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22화 (122/200)
  • ◈122화

    안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예측을 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지만 그녀와 동일한 생각을 이자가 하고 있었다는 것은 예측이 단순히 가설만은 아니었다는 뜻도 된다.

    그렇다는 건 이번을 마지막으로 리사이클을 끝내려는 그녀와 ‘오아시스’ 플레이어들의 의지가 실현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도 될지 모른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라고 한숨 쉬며 그 남자는 ‘오아시스’의 칭호를 받은 무게를 버리고 무리에서 달아났지만 유르겐의 설득에 의해 전장에 모습을 드러낸 것도 어찌 보면 이런 낌새를 느꼈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리안은… 이 거대한 흐름에 첫 번째 희생양이 될까?

    리안은 정신 차릴 수 있을까?

    “리안에 대해 걱정하나?”

    E가 안나의 눈치를 살피다가 물었다.

    안나는 흠칫 몸을 떨고는 한쪽 눈을 비비며 E를 보았다.

    E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고개를 저을 때마다 소멸되는 그의 신체 부위들이 떨어져 나가며 공중으로 흩어졌다.

    “그가 쓰러진 것 또한, 어쩌면 너희들 쪽에선 계획의 일부일 수도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결국 일어날 거야. 그가 없다면 너희가 감히 우리를 이길 수 있겠어? 아무리 그 녀석이 강하다 해도 말이야.”

    안나는 정혁을 떠올렸다.

    맞다,

    아직은 정혁에게 이 거대한 싸움의 소용돌이를 이겨 낼 힘은 없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성장세라면 곧. 곧 모든 사실을 밝히고 오아시스와 함께 전면전에 나설 수 있을 것이다.

    “…일어난다는 거지?”

    “그래, 걱정하지 말라니까. 아니, 나나 걱정해 주지 그래?”

    E는 흐릿한 손으로 자신의 몸을 가리키며 넉살을 떨었다.

    안나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E는 김이 샜다는 얼굴로 피식 웃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가 몸을 일으키자마자 급격히 그의 신체가 붕괴되어 갔다.

    마지막이… 임박해 보였다.

    “재밌는 앞날을 직접 보지 못해서 아쉽네.”

    “…그러게.”

    “새로 만들어진 E를 만나게 되면 가차 없이 밟아 주라구. 알았지?”

    “그렇게 할게.”

    E는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며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았다.

    안나는 밖의 결계 마법사들에게 짧은 전음을 보냈다.

    전음을 받은 결계 마법사들이 격렬히 그녀의 의견에 반대했지만 결국 전음의 내용은 그들에게 받아들여졌다.

    결계마법사들은 결계막을 투명하게 바꿨다.

    그리고 네모난 감옥의 공간을 공중으로 천천히 띄워 올렸다.

    두꺼운 지하의 공간을 투과해 감옥은 그대로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어둠이 걷히고 이내 밝은 하늘이 드러났다.

    제논의 위용넘치는 본성과 그 영토들이 한눈에 보이는, 그리고 저 바다. 물결에 부딪치는 햇살까지 완연히 보이는 높이에서 E는 눈을 감고 이 순간을 만끽했다.

    “안타깝고도 부러워,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뭐가?”

    “너희말이야. 이 아름다운 세상이 가상현실이라는 점과 너희의 실제 세상은 이 아름다움의 발끝도 따라오지 못할 것이라는 점. 그리고 애석하게도 너희는 그 실제 세상을 너무도 갈망하고 있다는 점. 이 무슨 아이러니냐.”

    “…네가 이해하지 못할 부분이야.”

    안나가 조금 착잡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래서, 부럽지. 산다는 것 자체를 진짜로 정의할 수 있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잖아, 가능성이 있잖아. 그….”

    E가 머리를 두드리며 말을 줄였다.

    안나는 이제 거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사라진 E를 보았다.

    녀석의 말대로 비록 무너진 세상이어도 실제 세상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그의 입장에서는 훨씬 부러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단순히 입력된 프로그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에.

    “사람이 언제 죽는다고 생각해?”

    안나는 그의 저 말이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어떤 대사에서 따왔음을 단박에 기억해 냈다.

    그러자 갑작스레 튀어나온 헛웃음을 미처 참지 못해 그녀는 입을 틀어막았다.

    “풉, 이, 이런 상황에서도 농담이냐?”

    “아냐, 진짜로. 그냥, 부탁이다. 부탁.”

    “…부탁?”

    E는 안나의 반응과는 달리 진지했다.

    “사람의 기억에서 잊혀질 때 진짜 죽는다던데, 나는 사람도 아니지만. 너만이라도 나를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

    “그렇게까지 해야겠어?”

    “…무리라면 어쩔 수 없지만 너희가 이 혁명을 모두 마치게 되면 나에 대해서도 꼭 언급해 줬으면 좋겠다는 거지. 그럼 나는 그냥 지워진 대체 프로그램 따위가 아니라 너희들의 승전사에 기록될 프로그램이 될 테니까. 그럼 난, 아마도 영생을 얻으, 프….”

    E는 그렇게 아련한 미소를 띈 채 허공으로 흩어졌다.

    공중에 솟아올랐던 감옥이 천천히 지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안나는 한참 E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

    전투를 피할 순 없었다.

    마나석 동굴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동굴에서 어떻게든 이득을 챙겨 보려는 여러 불법 채굴자 집단들과 정혁은 계속 부딪치게 되었다.

    정혁이 그들을 피할 이유는 없었다.

    불법 채굴자들 입장에서는 뜬금없이 기록에도 없던 놈이 나타났으니 앞뒤 가리지 않고 그를 공격할 수밖에 없었고 정혁은 그 모든 공격을 여유롭게 쳐내며 그들을 모두 압살시켰다.

    이미 축적되어 있었던 분노 덕분에 정혁의 공격은 다른 때보다 더 날카롭고 자비 없었다.

    에트론은 정혁의 대장간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의 부탁 때문이었다.

    정혁은 이번 여정에 사활을 걸었다. 여기서 더 성장하지 않는다면 다시 아크를 만났을 때뿐 아니라 다른 국가들과의 대립 속 변수에서도 쉽게 넘어가긴 어려울 것이다.

    아군에게는 관대한 그였지만 적군에게는 한없이 잔혹한 지도자가 되어야만 했다. 그것이 정혁에게 남은 ‘한’의 마지막 모습이리라.

    이미 불법 채굴자 집단 다섯 곳을 완전히 붕괴시켰다.

    더불어 마나에 취한 트롤 부족 지역과 땅속에서 끊임없이 튀어나오는 트로그들까지 모두 몰살시켰다.

    엄청난 마나석의 힘에 이끌린 나이트 엘프 집단을 만났을 때에야 정혁은 비로소 거침없는 진격을 멈출 수 있었다.

    마나석 동굴에 다가갈수록 점점 어두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었는데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나이트엘프.

    카탈 대륙의 은행나무 엘프들의 선조이자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엘프 종족의 뿌리이다.

    과거 인간들이 이렇게 대륙의 강자의 자리에 있기 전 정령들과 함께 자연을 수호하며 포악스러운 다른 종족들을 사냥하고 마나의 힘을 빌려 우월함을 과시하며 찬란한 문명을 이루었던 자들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오아시스에 남은 엘프 왕국은 총 세 곳.

    그중에 하나인 나이트엘프 왕국은 에도라 왕국의 영토 내에 있긴 하지만 사실 왕만 존재할 뿐 은행나무 엘프 왕국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인구수를 가지고 있다.

    일개 부족터와 견줄 법한 땅엔 두세 채의 건물만 올라가 있고 이렇다 할 전투 병력도 없다.

    이들이 이렇게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어떻게 보면 다른 엘프들과는 달리 마나에 극도로 심취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이트엘프는 이름답게 밤에 월등히 강한 힘을 가진다. 그리고 그들은 달을 숭배한다.

    밤을 사랑하고 달을 아끼던 최초의 나이트엘프들에겐 마나는 그리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그들의 영생을 이어 주는 하나의 수단쯤이었다. 시대가 흐르고 인간들과 다른 종족들이 점점 번성하기 시작하면서 마나는 그들에게까지 전수되었다.

    낮에 활동하는 그들은 마나를 마음껏 흡수하고 연구하고 이를 통해 성장해 갔다.

    그들은 천천히 자연의 영역까지 침범하기 시작했다.

    밤이 짓밟히고 달이 탁해졌다.

    이젠 나이트 엘프들의 삶에도 그들의 위협은 현실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점차 증가하는 외부 세력에 대한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큰 힘을 쫓던 나이트 엘프는 밤에 오랫동안 노출된 그들의 몸이 낮에 대륙을 순환하고 잠든 밤의 마나를 더욱 쉽고 강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약과도 같았던 밤의 마나의 강함과 짜릿함에 취한 나이트 엘프들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고 처음엔 그들의 영토를 이 획기적인 마나의 힘으로 지켜 나가는 듯 했으나 차오르는 욕심에 지배되어 자체적으로 분열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욕망에 찬 나이트 엘프들은 더 강한 마나의 힘을 탐하며 욘마곤 자락에 남았고 끝까지 이 힘에 저항했던 나이트엘프들은 다른 국가로 향해 그곳에 터를 잡았다.

    이곳에 남은 자들은 결국 마나석 동굴 근처에 터를 잡아 겨우겨우 삶을 연명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 비루한 몰골이 되었어도 여전히 마나에 대한 탐닉을 포기하지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약한 자들은 아니었다.

    타고난 밤의 사냥꾼들답게 숲에서는 누구보다 민첩하고 날래다.

    빠르고 정확한 활솜씨와 그들이 사용하는 특수한 글레이브는 적의 숨통을 단박에 끊어 놓기에 완벽하다.

    게다가 이곳은 마나석 동굴의 힘이 닿는 지역.

    아무리 거리가 좀 떨어졌다고 할지라도 마나석 동굴의 영향 때문에 신체적 능력이나 여러 가지 개인 능력들이 제한을 받기 시작한다.

    이런 곳에서도 여전히 그들의 힘이 강한 것을 보면 어쩌면 그들이야말로 자신들의 마나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기만 한다면 앞으로 전 오아시스에 더 큰 위용을 떨칠지 모를 일이다.

    정혁은 숨을 죽이고 소수의 나이트 엘프들이 등에 진 주머니에 마나석을 담아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장황히 그들에 대해서 복기해 보았지만 아무리 그들이 강하다 한들, 지금의 정혁에게는 그리 어려운 상대는 아닐 터였다.

    하지만 구태여 벌집을 건드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까지 처리했던 적들이야 소규모의 집단들이었지만 저들은 아무리 작은 규모라고 해도 나이트 엘프.

    게다가 마나를 잔뜩 보충한 상태라면 껄끄러울 것이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다. 조용히 보내 주자.’

    “뭐해?”

    정혁은 순간 깜짝 놀라서 옆을 쳐다보았다.

    옆에는 언제 자신의 옆에 왔는지 모를 나이트 엘프 여성이 그의 곁에 바짝 붙어서 정혁이 보고 있는 것을 같이 보고 있었다.

    “뭐…뭣?”

    정혁이 당황해서 뭐라 말하려 하자 나이트엘프 여성이 싱긋 웃으며 정혁의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여전히 당황한 표정인 정혁을 두고 여성은 무리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쉿. 들킬라.”

    그녀는 다시 정혁을 돌아보며 웃었다.

    어둠이 자욱이 내려앉은 자연 속에서 비춰지는 연보랏빛 피부와 청명한 초록색 눈동자를 가진 나이트엘프 여성은 긴 귀 끝에 동그란 옥색 귀걸이를 하고 검은색 가죽 재질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녀에겐 별다른 무기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양 허벅지에 권총 한 자루와 군용 단검같이 보이는 칼을 하나 차고 있었다. 꽤 괴이한 차림이라고 정혁은 생각했다.

    나이트 엘프들이 지나가고 입을 막고 있던 여성의 손이 떨어져 나가자 정혁은 그녀의 완벽한 잠입술에 감탄하면서도 약간의 경계를 놓치지 않은 채 조용히 물었다.

    “누굽니까.”

    “나? 보면 몰라요? 나이트 엘프잖아?”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정혁을 바라보았다.

    정혁은 또 한 번 골치 아픈 상대가 걸렸다는 불길한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는 한숨을 푹 쉬곤 다시 물었다.

    “아니, 그건 아는데 왜 저를 공격하지 않았냐는 거죠.”

    “아아, 그거. 뭐, 일단 저쪽 왕한테 들은 이야기도 있고 해서요. 정…혁? 맞죠?”

    “저쪽 왕?”

    “아린 국왕 말입니다.”

    정혁은 그녀의 입에서 반가운 이름이 나와 반색했다.

    “은행나무 엘프 왕국에서 오신 겁니까?”

    “뭐… 음, 이걸 거기서 왔다고 해야 하나.”

    애매모호한 그녀의 대답에 정혁은 못내 답답함을 느꼈다. 그러다 불쑥 그녀의 손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인사나 할까요? 건 나이프워커에요.”

    “아, 예 정혁이라고 합니다. 대장장이예요.”

    정혁은 그녀의 손을 잡아 악수를 나누면서 그녀의 이름이 많이 독특하다고 생각했다.

    “내 이름 웃기다고 생각했죠?”

    정혁이 움찔하자 그녀는 통쾌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인간들 손에 컸거든요. 저기, 총 쓰는 놈들이 사는 데서. 그놈들이 총이랑 칼이랑 잘 쓰는 암살자 하나 만들어 보겠다고 저한테 마음대로 지은 이름인데 그냥 바꾸지 않고 있어요. 무식하게 말이야, 그따위로 이름을 지어. 그냥 이프라고 불러 줘요. 그게 편해, 언제 이름을 다 말하겠어요, 건 나이프워커라니.”

    이프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이름에 얽힌 과거사를 조금 풀어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과 표정엔 그 불편한 과거에 대한 어떤 분노도 담겨 있지 않았다.

    “부탁이 있는데, 아린 국왕의 부탁이기도 하고.”

    불쑥 그녀가 자신의 용건을 밝혔다.

    정혁은 이 괴이한 만남과 급작스러운 전개에 당황하면서도 동시에 호기심을 가지고 이야기해 보라는 듯이 팔짱을 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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