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20화 (120/200)
  • ◈120화

    “이 땅에서 하드린의 옅은 마나가 조금 느껴지고 있긴 해요. 하지만….”

    정혁은 불을 보며 멍하니 있다가 에트론을 흘깃 보았다. 에트론 역시 타닥거리는 소리를 내며 정감 있게 타오르는 불길에 시선을 빼앗겨 계속해서 일렁이는 불꽃만 보며 말을 이어 가지 않았다.

    기다려 주기로 했다. 녀석은 녀석대로 어떤 어려움에 부딪친 모양이었다.

    한참, 풀벌레 소리와 거대한 나무들이 바람을 타고 잎들을 스쳐 가면서 내는 소리에 취한 채 정혁은 고른 숨을 쉬었다.

    그러면 안 되겠지만 이 여유와 쉼이 상당히 달콤하다고 생각했다.

    정상에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편안함이란 사치와 같이 느껴졌다.

    누가 그랬다.

    이제는 개발되어 흔적도 남지 않은 아프리카 땅의 거대한 초원엔 과거에 사자라고 하는 맹수가 있었단다.

    그 사자는 동물의 왕이어서 넓디넓은 초원에서도 배를 까고 누워 편안한 휴식을 취할 수 있다고 했다.

    정혁은 그런 사자가 되고 싶었다.

    ‘한’이었을 때엔 그가 벌려 놓은 수도 없이 많은 분란들 덕분에 편안히 쉴 곳을 찾기 어려웠다.

    로그아웃 따위를 해서 도망쳐도 됐지만 그 사이에 또 어떤 자가 어떤 트릭을 써서 자신을 짓밟으려 할지 몰랐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쉬는 것은 정말, ‘한’에게는 사치였다.

    대장장이가 되고 정혁이 이 세계 안에서 살아가며 느낀 것은 이젠 더 이상 그런 모습으로 정상에 서고 싶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사자와 같은 여유를 가진 랭킹 1위가 되고 싶다.

    그를 돕는 이들과 함께라면 가능하리라고 믿기에 정혁은 그런 미래를, 자신에게는 조금 과분하다고 할지라도 꿈꾸고 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제 동료라고 할 순 없을 것 같아요.”

    생각에 잠겨 있던 정혁에게 씁쓸한 에트론의 말이 들렸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자세를 고쳐 잡아 앉은 뒤 에트론에게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애초에 천계의 규칙을 어기고 중간계에 개입한 것부터가 더 이상 동료라고 부를 수 없는 거 아냐?”

    “하… 하긴 뭐 그렇지만요. 저는, 저는 그래도 어떻게든 정신 차리게 해서 함께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저희같이 천계의 수발을 드는 위치의 천사들에게는 같은 위치에 있는 동료들에 대한 애착이 조금씩은 있거든요. 아무래도…. 예, 뭐 상대적으로 천대받는 우리이기 때문에 끼리끼리 논다고 하죠?”

    웃기다.

    마계의 악마들이든, 천계의 천사들이든.

    구태여 이런 존재들을 창조해서 왜 불필요한 규칙을 만들고 이들의 삶을 억압했을까?

    세계를 창조했다는 ‘신’이라는 놈의 장난일까. 혹은 이 게임 자체를 만든 어떤 사람들의 설계였을까.

    그렇다고 그 창조된 존재들이 세계의 균형에 관여하고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역사의 흐름 속에서 마계의 악마들은 틈만 나면 중간계를 잡아먹으려고 난리였고 천계는 중간계에서 악마들과 싸우다가 저들이 뭐라고 거대한 존재라도 되는 양 천계로 도망쳐 그들 스스로를 그곳에 묶어 버렸다.

    그나마 플레이어들의 삶에 관여했던 존재 위의 존재 용 군단과 정령왕들은 지금 어떤가?

    용 군단은 정작 이 중요한 때에 모두 사라져 없고, 정령왕들은 그 오만한 태도를 어떻게든 숨겨 가며 뒷전에서 불난 집을 지켜보고 있는 꼴이다.

    라테에게 들었듯 가이아의 혜안이 없었다면 라테 역시도 이와 비슷한 입장이거나 혹은 더 큰 파괴의 소용돌이 속에서 난동을 부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떻게든 되돌려 보려고 했는데….”

    “했는데?”

    “…천사들에게는 천향이라는 특유의 냄새…라고 할까요? 그 향기가 있어요. 우리끼리는 그 냄새를 맡을 수 있거든요. 여러분이 말하는 일종의 마나? 그것과 비슷한 결을 가지고 있다고 보면 좋을 것 같은데. 제가 이 욘마곤이라는 땅에서 느낀 하드린의 천향엔 이미 천사의 부분이 남아 있지 않는 것 같아요. 어쩌면 녀석은….”

    에트론이 착잡한 얼굴로 불을 보며 눈만 껌벅거렸다. 정혁이 어깨를 으쓱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녀석의 날개는 이미 형체가 사라졌거나 혹은 검게 물들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천계에는 발을 디딜 수 없게 됐다는 거죠.”

    “날개가 그렇게 중요한 거야?”

    “그럼요. 천사들에게 날개는 상당히 중요해요. 저를 보세요.”

    에트론이 어깨를 펴며 자신의 날개를 드러냈다.

    평소에는 연하게 숨겨져 있던 날개가 에트론이 의식하는 순간 순백색으로 빛나며 넓게 펼쳐진다.

    언제 봐도 녀석답지 않게 멋들어진 장면이다.

    녀석이 날개를 펄럭이자 강한 바람이 마치 모닥불을 꺼트릴 것 같이 불어 닥쳤다가 사라졌다.

    “이 날개의 개수에 따라 천계에서는 등급이 나뉩니다. 그리고 이 날개를 통해서 천사들은 여러분이 말하는 마나와 비슷한 힘을 유지할 수 있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이 날개가 천계에서 살아갈 수 있는 증표가 된다는 겁니다. 조금의 타락이나 조금의 손상도 허용될 수 없어요. 이건 엄중한 천계의 법도죠.”

    에트론의 날개가 다시 옅어졌다.

    “그렇기에 굉장히 민감하기도 해요. 무엇보다도 개인의 마음가짐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데 천계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깨져 가는 천사들은 날개의 빛이 탁해지기 시작하다가 결국은 검게 변하기도 하거든요. 대개는 그 전에 다른 천사들이 도와 그를 정상적인 궤도로 돌려보내긴 하지만 천계 전체가 동면에 들어가 활동을 멈춘 지금은 사실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하기 어렵죠.”

    “정상적인 궤도라는 말이 좀 그렇네?”

    “정확해요.”

    에트론이 정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천계의 무기고 빅토리아의 열쇠지기 에트론이 당신을 더욱 깊이 신뢰하기 시작합니다.]

    “순화시킨 거죠. 실은… 정신개조이면서.”

    에트론이 자신의 날개를 힐끗 보았다.

    “사실은 제가 이런 마음을 먹고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만으로 제 날개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쳐야 하거든요?”

    “그런데?”

    “이상해요. 아마도 정혁 님과의 계약 과정에서 저는 더 이상 천계와 이어지지 않게 된 것 같아요. 천계의 힘을 받지 않고 정혁 님의 마나를 받아들이기 때문일까요? 몇 가지 실험들을 조금씩 해 봤었는데 제 날개의 빛은 여전히 빛나고 있잖아요. 얼룩이 지지도 않았고.”

    정혁이 옅어진 그의 날개 이곳저곳을 살펴봤다.

    전과 다를 것 없다. 아까 펼쳤던 그의 날개 역시도 백색의 깨끗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긴, 그에겐 천계의 힘이 필요 없다. 정혁과 계약했으니 이제는 에고 장비일 뿐. 힘을 받아도 정혁의 힘을 받아야 맞다.

    ‘다만, 무기고만큼은 양보할 수 없지. 암.’

    속물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에트론의 힘은 앞으로도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에트론이 가지고 있는 열쇠 뭉치만 봐도 알 수 있다.

    정혁이 이제까지 그를 통해 꺼내 사용한 무기들은 많아 봐야 3분의 1도 되지 않을 것이다. 얼마나 강한 무기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지,

    정혁의 입장에서는 설렐 수밖에 없다.

    “이야기가 좀 샜네요. 어쨌든, 하드린은 아마 천계로 돌아갈 순 없을 거예요. 다시 만나게 된다면… 제거…해야겠죠?”

    에트론이 작게 중얼거렸다. 정혁은 그를 물끄러미 보았다.

    천계의 제일 하층에서 함께 지냈던 기억들이 스치는 모양이었다.

    “방법이 있지 않을까?”

    “방법이…?”

    “죽어라 패 주는 것도 가능할 것 같고.”

    에트론은 그의 말에 피식 웃었다. 그러나 웃음소리가 가시기도 전에 그의 마음엔 다시 먹구름이 몰려든 것 같았다.

    “농담으로 한 이야기이긴 하다만 어찌 되었건 녀석도 우릴 만나게 되면 본인이 그리고 싶었던 미래를 그릴 수 없을 거란 사실을 깨닫게 될 거야. 천계의 천사들이 어떻게 하든 내 알 바 아니고 너를 봐서라도 정신 차릴 시간이나 기회 정도는 줄 수 있도록 해 볼게. 협조만 해 준다면 말이야.”

    그나마 정혁의 말이 위안이 되었던 걸까. 에트론은 그때서야 굳었던 표정을 풀고 긴 숨을 들이쉬었다.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무료하고 긴 시간이었는데 어쩌다 이런 소용돌이에 휘말려서 그에 비하면 손톱만큼의 짧은 시간을 이렇게 스펙터클하게 보내고 있네요. 재밌어요. 덕분입니다.”

    “동감이야.”

    정혁은 그에게 툭 하고 대답하곤 뒤통수에 양손을 대고 뒤로 드러누웠다. 넓은 나뭇가지는 안정적으로 그의 몸을 받쳐주었다.

    [에트론이 당신의 호의와 반응에 만족합니다. 더욱 깊은 신뢰 관계를 구축합니다. 친밀도가 높은 수준으로 상승합니다.]

    ***

    안나는 급히 지하 감옥 안을 달려갔다.

    아직은 이르다.

    어쩌면 이 기회가 다시는 없을 수도 있다.

    제논의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는지라 더 그와 시간을 보낼 수 없었다.

    더 캐내야 할 정보들이 많다.

    소멸 과정이 이렇게나 빨리 진행될 줄은 예상치 못했다.

    일전에 만났던 결계 마법사들이 다급히 달려오는 안나의 발걸음 소리에 맞춰서 거대한 방의 결계를 열었다.

    안나가 재빨리 그 안으로 달려 들어가자 그들은 익숙하다는 듯이 결계를 틀어막았다.

    “오우. 오셨나?”

    팔뚝에서부터 시작한 비정상적인 분열이 그의 전신을 뒤덮고 있었다.

    분명 옷을 입고 있는 상태였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외형 전체가 일그러지는 것처럼 흐릿하게 갈라져가고 있었다.

    지난번 그와 대화를 나누고 난 뒤 불과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었는데 이만큼이나 상황이 안 좋아 지다니.

    “이것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증거겠지?”

    E가 안나를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뭐가?”

    “빠르잖아, 내가 소멸되는 속도가. 원래 이 정도는 아니야. 녀석들도 리안을 처리하느라 상당한 전력을 잃었으니 그들을 재생성하는데도 벅찰 테고 아, 혹시 마계의 악마 놈들이 일 처리를 제대로 못해서일 수도 있긴 하겠다.”

    “그 악마들의 침공까지도 너희들의 계략이 숨겨져 있는 거야?”

    “야, 우리를 너무 띄엄띄엄 보는 거 아냐?”

    E가 한심하다는 듯이 안나를 보았다.

    안나는 그 시선이 상당히 불쾌하다고 느끼면서도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그럴 시간조차 아까웠다.

    그녀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E는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가 틀어막아 놓은 천계에 여섯 번째 리셋을 위해서 심어 놓은 도구 하나가 있어. 하… 뭐시기, 천사였는데. 녀석이 중간계로 내려와 마계와 손을 잡았지. 우리 입장에서는 뭐 그 정도의 마음에 균열을 내 주는 것쯤은 쉬운 일이니까. 그렇게 시작한 과정이 아마도 대악마까지는 진행이 됐겠지?”

    “계속해 봐.”

    “…근데 내가 이렇게 빨리 소멸하고 있다면 너희 잘나신 대장장이께서 아크를 막았으려나?”

    E가 안나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곤 눈을 살짝 찡그리며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그래, 리안 말고 그놈이구나. 그놈이 아크를 물렸구나. 그 곰 같은 놈이 움직였다고? 고생 좀 했겠는데?”

    “어차피 움직이실 분이었어.”

    “그래? 그러기엔 뭐, 이전의 리셋 과정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다시피 했지 않나?”

    “흥.”

    안나가 콧방귀를 뀌자 E는 자지러지게 웃어 제꼈다. 안나 입장에서는 상당히 기분 나쁜 웃음이었지만 이 역시 꾹 참아 냈다. E는 그녀의 인내심에 박수를 치며 인정한다는 듯이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좋아 좋아. 자, 이제 시간이 얼마 없다. 뭐 궁금한 거 있어?”

    안나는 올 게 왔다는 듯이 침을 꿀꺽 삼키며 그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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