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24화 (124/200)
  • ◈124화

    “…말이 좀 심….”

    “아니, 그렇잖아. 마나도 잘 쓸 줄 모르면서 신체 능력만 믿고 여기 와서 덤빈 또라이가 한둘이겠냐고. 어느 정도 마나를 잘 사용할 수 있어야 가서 마나석 동굴 안에 흐르는 마나와 결을 맞추고 안에 있는 그 멍청이 하고도 싸울 수 있을 거 아니에요!”

    “그, 반말을 할거면 하고, 존대를 할거면….”

    “지금 중요한게 그게 아니라니까? 아니, 아린은 이 정도로 약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아, 이상하네요.”

    정혁은 하마터면 주먹을 날릴 뻔했다.

    뭔가 알 수 없는 울화통이 속에서 끓어올랐다.

    이런 기분은 참 오랜만이었다.

    아, 하늬안을 처음 만났을 때, 이 정도의 기분이었다.

    정혁은 간만에 최고의 빌런을 만났노라 생각했다.

    아린만 아니었어도 진즉에 한 방 날렸을 텐데. 아쉽다고 생각했다.

    “얘.”

    순간.

    정혁은 익숙한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틀었다.

    그곳엔 엘라가 있었다. 이프는 갑자기 등장한 거대한 자연의 존재에 화들짝 몸을 떨더니 당황한 듯 동공이 흔들렸다.

    “어…어? 예? 아, 예? 어떻게 여기에? 에?”

    “너 말투가 상당히 거슬린다?”

    엘라가 이프에게 휙 하고 날아가 그녀의 주변을 배회하며 날아다녔다.

    그녀의 컨디션은 상당히 좋아 보였다.

    그에 반해 이프의 표정은 시시각각 사색이 되어 가고 있었다.

    “하여튼 나이트 엘프들이란. 인간 냄새가 많이 묻어서 더 그런가? 왜 이렇게 저급하니?”

    ‘역시. 이 구역의 끝판왕.’

    정혁은 알 수 없는 든든함에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꼈다.

    “에, 엘라? 적당히 해. 괜찮아.”

    오히려 정혁이 그녀를 말렸다. 엘라는 정혁을 돌아보며 윙크를 살짝 했다.

    ‘세상에,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저 녀석한테 이런 식으로 도움을 받을 줄이야.’

    “걱정하지 마, 여기만 아니었어도 너 정도는 그냥 반으로 갈라 버렸을 녀석이니까. 마나석 동굴쯤은 어렵지 않게 돌파할 거야. 가 봐 이제, 귀찮게 하지 말고.”

    이프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구덩이를 허겁지겁 올라갔다. 그녀도 엄연히 나이프 엘프이기에 자연의 위대한 존재들 앞에서는 자연스럽게 주눅 들 수밖에 없다.

    정혁은 구덩이 정상에 올라 잠깐 뒤를 돌아본 이프를 발견하곤 빙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이프는 그의 손 인사에 반응 없이 빠르게 숲속으로 사라졌다.

    통쾌했다.

    ‘그나저나 엘라는 갑자기 이곳에 왜?’

    “리안은 어쩌고?”

    “좋아질 것 같아서.”

    여전히 퉁명스럽지만 그 안엔 정혁에 대한 걱정과 염려가 담겨 있음을 그는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가장 긴 시간 함께한 에고 장비 아닌가.

    극악의 성격차이에도 불고하고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며 지낸 시간이 길다. 이젠 그녀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라테에게 들었어. 녹턴 님과 룬다나 님도 만나 뵀고. 어울리지 않게 무슨 마나의 영역까지 손을 뻗쳐 보겠다고 이 난리인 거야.”

    엘라는 마나석 동굴을 힐끔 바라보며 정혁에게 핀잔을 주었다.

    “아니, 진짜 리안 상태는 어떤데?”

    정혁이 재차 묻자 엘라는 말없이 한참 정혁을 바라보았다.

    “…글쎄, 잘 모르겠어. 신체의 모든 부분은 완전히 회복되었고 몸 전체에 흐르는 모든 기운도 정상인데 깨어나질 않아. 마치… 뭔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깨어날 때를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어.”

    “기다리고 있다고?”

    “그래. 리안은 계속해서 주변의 마나를 흡수하고 있어. 그 때문에 더 그런 생각이 들어.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힘을 위해서 지금은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 같은. 안나, 그 여자가 리안에 대한 마음은 진심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믿고 이곳으로 올 수 있었던 거야.”

    “…내가 위험할 때 리안이 위험하면 어떡할 거야?”

    진지한 엘라를 보자 장난을 치고 싶어 던진 불쾌한 질문 때문에 정혁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좀 떨어져 있었더니 감이 줄어든 모양이다.

    “넌 어떻게 변하질 않니?”

    엘라는 주먹을 들었다가 입술을 깨물며 내려놓았다. 그러곤 손을 탁탁 털면서 말했다.

    “어쨌든 라테보다는 내가 이쪽 마나에 더 밝은 편이니까, 동굴 끝까지 동행할게. 그러면서 배워. 네 마나를 잘 사용하는 방법을. 저 무슨 대장간 열고 닫고 하는 데에만 쓰지 말고. 무슨, 멍청이도 아니고 그런 마나를 그런 식으로밖에 사용 못 하냐.”

    “어허, 조용 조용.”

    둘은 천천히 마나석 동굴 안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마나석 동굴 안으로 진입합니다. 대형 던전에 진입합니다. 플레이어는 던전이 묶입니다. 신체 능력이 70% 제약됩니다.]

    그는 이 빌어먹을 알람 창을 얼른 치워 버렸다.

    푸른 마나가 전신을 뒤덮고 신체는 급격히 지쳐 갔다.

    엘라는 정혁을 돌아보며 말했다.

    “자, 일단 너의 마나와 이 동굴의 마나, 그 결을 맞추는 연습부터 하자. 그래야 지금보다는 훨씬 편안하게 신체 능력을 끌어올릴 수 있을 거야.”

    “…으…. 불편하네.”

    정혁은 고개를 저으면서 엘라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

    “에트론?”

    라테가 대장간으로 돌아왔을 때 에트론은 응접실 한 군데에 앉아 날개를 축 늘어트리고 손톱을 물어뜯으며 덜덜거리고 있었다. 그의 곁으로 조 패더럴이 모루 망치를 빙글빙글 돌리며 다가왔다.

    “왜 저런 상태지?”

    라테가 조심스럽게 묻자 조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글쎄요. 아까 정혁이 불렀을 때 호기롭게 안 나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저 상탭니다.”

    “불렀는데 안 나갔다고? 왜?”

    라테의 물음에 조는 다시 한번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엔 미소가 완연했다.

    뭔가 분명히 아는 눈치였지만 숨기는 것 같다고 라테는 생각했다.

    조심스럽게 에트론에게 다가갔지만 에트론은 별다른 반응 없이 바닥에 깔린 카펫을 보며 뭔가를 반복적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왜, 왜 더 안 부르시는 거지? 왜지? 엘라 님께서 분명 내 이야기를 대신 전해 주셨겠지? 날 옹호해 주셨겠지? 아니, 그럼 나를 부를 때도 되셨는데? 당당히 등장해서 이제 도와드리면 되는데? 왜 안 부르시지? 왜지? 나 죽는 건가? 이렇게 얻어맞고 죽는 건가? 그렇게 되는 걸까? 아, 이 중간계에서 내 인생은 마감되는 건가…?”

    라테는 그 중얼거림에 뭐라 대꾸하지 못하고 조용히 대장간의 화로 안으로 몸을 숨겼다.

    뭔가, 에트론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

    욘마곤은 녹턴과 룬다나 덕분에 엄청난 속도로 회복되고 있었다.

    욘마곤의 전체 인구 중 상당수가 죽거나 도망쳤지만 남은 부족들과 여러 종족들, 그리고 욘마곤에 신세를 지고 있던 플레이어들, 여러 무역 집단들도 겨우 살아남아 욘마곤 각 지역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악마들과의 혈투가 벌어졌던 해안가의 넓은 평야 지대에는 ‘격전의 해안’이라는 별칭이 붙었고 이 격전의 해안의 주인은 제논이 되었다.

    제논은 그곳에 전초기지 그 이상의 규모로 거대한 지구를 만들어 확장했다.

    이에 대해 녹턴과 룬다나는 어떤 불평도 하지 못했다.

    녹턴과 룬다나의 하위 정령들이 욘마곤의 남은 대지를 모두 정화시키고 또한 악마의 흔적을 쫓았으나 이제 더 이상 욘마곤의 대지에는 악마의 지독한 향이 남지 않았다. 일부분을 제외하곤 말이다.

    아크와 그 군주들이 직접적으로 머물렀던 곳은 아무리 힘을 쏟아부어도 저주받은 땅이 회복되지 않았다.

    그곳은 그대로 둘 수밖에. 녹턴과 룬다나의 정예 정령들이 근처에 진을 치고 둥글게 주변에 경계막을 쳤다.

    내부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언데드들이 땅을 뚫고 올라와 자기들끼리의 전투를 벌였다.

    그 저주받은 땅이 다시 욘마곤 주변을 타락시키지 못하게 막는 것이 최선이었다.

    만약 다시 악마들이 타이런 대륙을 침공한다하더라도 분명 이 저주받은 땅을 기점으로 침입할 것이 뻔했기에 녹턴과 룬다나는 이 땅을 도대체 어떻게 정화해야 할지 고민중이었다.

    안젤리나는 욘마곤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그녀가 욘마곤을 떠나기 전 김창수를 잠시 만났었다는 풍문만 떠돌 뿐이었다. 제논의 수뇌부는 드웨이크의 상태 호전에 힘을 쓰고 있었다. 드웨이크는 회복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김창수는 그를 놓아 주자고 재차 안나에게 이야기했지만 왜인지 안나는 계속해서 그를 붙잡아 두고 싶어 했다.

    김창수 입장에서는 너무나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전신 마비에 코마 상태다. 어차피 시스템상 며칠이면 그는 자연적으로 사망처리되어 로그아웃될 것이었다. 치유 계열의 최고위 마법사를 불러서 회복시켜 보려 한들 어차피 그의 상처는 이미 허용 가능한 범위를 넘어섰다.

    이럴 바엔 하루라도 빨리 로그아웃시켰다가 1년 뒤 다시 게임에서 만나면 될 것 아닌가?

    그러나 안나는 세부적인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김창수의 의지를 계속해서 꺾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평소답지 않다고 생각했다. 요즘 들어 계속 뭔가에 쫒기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다. 시간이 없다고 느끼는 것 같다.

    혼자서 많은 것을 짊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숨기는 것이 분명 있어 보이는데 그가 안나를 자신의 책사로 삼고 지금까지 그녀를 겪어오면서 처음 느끼는 불안정함 이었다.

    수상한 남자가 끝내 죽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그의 마지막을 안나가 함께했다곤 하지만 외부 차단막에 의해 누구도 둘의 대화를 엿듣지 못했다고 한다.

    김창수는 이 부분도 상당히 껄끄럽고 불쾌했다.

    정혁 다음이 자신이다. 아무리 그가 관대한 사령관이라지만 그에게까지 숨기는 정보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녀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또 당장에 그녀에게 달려가 자초지종을 물을 수 없기에 보류해 놓고 있지만 조만간 담판을 지으려는 마음을 김창수는 단단히 먹고 있었다.

    하늬안은 드웨이크를 적극적으로 보살피고 있지만 그녀 역시 드웨이크에게 남은 시간이 길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김창수의 말대로 그녀도 드웨이크를 이만 현실 세계로 로그아웃시키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하는 상황 때문에 의아해하고 있을 뿐이었다. 김창수에게 재차 물었다가 오히려 그의 불편한 기색을 느끼곤 더 이상 묻기를 멈췄다.

    그저 점점 생기를 잃어 가는 드웨이크를 보며 안타까움에 한숨을 쉴 뿐이었다.

    타이런 대륙에 진입하고 욘마곤 전투에서 결국 승리했지만 제논의 수뇌부는 시간이 갈수록 살얼음판을 걸어가는 모양새가 되어 가고 있었다. 김창수는 이런 과정의 결말을 너무도 잘 알기에 정혁이 돌아오게 된다면 어서 서로 간에 숨기는 모든 일들을 상세히 밝혀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드웨이크의 빈자리는 왈로가 대신했다. 왈로는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드웨이크의 무기를 전달받아 레이드 팀을 인솔했다.

    욘마곤의 새로운 몬스터의 등급을 나누고 두 정령왕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제논 지구에 도움이 되는 여러 아이템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욘마곤 땅에서 제논은 그렇게 단계별로 성장해 나가고 있었다. 불안정한 마음을 숨긴 채 말이다.

    그즈음 김창수는 위협적인 전갈을 동시에 두 곳에서 전달받게 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