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21화 (121/200)
  • ◈121화

    “먼저, 먼저는 젠트라.”

    “…젠트라?”

    안나의 물음에 E는 인상을 살짝 구겼다.

    그는 진지한 안나의 표정을 보고 그녀가 떠보는 것이 아니라 절실한 마음을 품고 자신에게 젠트라라는 고대룡에 대해서 묻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E는 의아했다.

    그의 기억에 젠트라는 이미 그들이 조기에 파괴시켜 없앤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젠트라는 그들에게 굉장히 위협적인 존재였다.

    악마왕의 입장은 세계의 파괴에 무조건적인 찬성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사탕발림에 늘 넘어와 리셋의 완벽한 도구로 활용되어 왔다.

    대천사장은 본디 정의로웠지만 오만했다.

    그래서 결국 마지막 순간까지 중간계를 방치하다가 리셋의 화를 피하지 못했다. 정령왕들이야 똘똘 뭉친 적이 없었기에 각개로 처리하기 편했다.

    그러나 용족들은 달랐다.

    그중에서도 특히 고대룡 젠트라만큼은 더 그랬다.

    고대룡 젠트라.

    그들이 항상 의문을 품었던 존재였다.

    젠트라는 마치 시스템의 오류처럼 생각보다 월등히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E의 기억상 최근 리셋 이후 가장 빨리 시스템에서 배제시킨, 그러니까 쉬운 말로 파괴 작업이 들어가 성공시킨 존재이기도 하다.

    이제까지의 데이터상 젠트라가 리셋의 말기까지 살아남아 있을 경우 항상 편안하게 과정이 진행되지 않았다.

    그는 늘 이 귀찮은 ‘오아시스’의 존재들과 연합해서 리셋을 막아내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젠트라의 힘은 엄청났다. 모든 용족들의 수장답게, 그들의 조상답게 한 번의 브레스로 천지가 갈라졌다. 그 광범위한 공격에 그대로 노출되면 뼈조각 하나 남지 않고 완전히 소멸되었다.

    이런 고통을 알기 때문에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 세계가 초기화 되고 세계의 기반을 닦는 고대룡의 역할이 마무리 되는 것을 확인한 그들은 그를 바로 시스템에서 지워버렸다.

    그 시기에만 할 수 있는 그들로서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 결과.

    세상은 보다 편안하게 그들의 손안에서 굴러갔다.

    마지막 리셋 이후 정혁이라는 변수가 파악 되었지만 그들에겐 그리 큰 신경거린 아니었다.

    이 정도의 사실은 그의 앞에 있는 저 안나라는 여자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세계에 남아 있을 리 없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젠트라는 이미 ‘삭제’되었어.”

    “…삭제?”

    “모르고 한 말이야? 뭐야?”

    안나는 생각했다.

    그럴 리 없다. 정혁이 가지고 있던 나무 토큰에는 젠트라의 마나가 작게 남아 있었다.

    젠트라는 정혁이 가진 독특한 마나인 황금빛 마나 즉, 시간의 주관자가 소유하고 있던 마나의 색을 가지고 있다.

    이는 정혁에게 토큰을 받아 보고 느낀 것이었다.

    만약 저 남자의 말대로 젠트라가 ‘삭제’되었다면 그의 잔여 마나가 남아 있을 수 없지 않은가?

    더구나 정혁은 그가 자신을 느끼고 알고 있노라 시스템을 통한 알람창을 받았다고 했다.

    ‘말을 아껴야 할까?’

    안나는 조용히 E를 보았다. 그가 소멸 중이라곤 하지만 그에게 어떤 장치가 추가적으로 심겨져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의 직위가 어떻게 되었던 간에 리안에게 덤벼 놓고 살아 나온 놈이다.

    그것은 그만큼 강할 뿐 아니라 영악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놈들은 젠트라가 죽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비록 불쌍한 처지라도 의심은 끝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 아쉽네. 어디서 어떻게 삭제됐는데?”

    E는 고개를 갸웃하곤 큰 숨을 들이 쉬었다가 내쉬면서 중얼거렸다.

    “어디보자….”

    머릿속에서 뭔가를 찾아보는 것처럼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던 그는 손가락을 딱 치고 생각났다는 듯이 안나를 보았다.

    “그의 흔적은 타이런 대륙 정중앙의 노래하는 화산 엔듀라곤에서 찾을 수 있을 거야. 아마 데이터 쪼가리겠지만, 그거라도 원한다면 그쪽에서 수집할 수 있겠지.”

    “엔듀라곤?”

    안나는 타이런의 중앙 초원지대에서 조금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볼 수 있는 높게 홀로 솟은 산을 떠올렸다.

    깊이에는 꿈틀거리는 용암을 품고 있으며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가는 방법은 오직 분화구를 정면으로 돌파하는 수밖에 없는 끔찍한 산이었다.

    “거기에 젠트라를 밀어 넣은 건 아니지?”

    “…뭐 방법이 있나. 완전 소멸시키려거든 방법이 그것뿐이었으니.”

    작은 힌트는 얻은 셈. 좋은 수확도 있다.

    놈들은 젠트라가 소멸된 줄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정혁이 들고 있는 토큰이 증명하듯 젠트라는 살아 있다.

    아마도 ‘그’가 어떤 손을 쓴 모양.

    계획대로 정혁이 젠트라를 에고 장비로 만들 수만 있다면 저들의 힘이 나날이 강해지고 있는 이 시기에 곧 닥칠 마지막 대전투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과정이 문제긴 하지만 말이다.

    안나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

    겉으로 내비칠 순 없었지만 제발, 리안이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리안이 있어야 이 모든 답답하고 속 뒤집어지는 이야기를 정혁 앞에서 제대로 해 줄 수 있다.

    정혁은 아직도 수박 겉핥기 정도의 사실만 알고 있다.

    리안의 정보 차단막이 있어야 저들의 마수에 걸리지 않고 안전하게 모든 사실을 전달해 줄 수 있다.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걸 그도 알고 있어야 한다.

    E의 신체가 더 많이 소멸해 가고 있다. 안나는 고개를 저으며 정신을 되찾고는 말했다.

    “너희들 안에서 정혁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지?”

    “…우리 멍청하신 A께서는 그를 거의 무시하다시피 하고 있지. 앞으로도 그럴걸? 대장장이 따위의 직업을 가지고 있으니 더 그렇지 않을까? 리셋은 시작되었으니 우리 쪽 힘은 점점 강해질 거고 강해진 만큼 조심성은 줄어들겠지. 대악마 아크를 어떻게든 물리쳤다 하더라도 그들은 코웃음칠지도 몰라. 너희들이 지난 몇 세대를 발버둥 쳤지만 결국 리셋은 반복되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동일하리라 믿을 거야. 그렇지만.”

    E의 눈빛이 사뭇 달라졌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들은 이 생각 자체가 오류라고 여겼겠지만, 글쎄. 끊임없이 우리를 방해하던 그 바이러스. 그자의 냄새가 가장 많이 밴 놈이야. 그, 정혁이라는 놈. 그래서 내가 무엇보다 빨리 놈을 찾아내려고 했지만 그럼 뭐하나, 윗대가리들이 일을 모두 망쳐 버린 걸.”

    E는 고개를 저으며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리안? 물론 중요하지. 초대 ‘오아시스’의 칭호를 가진 자이자 이 세계에서 데이터상 가장 강한 자이고 우리 입장에서는 당장에 제일 중요한 타깃일 수 있어. 그래! 알지 알아! 하지만 왜? 왜 지금 이 중요한 타이밍에 그렇게도 뒤를 밟고 싶었던 우리를 쏙쏙 잘 피해 가던 그 미꾸라지의 위치가 떡하니 밟혔을까? 왜? 어째서?”

    E가 어깨를 으쓱하며 안나를 보았다.

    그래, 그 생각을 미처 해 보지 못했다.

    아무리 그들의 지도자가 오만하여 판단력이 흐려졌다 하더라도 이번 타이런에서의 전투로 인해서 정혁이라는 인물에 대한 재평가를 내릴지도 모를 일이다.

    정혁의 존재감이 세계에 점점 알려지기 시작하는 이 시기에 리안이 그들에게 ‘우연히’ 노출됐을 리 없다?

    아니다. 어쩌면 이 모든 일이 ‘그’가 계획해 놓은 단계 속에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자가 말하는 그 바이러스. 우리를도와주고 있는 ‘그’가 말이다.

    그 덕분에 정혁은 타이런에서의 첫 전투를 잘 치를 수 있었다.

    비록 이번 전투에서 그가 온전한 힘으로 아크와 싸워 이길 순 없었지만 그는 그답게 자신의 힘을 키우기 위한 다음 걸음을 책임감 있게 내딛었다.

    적은 데미지와 손해로 큰 이득을 봤다.

    어둠 속에 숨어 있던 그 남자도 전장에 나왔으니 말이다.

    카탈은 타이런에 비하면 작은 대륙이다.

    세계에 대륙이 둘밖에 없다지만 작은 물에서 치던 물장구가 큰물에서도 동일하게 먹힐 거라는 생각은 큰 욕심일 수밖에 없다.

    이번 부딪침으로 그는 더 큰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안나는 어쩌면 이 모든 과정이 누군가의 설계 속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톱니바퀴가 알맞은 자리에 맞춰 들어가 돌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다.

    ‘오아시스’의 플레이어들과 저 검은 말 조직의 움직임,

    악마 군단의 침공과 카탈의 통일까지 말이다.

    결국 큰 그림으로 보면 세계는 하나가 될 것이다.

    그 중심에는 정혁이 그리고 ‘오아시스’의 플레이어들이 서 있을 것이다.

    마지막 싸움의 그림은 그렇게 그려지고 있다.

    이 그림을 그리는 자, 그자가 부디 실수하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다.

    “정혁, 그 녀석의 존재를 가리기 위한 연막작전이지 않았을까? 우리 쪽도 큰 손실을 입고 지금 회복 중이겠지만 너희도 마찬가지로 전력에 상당한 손실을 입은 거잖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을 지키려 했다는 것은 그만큼 그 녀석이 엄청나게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것 아니겠어?”

    안나는 E의 말을 가만히 들으면서 팔짱을 낀 채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우리 쪽에서 쉽게 시야를 녀석에게로 틀진 않을 거야. 마계의 골치거리, 그 아크 녀석이 다른 대악마들을 모두 소멸시켜 버렸거든. 사실 놈은 진즉에 우리의 통제를 벗어났어.”

    “…뭐?”

    E에게 듣는 새로운 사실에 안나의 눈동자가 커졌다.

    “아크, 녀석은 욕심이 강해. 중간계에 추종 세력을 만들어서 놈들을 넓게 퍼트리려 했지. 게다가 악마왕을 함정에 빠트려서 죽여버린 것도 아크야. 권력에 대한 욕심, 힘에 대한 추구. 자신의 위치를 더욱 높이려는 데 혈안이 된 놈이야. 통제 불능이라고.”

    “그게 가능해? 어찌 되었건 너네 끄나풀이었잖아.”

    “물론 혼자서는 불가능 했겠지. 천계에 이상한 인연이 있는 것 같더라고. 그리고 넌 자꾸 우리를 악역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실은 우리도 멀리서 보면 조율자야. 그렇지 않아? 너희가 보기엔 우리가…. 그래, 세상 나쁜 쓰레기들일 테지만 우리는, 일종의 백신이라고. 백신. 자, 생각…해 봐.”

    E가 양 손을 들었다가 이제 거의 사라져 가는 자신의 형체를 보곤 멈칫했다. 하지만 개의치 않는 듯 말을 이었다.

    “여기에서부터 여기까지.”

    E는 양손 검지를 들어 안나 앞에 보인 후 그것을 평행하게 세웠다.

    그리곤 검지와 검지 사이에 자신의 마나를 사용하여 작은 점들을 하나씩 찍었다.

    평행하게 세워진 양손 검지 사이에 점들이 하나씩 일정한 간격으로 찍혀 들어갔다.

    “이게 정상이라고 생각해 보자. 그러나 이 정상적인 설계에 하나가 사라지거나.”

    점 하나가 스르륵 하고 사라진다.

    “혹은 다른 하나가 엄청 거대해지면?”

    다른 점 하나가 다른 점들에 비해 엄청 크게 부풀어 올랐다.

    “그럼 결국 균형이 무너지게 된다구. 이 무너진 균형의 대가는 분명 어디에선가 생기게 마련이지. 지금은 경미해서 보이지 않지만 언젠간 비틀린 이 부분들이 우리에겐 엄청난 결함이 되어 다가온단 말이야. 그걸 막으라고 우리가 있는 거야. 때가 되면 이 비틀린 것들을 모두 초기화하고 다시 재가동시킬 수 있도록 돕기도 하고. 근데, 이런 선순환의 과정을 너희가 막는거 잖아?”

    “…웃기는 소리.”

    안나가 코웃음 쳤다. 그러자 E가 어련하시겠냐는 듯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 입장에서 말한 거야, 우리 입장에서. 어쨌든, 몇 번의 과정을 겪으며 우리는 이번 리셋에 젠트라를 먼저 소멸시키는 수를 한번 둬 본 거지. 우리가 우리 스스로 균형을 깨 본 거야. 몇몇의 리셋 속에서 젠트라는 늘 우리를 힘겹게 했으니까. 그 결과가 마치 스노우볼처럼 굴러서 지금까지 오게 된 거라고 나는 생각해. 그러나 너희 입장에서는…?”

    “…계획…된 거다…?”

    “그래.”

    E가 박수를 짝 치며 대답했다.

    흐려진 손이었기에 박수 소리는 충분히 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E는 확신에 차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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