도는 마나와 외부에 흐르는 마나를 느끼는 것까진 가능해도 그 사이의 공간에 자신의 마나를 연결시키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자, 선생님? 자. 우리 진정합시다. 진정하고.”

    정혁은 심호흡을 하며 엘라에게 진정하라는 듯 손짓을 했다.

    그러곤 손가락을 살짝 들어 잠깐 시간을 달라는 제스처를 취한 뒤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자 정혁의 가슴에서 황금빛 마나가 몽글거리며 피어올랐다.

    그것은 정혁의 전신을 감싸고 있던 푸른 동굴의 마나를 밀어내고 주변으로 퍼져 갔다.

    그 다음이 바로 두 마나가 함께 융합되는 것이다.

    그래야만 융합된 마나가 정혁의 전신을 타고 흐를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지금의 엘라처럼 마나가 전신을 뒤덮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몸을 통과해 나가는 것 같은 모습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정혁은 마치 물과 기름의 사이 처럼 두 마나가 융합되지 못하고 있다.

    엘라는 그 모습을 보며 진저리가 난 것처럼 몸을 떨었다.

    그때였다.

    엄청난 울음소리가 동굴 전체를 울렸다.

    눈을 감고 있던 정혁이 깜짝 놀라 몸을 움찔했고 마나는 전부 흩어져 버렸다.

    엘라 역시 날카롭게 소리가 난 동굴 저 안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싱긋 웃으면서 정혁을 보았다. 정혁은 그녀의 미소가 뭔가 찝찝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론 느꼈다.

    “내가 말이야, 너를 꽤 오래 봤잖니?”

    “…그, 근데?”

    “너는 꼭 죽을 때쯤 돼야 뭘 좀 하더라구.”

    “…? 무슨 소리야?”

    “뭐, 적당한 기회가 찾아왔구나, 싶어서.”

    “적당한 기회?”

    엘라가 고개를 까딱하며 동굴 안쪽을 가리켰다.

    엘라를 보고 있던 정혁은 빳빳히 굳은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돌려 동굴 안을 보았다.

    그곳에는 이제까지 등장했던 마나 지렁이들과는 차원이 다른 마나석 골렘 셋이 전신에 뒤덮인 푸른 마나석을 번뜩이며 위풍당당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쟤들, 물리 공격 면역이다?”

    “시… 시팔….”

    정혁이 고개를 저으며 자신을 조롱하는 듯이 신나 보이는 엘라의 말에 욕지거리로 화답했다.

    “너도 잔머리가 꽤 있는 놈이니까 알겠지만 네가 본능적으로 해 오던 모든 능력들은 모두 네 자신의 마나에 기반 한 거야 알지? 근데 지금 그 기본적인 마나도 외부 마나에 의해 막혀 버린 상황에선 어떨까?”

    엘라의 말이 맞다.

    채광 활성화도 스킬이다. 스킬은 곧 마나와 직결된다. 대장간을 열고 에고장비들을 활성화시키는 것. 역시 스킬이다.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신체 능력을 올려 주고 강하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스킬이 아니라 그저 스스로의 능력이었다고.

    하지만 모두 마나를 활용한 스킬이었다.

    오아시스 전체에는 공기처럼 마나도 흐른다.

    개인이 가진 기본적인 마나는 외부의 마나와 공명해서 몸 안으로 흡수되어 어떤 스킬이나 능력으로 활용된다.

    정혁이나 ‘오아시스’라는 칭호를 가진 특수한 플레이어들은 특별한 마나의 색을 가지나 나머지는 환경에 따라 외부와 자연스럽게 융합되어 그 색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지금은? 외부의 마나의 농도가 깊고 무거운 이 환경 속에서 마나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스탯과 연결된 대장 기술 숙련도가 만땅이라고 해도 대장장이인 빌어먹을 스탯채로 저들과 붙어야 한다.

    “…나 죽을걸?”

    정혁이 이 캐릭터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처절하고 비굴한 표정을 한 채 엘라를 바라보며 애걸했다.

    “알 바니?”

    엘라는 차갑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골렘들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혁은 엄청난 무기력감을 느끼고 있었다. 당황스러웠다.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엘라는 여전히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정혁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골렘들이 지척에 다다르자 엘라는 아주 뒤로 물러나 버렸다.

    그리고 정혁에게 골렘들의 주먹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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