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23화 (123/200)
  • ◈123화

    살 떨리는 진동이 피부에 전해진다.

    숲에 잔뜩 깔린 어둠이 푸르스름한 빛에 의해 걷어지는 지역까지 나아간 정혁은 우뚝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구덩이가 보였다.

    마치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만 같은 구덩이였다.

    구덩이의 중앙에서는 푸른빛이 계속해서 뿜어져 나오고 있다.

    이 푸른빛은 마치 정신을 갉아먹으려 드는 것만 같이 위협적이다.

    몸의 힘이 전부 빠지고 잃어버린 힘이 메꿔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다 온 것이다.

    저 구덩이 아래엔 그 마나석 동굴이 있는 것이다.

    구덩이 주변에 여러 건축 자재들과 불법 채굴꾼들의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엄청 오래되어 낡아 있었다.

    섣불리 덤빈 자들은 모두 사망의 골짜기를 걸어야 했으리라. 정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마나석 동굴에 근접했습니다. 현재 외곽 지대. 플레이어의 전체 능력이 50% 감소합니다.]

    불쾌한 시스템의 알람 창이 얼굴을 가렸다. 정혁은 재빨리 그것을 걷어내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이프, 그녀의 제안은 꽤 흥미로웠다. 왜인지 모르나 이프는 본능적으로 느꼈다고 한다.

    어느 순간 흩어진 엘프 종족들을 모두 규합할 진정한 왕이 이 땅에 나타났음을.

    그녀는 타고난 직감과 배워 터득한 여러 기술들로 그녀가 노예처럼 부려지던 제국에서 탈출해 먼 대륙 카탈까지 어떻게든 찾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린이라는 어린 은행나무 엘프의 왕을 만난 것이다.

    그녀는 이 어린 엘프 왕이 전 대륙의 모든 엘프들의 왕이 될 자라는 것을 보자마자 깨달았다.

    그리고 그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 직전인 나이트 엘프,

    그 본연의 땅에 데리고 가고 싶었다.

    그의 힘이 이 땅에 잠들어 있는 나이트 엘프 선조들을 모두 깨울 것이라고 믿었다.

    죽어서 완전히 소멸되는 것이 아닌 숲의 영혼으로 유일하게 잔존할 수 있는 나이트 엘프들의 특성상 잠들어 있는 선조들의 눈을 뜨게 해서 나이트 엘프를 다시 일으킬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려면 아린 국왕과 그의 군대가 이곳으로 넘어올 수 있어야 했다.

    중앙해를 넘는 대형 포탈은 엄청난 힘을 필요로 한다.

    게다가 민감한 나이트 엘프들은 포탈의 힘에 이끌려 당연히 그녀를 공격할 것이었다.

    이 모든 일을 완성시키려거든 조력자와 마나석이 반드시 필요했다.

    “자식, 그렇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소개시켜?”

    정혁은 마나석 동굴을 향해 걸어가며 피식 웃었다.

    카탈 대륙의 방어 전선은 완벽히 정립된 상태다.

    제논의 통제에 따라 박달수의 노련한 치안대가 대륙 곳곳에 퍼져 빠른 정보 전달을 기반으로 순식간에 전 대륙의 치안을 장악했다.

    본래 하늬안의 수비대는 카탈 대륙의 혹시 모를 위협에 대비해 남겨 두고자 했지만 욘마곤의 상황이 원활하게 풀리지 않아 제논 본성 정예 수비 병력을 남겨 두고 모두 욘마곤으로 이동하는 중이다.

    이런 상황을 파악하고 있을 아린에겐 갑작스레 나타난 우호적인 나이트 엘프의 요청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욘마곤엔 정혁의 병력이 이미 주둔하고 있지 않은가?

    아린에게도 큰 꿈이 있을 터. 녀석이 정혁을 소개시켜 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가 아는 가장 강한 플레이어였을 테니 말이다.

    제논의 병력들이 지속적으로 왔다 갔다 하고 있는 포탈은 정령왕들의 힘에 의해 유지되고 주변에 포탈을 보호하는 병력들이 많기 때문에 걱정 없지만 사방에 적밖에 없는 이 마나석 동굴 근처의 숲은 포탈을 유지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정혁은 가파른 경사를 스윽 스윽 두 다리로 밀며 내려갔다.

    거대한 구덩이 끝 저 아래엔 푸른빛에 휩싸인 동굴의 입구가 마치 고대 괴수의 아가리처럼 넓게 열려 있었다.

    - 크구궁!

    미끄러져 내려가던 정혁의 좌우로 큰 진동이 일더니 주변 흙이 순식간에 무너지며 암석으로 온몸을 무장한 거대 마나지렁이 두 마리가 갑작스럽게 튀어나왔다.

    정혁은 두 망치를 소환해 손에 쥐었다.

    그러나 예전만큼의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고 몸을 틀어 두 녀석의 협공을 가까스로 피해 냈다.

    화염과 전력이 예전만큼 강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신체의 스피드와 완력도 예전만 못하다.

    확실히 마나석 동굴의 영향권에 들어온 것이다.

    정혁은 쯧 소리를 내며 눈썹을 몇 번 긁고는 어느새 모습을 숨긴 마나지렁이의 흔적을 찾기 위해 눈동자를 굴렸다.

    그때 우측의 흙더미가 작게 진동하는 것을 느낀 그가 전력의 망치를 흙 속으로 파묻어 강력한 전기 파장을 땅속으로 흘려보냈다.

    구덩이 전체에 번개와 같은 전기의 흐름이 퍼졌다.

    그러자 두 마나지렁이가 울음을 뱉으며 구덩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구덩이 전체에 숨어 있던 마나 지렁이 모두를 깨우고 말았다.

    “…아….”

    정혁은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으르렁거리는 마나 지렁이 수십 마리를 보며 작게 한탄했다.

    [어…저… 에트론?]

    [옙?]

    에트론은 평온한 목소리로 정혁의 전음에 대답했다.

    정혁은 자신의 앞으로 달려드는 마나 지렁이 수십 마리를 바라보며 재빠르게 몸을 움직여 틈을 만들어 내고는 소리 지르듯 전음을 날렸다.

    [그, 거, 지금 좀, 나와아아아아아아!]

    에트론은 그가 지금 상당히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음이 멈췄고 더 이어지진 않았다.

    에트론은 한숨을 쉬며 대장간에서 휙 날아올라 저 멀리 불타오르는 화로에서 담금질을 하고 있는 조에게 다가갔다.

    “저 나갔다 올게요.”

    “가는 건가? 왜? 한, 그놈이 불러?”

    “…예, 아마도 뭐, 상황이 좋지 않나 봐요.”

    “아니, 뭐, 지 혼자 해 보겠다고 한 거 아니었어?”

    “…그렇게 호기롭게 나가긴 했죠.”

    “그럼 놔둬. 그 뭐야, 너도 무기고를 지키는 창고지기고, 나도 무기를 만드는 입장인데 그, 어찌 보면 정혁 그놈도 대장장이란 말이야? 근데 녀석은 너무 그, 무기를, 장비를 아낄 줄 몰라. 안 그래?”

    에트론은 조의 말에 상당히 공감하며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가 망가트린 단검 두 자루는 아직도 제 모습을 찾지 못하고 있다.

    놀랍게도 조 패더럴이라는 이 이상한 차원의 남자는 천사들의 무기 역시 고칠 수 있었고 조에게 두 단검을 맡기자 조는 며칠에 걸쳐 단검과 천계의 마나를 일치시키는 작업을 했다.

    그러자 천천히 단검은 천계의 마나줄기와 링크되어 제 모습을 찾아 회복되고 있었다.

    만약 불가능했다면 상상도 못할 끔찍한 처벌이 천사장에게 내려졌을 것이다. 이 모든 사태를 누가 만들었는가.

    정혁 아닌가? 게다가 그렇게 혼자서 어떻게든 해 보겠다며 나갔다면 책임져야지. 안그래?

    에트론의 입이 씰룩거렸다. 조는 그런 에트론을 보며 빙글 웃었다. 금니가 있었다면 그 웃음에 더 많은 의미를 담았을 테지만 지금은 빈 이빨 덕분에 해괴해 보였다.

    에트론은 그런 조의 표정이 웃긴 건지 아니면 밖에서 고생하고 있을 정혁이 떠올라서 인지 조와 함께 키득거렸다.

    정혁은 하나하나 각개로 격파하면서 구덩이를 벌써 세 바퀴는 돈 것 같았다.

    다행히 지난 전투 이후 네 개의 염구가 남아 있었기에 정혁은 간섭 받는 마나의 흐름을 억지로 집중해 가며 염구의 움직임에 힘을 더했다.

    이전만큼 매끄럽게 컨트롤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염구는 염구였다. 마나 지렁이의 단단한 암석 외피쯤은 간단히 파고들어 녀석들의 심장을 꿰뚫었다.

    벌써 세 번은 에트론에게 전음을 보낸 것 같은데 대답이 없었다.

    금방이라도 달려 나올 것 같았는데도 불구하고 에트론은 무슨 일이 있는 건지 튀어나오지 않고 있다.

    아쉬운 김에 라테라도 부르고 싶었지만 이곳 근처에 들어오기 전 라테는 욘마곤 진지에 다른 정령왕들과 나눌 대화가 있어 이미 대장간을 나간 뒤였다.

    피하지 못한 마나 지렁이의 꼬리에 허벅지를 가격당한 정혁이 꼴사납게 회전하며 구덩이 한쪽으로 처박혔다.

    그는 입안에 밀려 들어간 모래를 거칠게 뱉어내며 인상을 구겼다. 50%의 감소 효과는 꽤나 치명적이었다.

    애초에 캐릭터의 기본 스탯이 엉망진창이었기 때문에 기댈 것은 채광 활성화 스킬뿐인데도 이 스킬조차 50% 감소 효과를 그대로 받고 있어서 전보다 현저히 느려졌다.

    “뭐해?!”

    그때 저 멀리서 이프의 외침이 들렸다.

    반가운 목소리였다. 정혁은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이프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구덩이 아래로 달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프의 등장에 놈들의 시선이 분산되었다.

    “에트론… 나오기만 해 봐라 진짜.”

    정혁은 인상을 구기며 두 망치를 다시 고쳐 쥐었다.

    군주 하나 정도는 무리 없이 골로 보낼 정도의 힘을 가진 정혁이다.

    아무리 50% 감소된 능력치라지만 여기서 무너질 리 만무하다.

    “너 강한 거 맞아? 확실해?”

    이프는 매끄러운 움직임으로 자신에게 달려드는 마나 지렁이 세 마리의 공격을 피해 내며 정혁에게 외쳤다. 정혁은 마침 자신의 정면으로 더러운 입을 벌리며 다가온 마나 지렁이의 머리를 으깨며 조용히 하라는 듯이 검지으로 입을 몇 번 쳐 댔다.

    이프가 가진 날카로운 군용 나이프가 손쉽게 마나 지렁이의 전신을 해체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의 총알은 마나 지렁이의 두터운 외피를 모조리 뚫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정혁은 곁눈질로 그녀의 움직임과 실력을 살폈다. 마치 자신과 같은 페널티를 입지 않는 것 같은 불쾌한 느낌이었다.

    이프 덕분에 손쉽게 마나 지렁이 무리가 정리되었다.

    이프는 손을 탁탁 털면서 정혁에게 다가갔다.

    정혁은 뭔가 뻘쭘하고 무안해서 양손의 망치를 재빨리 소환 해제시키고 염구를 모조리 품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곤 몸 여기저기에 달라붙은 모래들을 털어냈다.

    “아니, 무식하게 힘으로 전부 밀어붙이려고 했으면 저기서 못 나와요, 당신!”

    “…예?”

    이프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정혁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의 표정이 정말 모르는 사람의 얼굴이라는 것을 깨닫곤 이마를 탁치며 중얼거렸다.

    “아린, 그 양반의 말이 맞긴 한 거야…?”

    “…뭐, 뭔데요. 뭐가 중요한데요 그럼?”

    “마나석 동굴이니까, 마나를 써야지요!”

    순간 정혁은 안젤리나의 말이 떠올랐다.

    그새 잊고 있던 것이다. 물론 이 마나석 내부에 괴이한 존재를 만나기 위한 목적도 있긴 했지만 이곳에서 정혁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마나, 그 마나를 연마하기 위한 목적 역시 있었다.

    신체적인 능력은 ‘한’에 견줄만큼 강해졌다.

    앞으로는 그의 범위를 더 넘어설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직업 특성 때문에 정혁은 결코 피지컬로 ‘한’ 그 이상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정혁,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 마나.

    유르겐이 자신의 마나를 강탈해 사용했던 그 순간.

    잠깐이지만 느꼈던 엄청난 마나의 힘을 이곳에서 잘 연마하고 싶었던 것이다.

    “마나석 동굴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신체능력은 점점 떨어질 거예요. 아시죠? 그럼 그 신체 능력을 대신할 당신의 마나를 사용해야죠! 마나의 활용도는 정말 다양해! 적의 마나를 캐치해 어디서 달려드는지 알 수도 있고 치명타를 먹일 수도 있다니까? 무기에 묻히면 검날을 더 길게 늘어트리거나 총알의 단단함을 더 키울 수도 있지, 방금 봤지?”

    정혁은 속으로 이 여자가 제발 존대든 반말이든 하나만 해 주기를 바랐다.

    “…그, 그래. 그걸 배우러 여기 온 거야.”

    “배우러 왔다구요? 엥? 그럼 죽으러 온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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